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에 나온 '방구뽕'은 문제적 인물이다. 학원 버스를 탈취해 부모 동의도 없이 아이들을 산에 데려간 것만 보면 분명 납치범이다. '개구리 소년'을 연상시키는 이 사건을 두고 괜찮다고 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건강해야, 행복해야 한다"라며, 아이들에게 군고구마를 구워주고 놀이 시간을 선사한 것을 보면 단순 납치범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_방구뽕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놀러가는 장면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_방구뽕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놀러가는 장면
ⓒ ENA

관련사진보기

 
우영우 변호사는 방구뽕을 사상범이라고 옹호하며, 열 살 남짓한 이 아이들이, 저녁 10시까지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자물쇠반' 학원 출신임을 강조한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미성년자를 약취 유인한 죄로 방구뽕은 유죄를 선고받는다. 합당한 판결이지만, 생각이 복잡해졌다.

실제로 학원가에 가보면 교복 입은 아이들이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우르르 편의점에 몰려와서 라면과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자물쇠반'을 검색하면 방학맞이 예비 고3, 고1 자물쇠반 홍보 자료가 주르륵 뜬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이어지는 자물쇠반은, 점심·저녁 식사시간을 제하고 나머지는 학원 강의와 문제 풀이, 자습으로 운영된다.

그런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아무리 성적이 중요하다지만 하루에 13시간씩 학원에 붙잡혀서 공부만 해서는,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건강해야, 행복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해도, 청소년이, 특히 고3이 그래야 한다는 데 찬성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상한 학원의 수상한 강사

대학교 2학년 때, 강남에 있는 한 수학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일이다. 면접 보러 간 첫날, 갑자기 선생 하나가 안 나왔다면서 내게 덜컥 예비 고3 반을 맡겼다. 나는 문과 출신이다. 수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잘하지는 않는다. 소싯적에는 수학 올림피아드 입상도 한 적이 있지만 과거의 일이다. 현실의 나는 중등수학을 가르치려고 해도 철저한 예습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 내게 문제집을 훑어볼 시간도 주지 않고 예비 고3반에 강사로 들어가라니! 아니나 다를까, 둘째 날부터 한 학생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남은 학생을 붙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기로 맘먹었다.

나는 예비 고3인 준이를 두 달 동안 가르쳤다. 준이는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학원에 머물렀다. 한 달에 학원비로만 100만 원을 낸다고 했다. 이과생에게 일대일로 과외를 받는다고 해도 모자랄 금액이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예비 고3인 준이뿐만 아니라 예비 고1인 범이, 초등학교 4학년 훈이까지 다양한 터울의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급 5천 원씩, 한 달에 4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이 요상한 반에서 강사로서 제 몫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저녁 8시, 준이가 문제를 푸는 시간이 되면 나는 다른 선생님들과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내가 옷에 라면이며 볶음밥이며 음식 냄새를 폴폴 풍기며 돌아오면, 준이는 과자 부스러기 따위나 주워먹고 있었다. 학원에서 학원으로 점프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내 배만 부른 것이 못내 미안했다.

나는 내기를 제안했다. 어렵기로 유명한 <쎈 수학> 3단계 문제를 놓고 빨리 푸는 사람한테, 진 사람이 밥을 사주자는 제안이었다. 선생이 무조건 이길 텐데 이게 말이 되냐고? 그렇지 않다. 우리의 승률은 비슷했다. 맹세컨대 나는 한 번도 일부러 져준 적이 없다. 준이는 강사인 내가 지는 꼴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문제에 달려들었다. 풀이 과정을 칠판에 적던 그 순간만큼은 MIT 학생 저리가라 할 정도로 우리는 수학을 향한 열의에 불타올랐다. 그래봐야 결과는 김밥이며 라면 등을 나눠먹는 거였지만.
 
문제 풀 때만큼은 준이도 맷데이먼 뺨치는 열의로 불타올랐다.
▲ 영화 <굿 윌 헌팅> 중에서  문제 풀 때만큼은 준이도 맷데이먼 뺨치는 열의로 불타올랐다.
ⓒ 미라맥스

관련사진보기

  
구정 설을 앞둔 날이었다. 뉴스에서는 귀성길 인파로 고속도로가 미어터진다는데, 학원에는 예비 고3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다른 반이 텅텅 빈 걸 보니 억울함이 몰려왔다. 남들 다 놀러가는데, 우리만 여기에 있어야 한다니! 그때 남은 인원이 예비 고3 셋에, 강사는 나 포함 둘이었다. 우리는 일단 맛있는 것부터 먹고 기분전환을 하기로 했다. 피자 두 판을 시켰더니 순식간에 동났다. 콜라로 입가심하고 둥구둥구 배 두드리며 행복한 이 와중에 수학 공부가 왠말이냐, 나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설인데 우리끼리 윷놀이나 할까?"

