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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태릉cc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 1966년 태릉cc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1966년 태릉cc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 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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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가 '귀족 스포츠'가 된 사연

1960년대 말 한국에는 서울cc, 부산cc, 한양cc, 뉴코리아cc, 관악cc, 태릉cc, 안양cc 등 10여 개 골프장이 있었다. 골프 인구는 1960년대 초반 1000여 명에 불과하던 것이 1970년쯤에 가서 2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국내 골프 코스는 서울cc 군자리 골프장(1954년)과 부산cc 해운대 골프장(1956년)이 전부였다. 부산 해운대 골프장은 9홀 상태였고, 서울 군자리 골프장만이 유일한 18홀 코스였다(<골프저널>, 2021.1.19.).

점차 골프 인구의 증가와 '개발정책'의 일환으로 골프장 건설이 늘어나면서, 1964년 한양cc, 1966년 뉴코리아cc와 태릉cc(9홀), 1967년 관악cc, 1968년 안양cc, 1970년에 용인cc, 부평cc, 오산cc 등이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골프는 사치성향이 강한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로써 귀족 스포츠라고 여겨졌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1970년에 골프장을 출입한 연인원이 28만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매일경제>, 1970.12.19.). 골퍼 2만여 명을 기준하면, 월 1회 남짓 골프장을 출입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계에서도 골프 붐이 막 일어나 여성골퍼는 대략 100~200여 명으로 추산됐다.

"정작 필드까지 진출한 주부 골퍼는 아직 그렇게 많지 않다. 서울컨트리클럽 부녀회 간사인 김성희(핸디 18)의 말을 들으면, 핸디 30 이하를 포함한 여성 골퍼를 100명으로 추산하고, 라운드 골프를 한두 번쯤 해본 것까지 합치면 200명은 착실히 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략) 서울cc, 뉴코리아cc, 한양cc 등 부인회를 갖고 있는 클럽 외에도 각 클럽이 가입비 30만 원(남자 100만 원)으로 부인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경향신문>, 1970.7.27.)

골퍼들이 쓰는 비용이 워낙 커서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못낼 사치성 스포츠로 비치는 것은 당연했다. 1968년 기준해서 한양cc 골퍼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보자. 골프장 입회금이 50만 원이나 들고, 연회비 5000원, 주말에 회원 골퍼는 그린피 800원 ,캐디피 170원, 협회비 120원인데 비해 비회원 골퍼는 그린피를 2400원이나 부담해야만 했다(<조선일보>, 1968.2.20.).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1968년에 월평균 급여액은 광업 노동자 1만200원, 제조업 노동자 8100원이었다.

당시에 적게는 몇천 명 많아야 1~2만 명 밖에 안되는 골퍼들을 위한 10여 개 골프장의 부지는 200개 가까운 잔디 축구장을 만들고도 남는 땅이었다. 그때 기준 서울 시민 400만 명을 위한 장충체육관과 효창운동장이 체육시설의 전부인 것에 비해서 너무도 불균형하고 불공평한 상태 그 자체였다. 특권층의 전유물인 골프장에 대해 비아냥거릴 때면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 국영기업체 간부 그리고 재벌들이 서로 어울려서 들락거리면서 권력의 재분배가 거래되는 장소쯤으로 여겼다.

1960년대 골프 찬반시비가 붙을 때면, 국내에 자기 돈으로 공을 칠 수 있는 골퍼의 소득을 월 50만 원 정도의 고소득자들로 생각했다고 한다. 연소득으로 계산하면 600만 원 정도인데, 과세대상으로 하면 종합소득세 대상자(연소득 500만 원 이상)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종합소득세라면 1967년 세제개혁 때 다시 신설된 제도로써 개인에게 발생하는 모든 소득을 종합해 단일과세하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고소득층에게 무겁게 하고 저소득층에게 가볍게 하는 '공평과세의 원칙'을 살린 제도라고 대서특필했는데 1969년부터 시행됐다. 당시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자는 1968년 연소득 500만 원이 넘는 사람으로 총 4079명이었다(<매일경제>, 1969.5.8.). 결국, 잘해야 4000여 명 정도만이 자기 돈으로 공을 칠 수 있는 골퍼였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 때만 하더라도 골프는 일부 특권계층만이 즐기는 유희로써 소위 귀족골프라고 칭할만하다. 지금처럼 대중제 골프장도 없었고, 서울 시내에 초보자 골퍼들을 위한 20여 개 인도어(indoor) 골프 연습장들이 성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성동구 성수동 서울경마장 내에 위치했던 덕마골프구락부가 유일한 일종의 파3 대중제 연습장이었다(G,Economy, 2020.8.18.).
  
정치 무대로써 골프장

1960년대 한국골프의 특징 가운데 정치인들의 공개된 활동공간으로써 골프장의 역할을 들 수 있다. 1966년 7월 2일 <동아일보>를 보면, 당시 서울cc 군자리 골프장에서 정일권 국무총리가 직접 골프대회를 주최했는데, '경찰의 테러범 조작사건에 따른 국회에서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발의와 반공법 시비 등 잇단 야당공세로 긴장됐던 신경을 풀기 위한' 이벤트였다.

