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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화장 안 할 거야!"

나는 작년 여름 복직을 앞두고 굳게 마음 먹었다. 매일 화장하고 지우는 모든 과정이 너무 귀찮았다. 아침 시간이 몹시 분주한 것도 한몫했다. 나는 두 아이 아침밥을 차리고 먹이고 등원시킨 뒤 출근한다.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 화장까지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퇴근한 나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비비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엄마 화장 지워야 해. 잠깐만 기다려봐"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빠르게 비누만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아이들을 바로 안아주고 싶었다. 게다가 사무실에서는 내내 마스크를 써야 한다. 눈 밑으로는 마스크에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니, 더 결심이 굳어졌다.

복직 후 첫 출근. 거의 다 초면이라 그런지, 아무도 내가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 말고 화장을 안 한 여자 직원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약한 파마기가 있는 긴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녔다.

기본값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피곤하고 초췌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의 화장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무의식적으로 화장한 상태를 상상했던 것이다. 마치 휴대전화 어플에서 자동으로 필터를 씌우듯 내 의식의 흐름이 자연스러웠던 것에 매우 놀랐다. 

반면, 남자 직원들 얼굴에 화장 필터를 씌우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화장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성의 화장한 얼굴을 '정상' 또는 '자연스러움'으로 여겼다. 내 안에 자리한 여성과 남성의 얼굴 기본값이 달랐던 것이다. 책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은 이러한 바로 이 같은 '기본값'에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 남성들이 출근하기 위해 갖추던 기본값, 즉 '사람 꼴'이 자신이 여태까지 갖추던 그것과는 무척 달랐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여성은 '사람 꼴'을 갖추기까지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 기본값에 직접 다가가야 하는 반면, 남성에게는 '사람 꼴'이 이미 찾아와 있었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p.42)
 
탈코르셋 책 표지
 탈코르셋 책 표지
ⓒ 한겨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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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은 화장이나 성형수술 뿐 아니라 긴 머리와 짧은 치마 등 '사회적 여성성'을 부정하는 운동이다.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정한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이래야 한다'라는 기준을 거부한다. 2018년부터 SNS를 중심으로 '#탈코르셋_인증'이라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여성에게 부여된 기본값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남성과 달리, 대부분의 여성은 화장과 같은 꾸밈 노동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여성들은 화장품 매장에 가거나 인터넷 쇼핑몰을 찾고, 돈을 들여 화장품을 구매하고, 매일 화장품을 고르고 바르고 지우는 일을 반복한다. 그만큼 비용과 시간이 들며, 화장하기 전에는 외출하지 못하거나 '민낯'이라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녹색건강연대의 2016년 자료(<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p.378)에 따르면, 여학생 중 초등학생은 42.7%(483명/1131명), 중학생은 73.8%(908명/1231명), 고등학생은 76.1%(552명/725명)가 색조 화장을 한다고 답했다. 나처럼 고등학교까지 화장하지 않고 자라온 세대도, 대학생부터는 거의 다 화장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여성에게 화장품을 아예 바르지 않고 회사에 가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꾸미지 않을 선택의 자유를 위해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을 자유'를 온전히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이 화장해야 아름답다는 생각을 심어놓은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머리를 짧게 깎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여성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기본값 '화장한 얼굴'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

나아가 '여성이 왜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한국 사회는 이미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을 정해놓았다. 긴 머리에 하얀 피부와 큰 눈, 호리병 같은 몸매에 가늘고 늘씬한 다리. 많은 여성이 이러한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다이어트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육아휴직 이전에는 언제나 화장하고 밖에 나갔다. 항상 피부를 보정할 수 있는 크림과 틴트를 발라야 마음이 놓였다. 피곤해도 화장품을 발라 덜 피곤해 보여야 할 것 같았다. 화장을 안 하고 외출하면 왠지 옷을 벗고 나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점심 식사 이후 매번 화장을 고치는 게 귀찮았고, 여름에 땀과 함께 화장이 흘러내리는 것도 불편했다.

구두는 적어도 4센티의 굽을 고수했다. 운동화나 단화를 신으면 내 다리가 너무 짧아 보였다. 4센티 정도는 굽이 있어야 그나마 날씬해 보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굽이 있으면 발목이 많이 아팠고 쉽게 지쳤다. 구두를 신으면 운동화를 신었을 때보다 두 배 이상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화장을 할지 구두를 신을지를 모두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결정했다. 다른 사람들이 초췌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한테 날씬해 보이고 싶어서. 타인의 평가 기준은 사회가 정한 '아름다운 여성의 기본값'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만의 기본값을 찾아서

회사에 화장을 안 하고 다닌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점심 먹고 양치할 때 화장을 고치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 구두도 밑창이 운동화처럼 생긴 기능성 신발로 바꿨다. 운전할 때 굽이 걸리적거리지 않아 좋고, 뛰고 싶을 때 발목에 부담 없이 달릴 수 있어 편하다. 이제 남들의 시선보다 내 몸이 편하다고 말하는 쪽에 귀를 기울인다.

머리 모양을 바꾼지도 6개월이 지났다. 당시 짧은 단발로 할까 고민하다 숏컷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화장한 얼굴과 굽이 있는 구두'에서 내 몸이 끌리는 방향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으니, 머리 모양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사회가 정한 '아름다운 여성의 기본값'을 달성하려고 애쓰지 않으련다. 대신 내 몸에 편하고, 내 마음에 드는 나만의 기본값을 찾아가고 있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이민경 (지은이), 한겨레출판(2019)


태그:#이민경, #탈코르셋, #숏컷, #서평,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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