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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 [기자말]
첫인상이 단정하고 차분하다고들 한다. 어디까지나 첫인상인데, 아직 거기에 속고 계신 분들은 내가 대화 중에 다이어리를 펼치면 흠칫 놀란다. "이걸 알아볼 수 있어요?" 내가 봐도 괴발개발 난장판. 일정표라기보단 추상예술에 가깝다. 

한 번씩 꽂힐 때마다 몇 달의 계획을 모두 표시해 버리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계획은 다 틀어져 있다. 계속 볼펜으로 죽죽 긋고, 그 위에 또 휘갈겨 쓴다. 결국 나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돼서 점점 다이어리를 안 보게 된다. 아시겠지만 다이어리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내 ADHD는 복 받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획과 실천을 좋아하니까. 한때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로 살았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블로그에 중간보고식으로 기록하면 잘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록에서 한 줄을 지우는 순간, 뇌 속에서 도파민이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오는 그 짜릿함.

오래 살아도 이룰까 말까 한 목표도 많았고, 무리한 계획과 오래 가지 않는 흥미 때문에 무기한 연기된 것들도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내가 도파민 중독이란 걸 확실히 알게 됐다. 그리고 도파민의 노예가 되기보다 적당히 힘을 빼고 도파민을 일꾼으로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할 일을 물건처럼 들여다보기

계획 세우기와 목록 쓰기가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관점을 달리 하면 게임이 될 수 있다. 우선 이것도 하나의 창작이라서 계획과 목록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작은 만족감이 생기고, 생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통제감을 준다. 할 일을 쓰는 것은 '행동'이기 때문에 다음 행동으로 이어가기 쉽다는 것도 장점이다.    

기록과 친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는다면 다를지도 모른다. 책 <불렛저널>을 참고해 보자. 주의력 결핍 장애(ADD)를 가진 저자 라이더 캐롤이 기록으로 일상을 관리하는 기술을 안내하는 책이다.

일반적인 스케줄러 작성과도 비슷하지만 자신만의 아이콘을 만들어서 경제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점, '맞춤형 컬렉션'으로 일상의 모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점, 색인 기능을 이용해 원하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점 등이 좋다. 나도 요즘은 너덜너덜해진 다이어리를 놓아두고 불렛저널식으로 수첩을 쓴다.
 
'불렛(bullet)'은 기록에 쓰는 자기만의 아이콘을 말한다.
▲ 책 <불렛저널> 126쪽 "불렛(bullet)"은 기록에 쓰는 자기만의 아이콘을 말한다.
ⓒ 한빛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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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목록으로 남아 있으면 다음 일정을 확인할 때 이전에 한 일도 보게 된다.  그만큼 보람을 느낄 기회가 많아진다. 나를 채근하는 기록보다, 뒤에서 묵묵히 나를 밀어주는 기록이 힘이 될 때가 많다.

해낸 일이 없다고? '5분간 숨쉬기 운동'이라도 써보자(숨쉬기는 좋은 운동이다). 과거의 나처럼 거창한 것들을 적기보다 해낼 수 있을 만큼 사소하고 쉬운 할 일을 쓰고, 결과가 아닌 실행을 목표로 삼는 게 낫다. '한자능력시험 2급 따기'보다 '한자능력시험 2급 응시하기'나 '2급 준비용 책 한 권 3번 보기'가 좋다.

하루 할 일을 쓸 때도 결과가 아닌 행동 중심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도록 쓴다. '연재 초고'라고 쓰기보다 '연재글 시간관리편 초고 A4 2장 쓰기'라고 적으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감이 와서 손을 대기 쉬워진다. 한눈에 쓸모를 알 수 있는 물건처럼 말이다.

목표를 일이 잘 풀렸을 때와 아닐 때로 나눠서 세우면 호기심이 생긴다. 플랜A와 플랜B.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변수가 생겨도 조금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현실적인 기대를 갖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소한 것이라도 이룬 뒤에는 충분히 기념하고 축하할 필요가 있다. 중간 지점에서 스스로 작은 보상을 주는 것도 좋다. 뿌듯함이 클수록 마음은 자연히 다음 단계로 내킨다. 

나는 해낸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못 한 것은 질책하는 습관이 있어서, 앞만 보고 무뚝뚝하게 걸어나가는 자아의 등을 톡톡 건드려 알려준다. 어이, 글을 이만큼 써냈다니까? 그게 다야? 그리고 10초간 의식적으로 자아도취를 한다. 종착점만 바라보며 달렸는데 도착하자마자 다른 종착점을 보는 건 좀 슬픈 일이다.
     
내가 '읽개미'로 사는 법

나는 책 안 읽는 작가지망생이었다. 생업에 짓눌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백수가 된 후에도 읽는 즐거움보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집중해 있었다.