골프대회에는 행정부, 입법부, 군부 안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군 출신 주요 인사들을 총망라해서 대통령 박정희(대장 예편), 국무총리 정일권(대장 예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준장 예편), 청와대비서실장 이후락(소장 예편), 공화당의장 김종필(준장 예편) 등 80여 명이 참가했다.

"한때 이박사(이승만 - 필자 주)가 정동교회에 드나들게 되니까 주일마다 고관대작 사이비급 조신자(造信者)들이 그곳으로 몰려와 그곳 교직자가 진땀을 뺀 일이 있었다. 교회가 정치하고 사교하는 곳인 줄 아느냐고 교인들의 불평이 대단했었다. 이제 교회가 골프장으로 바뀌어졌다. 모모 높은 분이 어느 골프장에 나타날 것 같다는 소문만 나도 그 골프장은 만원사례. 정원초과의 방을 내다 붙여야될 판이다. 정치, 이권, 인사가 그곳에서 요리된다."(<경향신문>, 1968.1.25.)

정치인들이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부 때 서울시내 성동구 능동에 개장한 서울cc 군자리 골프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4대 국회에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신축하려 했던 관계로 '남산구락부'라는 국회의원 골프 친목단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정치인들의 골프 대중화가 뚜렷했다. 1965년 8월 국회내 또다른 골프구락부가 발족했다. '3.6구락부'는 제3공화국의 제6대 국회라는 의미를 두는 국회의원들의 골프 친목단체로 결성됐고, 회장에 이동녕의원(공화당) 부회장에는 구태회(공화당) 의원과 함덕용(민중당) 의원을 뽑았다. 골프장이 국회의원들의 주요 정치무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각도의 도정 시찰하던 중 제주도 시찰을 위해 1966년 4월 18일 제주에 도착에 했다. 도정 시찰 뒤 박정희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마치자 제주컨트리클럽으로 달려가서 평소 자주 라운드하던 국회의원 김성곤, 이병옥, 구태회, 현오봉 등과 18홀을 돌았다.

대통령의 골프 라운드 동향조차도 일간지 <경향신문> 1966년 4월 20일자에 '박정희 대통령이 라운드 도중에 이 골프장에 고용될 인원이 약 300명 가량 된다는 데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는 내용으로 기사화될 정도였다. 같은 해 9월 말에는 지금에 한양cc 구코스(경기도 고양시 위치)에서 대통령이 직접 참가한 '박대통령배쟁탈정부여당친선골프대회'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뭐 이 정도면, 귀족골프를 너머 골프정치의 시발점이라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 말쯤 국회의원들 사이에는 골프열이 선풍적이었다. 골프를 못하는 국회의원들은 '마작이나 골프를 할줄 모르면 정치하는 측에 낄 도리가 없더라'고 푸념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7대 국회는 '골프국회'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국회에는 '6.7구락부'와 '1.9구락부' 2개 골프 동호회가 있었다. 국회의원 172명 중 골퍼는 절반 이상이 됐는데, 공화당은 112명 중 69명, 신민당은 45명 중 17명 등 이었다.(<동아일보>, 1968.6.22.)

정가에서 지속적으로 말썽을 빚어온 골프 열풍 문제가 국회내 '코스모스골프구락부 결성사건'을 계기로 또다른 파문을 던졌다.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행정부 고위공무원들이 업자들을 끼고 골프구락부를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

<동아일보> 1968년 6월 19일자에 보면, '코스모스골프구락부'는 국회 교통체신분과위원회(위원장 정진동)에서 '친목을 도모하고 골프기술 및 체위 향상을 위한다'는 구실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회원은 교통체신분과위원 전원과 교통부 및 체신부의 이사관급 이상 공무원, 그 산하관리기업체의 임원이상 직원과 관계기업체의 장을 참가 범위로 삼았다. '코스모스골프구락부'는 1968년 6월 16일 서울시내 뉴코리아 호텔에서 첫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이동녕 의원을 회장으로 교통부 육운국장 민영환을 간사로 선출했고, 회원들은 매월 1회씩 골프경기를 갖고 가입비와 월회비 등을 납부하는 회칙도 정했다. '코스모스골프구락부 결성사건'을 들여다보면, 지금도 끊이지 않는 소위 '골프접대'라는 사회문제의 그 맹아를 유추해볼 만도 하다.

국회와 정부의 골프 바람에 대해서 정가 내에 비판도 적지 않았다. 국회내 군소정당이던 한독당에서는 '외교상 필요한 골프장 1곳만을 제외한 나머지를 즉각 폐쇄(단 국민소득 1000달러 이상이 됐을 때 해제)시키고, 골프귀족만을 위한 골프장 부지를 농토나 주택용지로 전환시키자는 소위 '골프장의 생산화 투쟁 선언문'을 공표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68.11.20.)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골프만큼 사회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귀족 스포츠로 자리매김했고, '요정정치' 보다 '골프정치'가 낫다고 할 만큼 골프장은 정치의 무대가 돼 버린 불공정과 불평등의 시대를 맞게 됐다.

태그:#귀족 골프, #골프 정치, #골프 접대, #박정희, #서울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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