그 순간, 학생들이 까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는 대동단결하여 삽시간에 먹은 흔적을 치우고, 윷놀이 키트를 사오고, 책상을 뒤로 밀고, 유리문을 A4 용지로 가렸다. 그렇게 짜릿한 윷놀이는 처음이었다. 숨소리만으로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날의 승패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예비 고3이었던 아이들이 무척 많이 웃었다는 것 외에는.

방학이 끝나고 알바비를 받을 때가 됐는데 원장이 학원에 나오질 않았다. 사실 그 학원에 출근한 지 이틀 만에 원장이 임금 체불 때문에 다른 선생한테 멱살 잡힌 걸 본 적이 있다. 그래봐야 내가 받을 돈은 100만 원 남짓, 설마 그걸 떼먹을까 싶었는데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약속된 날짜에 돈을 받지 못해 풀이 죽어 있었더니 준이가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쌤,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맛난 거나 먹으러 가요. 제가 쏠게요!" 니가 쏘긴 뭘 쏘냐, 웃기지 마라 하면서도 어느덧 우리는 곱창집에 앉아 있었다. 설에 윷판을 벌였던 그 멤버 그대로 모여, 우리는 스프라이트로 건배를 외쳤다.

예비 고3인 그 학생들이나 대학생으로서 가르쳤던 우리나, 나이 차는 얼마 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로의 상황에 그토록 감정 이입하기가 쉬웠나 보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공부에 쫓기고, 늦은 밤과 명절 전야에도 공부하는 학생들이 나는 안쓰러웠다. 준이도 알바비도 제대로 못 받고 돌아서야 하는 강사가 안쓰러웠겠지. 우리는 조금씩 억울했다. 그때의 그 일탈은 '학원'으로 표상되는, 우리를 억누르는 규칙에 대한 나름의 도전이자 위반이었다. 다행히 알바비는 일주일 뒤에 입금되었다. 그 학원은 얼마 안 가 망했다.

 
망가진 세상의 규칙 따르기?

악법도 법이라며, 망가진 세상의 망가진 규칙을 꼭 따라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규칙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규칙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것을 왜 따라야 하는지, 논박하고 협상할 권한이 필요하다. 그래야 커서도 건강한 방식으로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학원에서 강사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위반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부당한 규칙을 억지로 따라야 했던 경험에서 나온 반동이었다.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바뀌는 아버지의 규칙 앞에서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규칙은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결과,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뒷구멍으로 몰래 규칙을 뛰어넘는 방법은 알았어도 권력자를 설득하고 내 주장을 펼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어쩌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방구뽕씨도 억압적인 유년시절은 보낸 것은 아닐까. 초등학생 자물쇠반을 운영하는 학원 원장이 엄마라면, 불가능한 설정도 아니지 싶다.

준이는 그 학원을 졸업한 뒤로도, 소소한 일탈을 감행하며 나름의 즐거움을 찾는 것 같았다. 원하는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이후 준이하고는 연락이 끊겼다. 최소한 지금 당장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학생이었으니, 어른이 된 지금도 자기를 잘 보살피고 있으리라 믿는다.

9화에서 우영우에게 귓속말로 한 어린이는 말한다. "맨날맨날 방구뽕 아저씨 만나서 놀고 싶어요." 자물쇠반에서 매일 밤 10시까지 밥도 못 먹고 공부해야 했던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나는 어린이든, 학생이든, 성인이든 간에 지금 당장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의 어떤 주기에 있든 인간은 먹고, 자고, 쉬고, 서로 관계 맺고 돌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균형이 깨진 상태가 지속되면 몸과 마음이 고장 난다. 자기 욕구를 억압하는 데 익숙하면 자기가 병이 났는지도 모르고, 타인의 욕구마저 억압하는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가 어떤 인간을 키우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태그:#우영우, #방구뽕, #학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