새해를 맞으며 세운 목표는 1년에 100권 읽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목표치를 달성하게 됐다. 도파민 추구 성향과 산만함을 이용한 덕분이다. 요령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참고가 되실지도 모르니 적어본다.

나는 동시에 15권 정도 되는 책을 돌려 읽는다. 질리면 언제든지 다른 책으로 바꿀 수 있게 여기저기 책을 쌓아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되 목적을 가지고 주력해서 읽을 책과 기분전환용으로 읽을 책을 구분한다. 보통은 글을 쓸 때 참고하는 책이 주력 도서가 된다. 한 권이라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이 없으면 의욕이 식을 수 있으니 주력하는 책은 대충이라도 끝까지 본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은 활동하며 읽을 수 있어 덜 지루한데, 종이책은 진도를 빼기 어렵다. 그래서 종이책에도 '목록 지우기' 방식을 적용한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면 목차를 보고 관심 가는 꼭지부터 골라 읽고, 읽은 꼭지는 목차에 표시한다.

이렇게 서너 개를 읽고 나면 나머지를 다 표시해 홀가분함을 느끼고 싶어진다. 이때부터는 전부 표시하는 것을 목표로 마저 하나씩 읽는다. 한 꼭지를 읽으면서도 몇 번이고 남은 분량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어서, 아예 해당 꼭지 끝에 책갈피를 끼워 놓고 남은 장수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 읽어나간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목차에서 관심 가는 꼭지를 골라 먼저 읽고 하나씩 '정복'하는 기분으로 의욕을 유지한다. 사진의 책은 <성인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
▲ 목록 지우기 방식으로 읽은 책 종이책을 읽을 때는 목차에서 관심 가는 꼭지를 골라 먼저 읽고 하나씩 "정복"하는 기분으로 의욕을 유지한다. 사진의 책은 <성인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
ⓒ 한국성인ADHD임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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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발밑에 마사지볼을 놓고 굴리거나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읽는다. 가만히 읽으려면 몸이 꼼지락거리고 딴 생각이 들지만, 아예 몸을 움직이면서 읽으면 집중이 잘 된다. 

성과를 시각화하기 위해 독서기록 앱과 SNS를 이용한다. 나는 '북적북적' 앱을 쓰는데 책 상태를 '읽은 책'으로 바꾸면 앱에 책 모양이 한 권 더 쌓이고, 캐릭터의 키도 자란다. 지금까지 읽은 책이 책장에 쌓인 것처럼 보여서 뿌듯하다. 책이 끝나갈 즈음이 되면 또 한 줄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설렌다.

월말에는 그 달의 책 목록과 소감을 SNS나 블로그에 간단히 올린다. 나 또 지난달만큼 했어요. 잘했죠? 자랑은 괜찮은 보상이다. 영화, 전시회 보기 등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한 달의 수고를 기념하기도 한다.   

사는 맛을 위한 기록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어느 전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하는 방식에서 나온 우스개지만, ADHD에게는 진리나 다름없는 표현 아닐까. ADHD는 좋은 친구일 때도 있지만, 내가 듣고 보는 것이 뇌로 들어오지 못하게 버티고 있는 심보 나쁜 문지기이고,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연결고리에 쉴새없이 톱질을 하는 빌런이기도 하니까.

원래 수업이나 회의에서 필기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는데, 같이 들은 내용도 나만 기억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 받아 적게 됐다. 업무 범위가 방대한 일을 하면서 없는 가제트팔까지 꺼내 쓸 때도 큰 사달이 없었던 건 순전히 기록 덕분이다.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는 일단 녹음 버튼을 누르는 게 습관이다. 실제로 녹음해둔 내용을 다시 확인해서 실수를 피해 가는 경우가 많다(실수로 녹음 버튼을 안 눌렀을 때는 불안해서 상황에 집중을 더 못한다는 부작용은 있다).

요즘은 회의나 병원 진료 때 '클로버노트' 앱을 켜둔다. 녹음 후 텍스트로 전사까지 해주니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현대 사회가 ADHD인이 살기 힘든 세상만은 아니다.

생활 속 모든 일이 숙제 같았다. 어떻게 하면 안 힘들게 살아볼까. 고민에도 끝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아 시도하고 결과를 지켜보는 과정이 흥미로운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망하고 있는 상태라면 나를 가지고 실험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성과주의에 갇혀서가 아니라 사는 맛을 위해서 계획하고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이라는 큰 게임에서 소소하게 스코어를 쌓고 한 단계씩 깨나가는 맛. 자기만의 속도로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는 한 인생이 재미있어질 여지는 있다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는 긴 글로 연재합니다.(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불렛저널 -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정리하며, 미래를 계획하라

라이더 캐롤 지음, 최성옥 옮김, 한빛비즈(2018)


태그:#성인ADHD, #도파민, #기록, #독서 기록,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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