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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성수동 오매갤러리에서 열리는 <자수살롱>展은 조금 특별한 전시다. 2019년 <자수신세계>展으로 <자수공간> <자수잔치> 그리고 외전격인 <안녕! 바다 씨!>까지 네 번에 걸쳐 꾸준히 변화하고 성장해 현재 2021년 <자수살롱>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살롱에 참여한 열 명의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기자말]
밥상 지어 산자를 먹이고, 제사상 조상께 올리다 이제 나의 단청을 짓는다.
▲ 2021 자수살롱. 작품 단청 옆의 정은숙 작가 밥상 지어 산자를 먹이고, 제사상 조상께 올리다 이제 나의 단청을 짓는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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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작가는 늦깎이 작가다. 지난해 2020년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트에서 열린 <자수공간>에서 첫 전시를 했다. 사실 그런 일은 우리 일상에는 흔한 일이다. 영화감독들도 중견 데뷔를 해 늦은 입봉식을 치르기도 하니까.

그리고 흔한 일이 흔하게 일어나듯, 은숙의 작품 활동에 '단절'이 생긴 이유는 결혼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내 그림을 그리며 상을 타고, 중고교때는 미술 선생님이 붙잡아 미술실에서 살다가, 예술대학에서 전문적 훈련을 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부모님과 사회가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맏딸로서 한 가문의 며느리가 되는 일이었다. 

   
다정했던 사람들과 그 산들의 선


"저는 성주서 나고 자랐어요. 아버지는 우리를 자유롭게 키웠죠. 저희 집은 고택이었어요. 거기서 매달 제사가 있고, 가족 친지들이 모여 명절마다 차례를 지냈죠. 그래도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대구에 효성여대 공예과에서 도예를 공부할 수 있던 것도 아버지 지지로 가능했던 거였으니까. 너무 잘 맞았어요. 밤샘 작업도 하고, 공모전에도 나가고. 그런데 도자 작업은 큰 작업이라 작업할 공간이 없었어요. 그때 사랑하는 아버지가 영주의 400년 역사를 가진 종가 종택의 맏며느리가 되길 제게 바랐죠. 그걸 따랐고요. 신랑이 도자기 가마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남편은 도시로 일 가고, 저는 집에 갇혔죠."

제사는 1년에 열한 번이었다. 설과 명절 차례가 두 번씩, 갈라졌던 모든 형제들이 모여 가문이 함께 제사를 드리는 시제가 한 번. 묘는 스물일곱 기. 여기저기 산에 흩어져 있었다. 7남매의 맏이가 남편이었으니, 몸에서 대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으니, 도저히 여기서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래요!' 하고 울었을 때, 아버지도 '그래라!'고 허락했다. '슈퍼마켓이라도 열어주마!' 그게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확인했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온 딸은 아버지에게 누가 될 것이 아닌가. 


"집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영주 기차역까지 간 적이 있어요. 차라리 그게 나은 것 같아. 시아버지도 좋은 분이지만, 내가 살아야니까. 근데 기차역서 자꾸 뭐가 눈에 밟히는 거였어요. 사람들. 제가 시집 가고 한 달을 한복을 입고 지냈어요. 종가 새 종부가 왔다고 온마을 친지분들이 돌아가면서 밥상을 차리고 절 초대했어요.

새색시라고 한복을 입었는데, 논둑에서 흙묻을까 뒤에서 받쳐주는 분들이셨죠. 커피가 귀한 거라고 사발로 담아서 주고. 그 사람들이 자꾸만 떠올라요. 그리고 또 하나. 묘를 찾아 살피고 벌초도 다니느라고 산을 오르고 헤멜 때 멀리 봤던 그 산들의 실루엣이 마음에 자꾸 떠올라요. 길가서 보았던 도라지꽃도…. 버릴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데, 결국 기차는 타지를 못했어요."

