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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대학 경영대학원 석좌교수 로버트 프랭크는 '인생에서 사소해 보이는 우연한 사건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제의식을 담은 칼럼을 <뉴욕타임즈>에 발표했다. 발표되자마자 그의 칼럼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인기, 아니 비난과 반발에 부딪혔다. 자신의 성공을 전적으로 재능과 노력의 결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프랭크의 칼럼에 쏟아낸 강한 비판과 격한 반론은 칼럼의 저자 프랭크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프랭크는 칼럼 게재 이후 한 텔레비전 방송 뉴스쇼에 초대받았다. 칼럼에 대한 반응이 주로 비판적 반론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낙관주의자였던 프랭크는 오히려 이번 기회에 성공과 행운의 상관관계를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리라 낙관적으로 예측하며 출연을 결정했다. 

그러나 프랭크의 낙관적 예측은 들어맞지 않았다. 프랭크는 인생에서 발견되는 성공과 행운의 연관성에 관한 실질적·현상적 설명을 거듭 시도했지만, 자수성가형 사회자의 질문과 반론을 10분 동안 들어넘겨야만 했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사회자의 분노 어린 반문이 프랭크가 자신의 <뉴욕타임즈> 칼럼을 발전시켜 펴낸 책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원제: 성공과 행운) 1장에 실려있다.  
 
"저기, 잠시만요. 교수님 칼럼을 읽었을 때 제가 얼마나 모욕을 느꼈는지 아십니까? 저는 35년 전에 가진 거 하나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위험을 끊임없이 감수한 덕분에 이 땅에서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것이 단지 행운 덕분이라고 <뉴욕타임즈>에 쓰신 겁니까? (…) 제가 그동안 어떤 어려움을 헤치고 이 자리에 왔는지, 교수님이 아십니까?" (27-28쪽)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책 표지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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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성공에는 그 개인이 예기치도 않았고 계획한 적도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던 행운이라는 (혹은 불운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있다는 프랭크의 논리는, 말 그대로 인간 현실에 대한 지극히 사실주의적 묘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실제로 운(행운/불운)이라는 요소는 모든 인간의 라이프스토리에서 공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프랭크는 이 책을 통해 여러 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 사례들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좀 비극적 사례를 한 가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열 번째 비행(1986년 1월 28일)에는 실력과 노력이 출중한 일곱 명 우주인이 엄격한 선별 과정을 통해 선정되었다. 이때 특별히 일반인 지원자 가운데 1명을 우주인으로 선발했는데, 최종 선발된 여성 교사는 챌린저호에 탑승할 만한 실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선발 과정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의 노력을 투여한 사람이었다. 

선발 과정과 훈련 과정은 각 단계마다 만만치 않았다. 그 단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그 여성은 그야말로 기립 박수를 받아 마땅한 성공의 모범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우주여행을 할 다른 우주인들도 실력과 노력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훌륭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챌린저호는 발사 후 75초도 되지 않아 폭발했고 산산조각이 났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당시 직접적 사고 원인으로 확인된 고무 부품(O-ring)이 '만약' 45초를 더 지탱해주었더라면 그런 폭발은 혹시 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행운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인간은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한다'는 게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인생이 꼭 그렇게만 흘러가는 게 아니란 것도 사실인 것이다. 

인간의 일에는 자기자신의 내부요인 외에 외부요인들이 항상 끼어든다. 끼어들 수밖에 없다. 내 인생에 외부요인들이 언제 어느 만큼 얼마나 충격적으로 끼어들지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와서 부딪힌 미지의 요인에 관한 한, 그것이 행운과 불운 중 어느 쪽일지 얼른 깨닫지 못하며, 만약 행운일 경우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일지 반대로 불운이라면 또 얼마나 큰 불운일지 신속히 판단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어떤 현상이 자신에게 불운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행운으로 돌변하더니, 행운인 줄 알았는데 금세 불운으로 둔갑하는 기묘한 현상을 겪게도 된다. 새옹지마(塞翁之馬)처럼 말이다. 그런데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프랭크도 지적했듯, 행운과 불운의 최초 발생 시점은 다름이 아니라 '출생'이다.  
 
만약 여러분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사회가 좋은 것이라는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개인의 행운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가장 중요한 행운은 바로 고도로 발전한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재능있고 야심으로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다면 물질적 성공이란 그림의 떡일 확률이 높다. (153쪽)
 
여기서 프랭크는 다만 금수저—흙수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프랭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지금 우리의 사회를 보다 너그럽고 유연한 사회로 변화시켜가자 주장한다. 이를 위해 사유재산의 적극적 재분배(과세정책 실시 등)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책 뒷부분에서 그가 예시하는 여러 행동경제 모의실험들은 국가가 주도하기에 적합한 '사유재산 재분배(소득별 과세부과 등)'가 부자들의 무조건적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을 명쾌하게 입증하는 사례들이기도 하다.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를 다 읽고 나니, 프랭크가 강조하는 행운이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주는 신비로운 은혜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처절한 운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운에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여러 행운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크게 둘로 묶인다. 완전히 불가항력적 운명 같은 (인간이 도무지 그 인과관계를 알아낼 수 없는) 행운이 있는 한편, 내적인 필연성이 내포돼있는 (일어날 법한 일이라서 일어난 것이라는 의미의) 행운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의 행운을 부연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어느날 밭에 나가 일을 열심히 하다 커다란 금괴를 발견했다. 그 사람이 뜻하지 않게 금괴를 발견한 건 행운이다. 그런데 그 행운은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거기에 금괴를 묻었다는 사건이 필연적으로 있었기에 발생한 행운이다. 

프랭크가 이야기하는 행운은 두 번째 의미의 행운에 가깝다. 비유컨대 더 많은 이들이 금괴를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 곳곳에 금괴를 묻어두자는 주장인 까닭이다. 바꿔말하면, 사회구성원들이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선 굳이 일일이 계산하지는 않았겠지만 본인에게 다가와 본인이 겪게 된 행운에 대하여 서로 서로 감사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적으로 작동하는 큰 의미의 행운을 사회의 밑바닥에 풍부하게 깔아두자는 것!

한 사회가 그런 의미의 행운 가득한 사회로 전진하려면 '내 성공이 오로지 내 실력과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구성원들이 많아져 마침내 각자의 성공에 대한 보상을 자발적으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현실감각이 생겨야 한다는 게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를 꿰뚫는 프랭크의 지론이다(233쪽). 

이 같은 그의 지론에 뭐랄까 은근한 저항감이 올라온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반론을 제기하기 위한 야심찬 독서라면 더 좋다. 문장마다 문단마다 반론을 제기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겠다. 다 읽은 후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는 그야말로 운(행운? 불운?)에 맡기고.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행운, 그리고 실력주의라는 신화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정태영 옮김, 글항아리(2018)


태그:#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행운, #로버트 프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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