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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관심사는 매출이 아니라 낭만이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낭만과 연계해서 추론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지론에 의하면, 낭만이 사라지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이 삭막해지고, 사람들의 가슴이 삭막해지기 때문에 세상이 황무지로 변하고, 세상이 황무지로 변하기 때문에 소망의 씨앗들이 말라죽는다. 한 페이지의 낭만이 사라지는 순간에 한 모금의 음악이 사라지고, 한 모금의 음악이 사라지는 순간에 한 아름의 사랑 또한 사라진다. - <장외인간> p.112
 
책 표지
▲ 장외인간 책 표지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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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한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흐른다. 지구라는 별에 잠시 동안 머무른 인간 모두가 언젠가는 앞을 다투어 세상을 떠나간다. 예외는 없다. 정해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두가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게 자연의 섭리다. 우주의 먼지 같은 생이지만 누군가에겐 더없이 소중한 삶,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소설가 이외수가 숨을 거둔 건 지난 25일의 일이다. 향년 75세, 존경받는 소설가의 마지막은 급작스럽지만 자연스러웠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작가로 <들개> <칼>과 같은 성공작을 여럿 남긴 그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첫 작가이자, '존버' '시간죽이기' 같은 신조어도 여럿 만들어낸 그에겐 늘 독특하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이외수의 정체성 한 가운데엔 역시 소설이 자리한다. 특히 두어 편의 장편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한 편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장외인간>을 선택할 것이다. 경력의 정점에 오른 중년의 작가가 내공을 한 데 모아 써내려간 기묘한 소설, 세태에 대한 비판부터 작가 자신의 세계관까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독특한 작품이 작가 이외수의 색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달이 사라진 세상, 달을 잊은 사람들

소설의 시작은 독특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서 달이 사라진다. 그저 사라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달이라는 천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구는 어떤 위성도 거느리지 않고, 밤하늘엔 그저 희뿌연 별들만 자리한다. 사람들은 월요일 대신 '인요일'을 살고 추석 같은 명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달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주인공 이헌수, 단 한 명뿐이다.

달이 사라진 세상은 메마르고 외로운 땅이다. 이태백과 이순신 장군의 시는 사라지고 베토벤의 소나타도 전혀 다른 무엇이 된다. 예술과 순수의 원천이 없어진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다. 달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정상이 되고 달을 기억하는 이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세상은 도무지 정상일 수 없는 것이다. 헌수의 동생조차 헌수에게 진지하게 정신병원 진료를 권한다. 독실한 개신교도인 누나 역시 헌수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한다.

소설은 헌수가 달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달과 달의 기억을 간직했을지 모를 이들을 찾아 헤매며 제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이 된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모두가 달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달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다. 한 번도 동대문에 가보지 않은 이에게 동대문에 문턱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가슴 속 낭만 한 줌 없다면

2019년 영화 <예스터데이>는 한순간 비틀즈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지구의 이야기를 다뤘다. 세상 사람 모두가 비틀즈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히 비틀즈의 음악도 세상에 나온 적이 없다. 비틀즈와 그의 음악을 기억하는 건 무명 뮤지션인 잭뿐이다. 잭은 비틀즈의 음악을 마치 제 것인 양 발표하며 명성을 얻는다.

<장외인간> 속 헌수는 <예스터데이>의 잭보다 한참이나 재수가 없다. 달에 대한 기억은 비틀즈의 음악처럼 소환해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헌수에게 남은 건 그저 그리움과 섭섭함, 그리고 답답함 같은 감정뿐이다. 결국 그는 제 발로 정신병원으로 향한다.

이외수는 달이 사라진 세상으로부터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실종된 현실을 고발한다. 저 하늘의 달과 가슴 속의 달맞이꽃들은 그에게 낭만이며 순수이고 도덕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책을 읽지 않는 대학생들과 육욕에 빠진 젊은이들, 물질만 추구하는 군상들의 모습이 달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세상과 마주 닿아 있다. 세상은 점차 각박해지고 마침내 낭만을 가진 이들을 정신병원으로 몰아넣는다.

달을 잃어버린 세상에 저항하는 건 시인과 시를 읽는 사람과 글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어쩌면 이것이 소설가 이외수가 끝까지 부여잡으려 했던 희망이며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장외인간 - 개정판

이외수 지음, 해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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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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