   
코로나가 열어준 작은 틈새 사이로

2019년에 처음 발병해 코로나 바이러스 2019(코비드19)가 된 대역병은 2020년에 펜데믹으로 맹위를 떨쳤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재앙처럼 다가왔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반전으로 작동했다. 정은숙 작가에겐 후자였다. '제사에 오지 말아라!' '명절에도 모일 필요가 없다!' 400년 종택에서는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 둘이 지원을 해줬어요. 딸이 학원비를 대주겠다고 하고. 친구들도 약속을 잡을 때 내 시간을 맞춰줘요. 내가 이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한다는 걸 아니까. 남편도, 아직 약속을 지키진 못했는데, 모든 걸 자기 위주로 하는 사람이, 내 시간을 물어봐요. 제가 여행 계획을 잡죠. 그렇게 내게 맞춰주는 게 좋았어요."

2020년 9월 <자수공간> 전시에 연결된 것은 아들이 도와줘 문을 열었던 인스타그램 덕분이었다. 기획자 오매갤러리의 김이숙 대표는 두루두루 자수 작가들을 검색하고, 직접 연락을 했다. 세탁기가 여성의 삶을 '개선'한 산업혁명 시대의 발명품이었다면, 인스타그램은 정보산업 혁명시대 여성의 삶을 바꾼 발명품이었다. 작가 정우원이 기획을 맡았던 이 전시의 요구는 단순한 것이었다.

"기예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붉은 실과 검은 실만 사용하고, 천 한 장만 드립니다." 

밥상과 제사상과 그리고 단청
 
정은숙_단청연화_옥사_130x47cm_2021
▲ 단청은 고결한 정신 문화의 표현이기도 하다. 예술이 그러하다 정은숙_단청연화_옥사_130x47cm_2021
ⓒ 정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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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솔직하게 밥하고 사랑 전달하는 일밖에 안 했다. 뭐를 보고 감동받은 것도 없고, 제가 할 수 있었던 거 아는 거는, 밥상이 제일 편하더라고요. 온 가족에게 제 사랑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입니다. 그래 밥상을 했고요. 그 다음 나를 좀더 표현하고 싶더라고요. 제사상 차릴 때 애환이 있잖아요. 힘들고 긴 시간. 왜 내가 여기서 이걸 하나? 울분도 차있고. 잘 보이고 싶다, 예쁘게 보이고 싶다 이런 거보다 있는 그대로 해보자."

2020년 12월 코엑스에서 열린 공예트렌드페어에서는 정은숙 작가는 제사상을 자수로 지어 올렸다. 어쩌면 이 두 개의 '밥상' 작품은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 때문에 매였던 생활 세계의 운명을 직면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은숙은 이제 점차로 넓은 곳으로 가고, 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사람과 만났다. 그리고 오매갤러리의 다른 작가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도 함께 했다. 환경재단과 MBC가 주최한 '노 모어 플라스틱전' <안녕! 바다 씨!> 전시였다. 그리고 여기 <자수살롱>까지.

기차역에서 생각났던 건 다정한 사람들과 산길의 선들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은숙의 머리에 점차 떠오른 것은 단청이었다. 어릴 적 마을에서 눈에 띄게 보였던 사당의 태극무늬, 엄마와 함께 갔던 절 대웅전에 그려졌던 그 붉고 푸른 집의 옷! 자수로 그걸 지어 집과 생활 곳곳에 들이고 싶었다. 옥사와 실크를 쓰고 현대적 미감에 어울리도록 추상적 형태로 단순화했다.


"단청은 고택에도 쓰고 절과 궁궐에도 썼어요. 궁에는 국왕의 권위를 나타냈고, 정자 사당 사원에는 군자의 기품과 도리를 상징하는 거였죠. 수복강녕을 빌고 벽사의 의미를 가져요. 상서로운 그림이죠. 그 뜻이 사실 제가 해왔던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어요. 돌아보면서 제게 자꾸 말하게 되죠. '잘했다, 잘하고 왔구나.' 마음에만 담고 있더랬지 할 여유가 없던 걸 하니까 감사하고. 더 잘할 자신감도 있고. 나도 가족도 친구도 다 잘 됐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려요. 그 사랑을 이제 작품에 쏟아내야죠. 사랑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정은숙_단청연화_옥사_130x47cm_2021
▲ 전시장에 설치된 단청 자수 정은숙_단청연화_옥사_130x47cm_2021
ⓒ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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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은숙, #오매갤러리, #자수살롱, #연화단청자수, #2021 공예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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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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