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 동학의 창시자와 계승자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사상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다. 동학은 세계사상적으로 가장 인간주의적 철학이다.
ⓒ 이병길

관련사진보기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하다. 하늘의 섭리라고나 할까, 시국이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해지면 인물이 나타난다. 난세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평세의 인물도 있다. 최시형이 태어난 1827년(순조 27년)은 조선왕조의 해체기에 속한다.

영ㆍ정조의 부흥기가 지나고 순조가 집권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부패무능한 조선왕조는 민란과 폭동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835년 헌종의 즉위와 함께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로 국정은 더욱 문란해지고 세상은 날로 어지러워졌다.

각지에서 민란과 폭동이 그치지 않고 러시아 선박에 이어 연안에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린 서양의 군함과 상선이 출몰하고, 천주교도 수백 명이 체포되는 등 국정은 날이 갈수록 소연해졌다. 흉년이 거듭된 데다 각종 괴질까지 창궐하면서 백성들은 불안과 위기감에 내몰렸다. 천주교가 들어와 기층민중 사이에 널리 전파되고 신도들이 늘었지만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으로 전통적 의례와 상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관의 탄압이 심하여 지하로 잠복하였다.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소수 지배계급의 국정농단과 적폐로 인해 내적 붕괴과정이 빨라지고, 양반과 유생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빠져 있었다. 서세동점에 따라 외세의 침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수운 최제우 선생 동상이다.
▲ 수운 최제우 동상 수운 최제우 선생 동상이다.
ⓒ 김환대

관련사진보기

 
이런 시기에 수운 최제우(1824~1864)가 전통 유학에 도전하고, 서세에 대응하여 유교ㆍ불교ㆍ도교와 종래의 무속신앙 여기에 자신의 인내천을 융합하여 민족고유의 사상ㆍ철학ㆍ종교인 동학을 창도하여  민중을 깨우치며, 민족적인 자아 회복과 주체성 정립에 나서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고 주창하면서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역대 왕조와 지배층이 '민본(民本)'을 내세우면서도 백성을 짜먹기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시대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하늘이 놀랄 발언이었다. 다음과 같은 수운의 토로에서 당대의 정황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惡疾)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상해(傷害)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脣亡之歎)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주석 1)
 
동학의 교조 최제우의 포교 가사집 <용담유사>.
 동학의 교조 최제우의 포교 가사집 <용담유사>.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여기서 말하는 '악질'은 각종 전염병은 물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가져온 정치사회적인 질환과 서양세력의 침략 등을 포함한다. 임진ㆍ병자 양란을 겪고 거듭되는 세도정치로 낡고 병든 봉건질서가 기울고 사회적 혼란상이 일고 있던 시기에 최시형은 태어났다. 
    
최시형은 1827년 3월 21일(양 4월 16일)에 외가인 경주 동촌 황오리(현 황오동 229번지)에서 아버지 최종수(崔宗秀, 1804년 6월 22일~1841년 10월 15일)와 어머니 월성 배씨(?~1832년 4월 22일) 사이에 출생하였다. 

해월은 신라 말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의 30대손이며, 중시조인 여말의 충신 관가정(觀稼亭)의 16대손이다. 또 그의 8대조는 조선조 선조대(宣祖代)의 당상관인 통정대부, 예조참의를 지낸 최무민(崔武敏)이었으며  5대조까지 연이어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낸 경주의 명문가이었다.

특히 해월의 증조부 최계동(崔啓東)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몇 차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남인 출신인 관계로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원래 계동은 도학과 명리학에 밝아서 경주의 산천을 벗삼아 고적과 역사, 풍수지리 연구를 하면서 산림처사로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다. (주석 2)

최계동은 슬하에 5형제를 두었는데 그의 아들 규인(奎仁)이 최시형의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종수(宗秀)ㆍ한수(漢秀) 두 아들을 두고 35세에 세상을 뜨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해월의 아버지 종수는 곤궁해진 생활고 속에서도 그의 첫 아들이자 최씨가문의 종손인 해월에게 가문의 법도와 조상들의 훌륭한 내력을 가르쳤다. 한편 해월을 증조부 계동의 학문을 이어 갈 선비로 키우기 위해 김계사(金桂史) 등과 함께 늦은 나이인 10세 때, 경주의 서쪽 선도산 밑에 자리잡은 서악서원에서 학문에 입문케 했다. 

김계사는 해월보다 5살 아래로 경주지역의 명문장이며 김범부의 스승이기도 하다. 김범부는 네 살부터 열세 살까지 김계사 선생에게서 한문칠서 등을 수학하였다고 한다. 김범부는 김계사에게서 해월과 수운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주석 3)

어릴 적의 이름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인데 뒷날 시형(時亨)으로 개명하였다. 해월(海月)이란 호는 언제부터 사용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는데,「해월 최시형의 약력」에는 "1863년(37세) 7월 23일에 수운 최제우로부터 해월당(海月堂)의 도호를 받고 북접주인으로 임명. 같은 해 8월 14일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전수."(주석 4) 라 하였다.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영일정씨(鄭氏) 슬하에서 자라다 1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계모가 떠나가고 누이동생과 함께 먼 친척집에서 성장한다. 유년기는 영일군 신광면 터일(현 기일동)에서 보냈다.   

조실부모한 최시형은 역경 속에서도 건장하게 자라서 17세에 옹금당 마을에서 한지를 만드는 조지소(造紙所)의 일을 했다. 여기서 기술을 배우며 인근 지역 거래처에 한지를 날라다 주는 등의 일을 하면서 2년간 살았다. 이 시기 그는 세상 물정을 터득하고, 19세에 흥해의 밀양손씨(?~1889년 10월 11일)와 결혼하여 터일마을 안쪽의 음금당 마을과 흥해의 마복동에서 살았다. 

해월의 누이동생은 마북동 조지공장에 있을 때 경주 서촌의 종숙부 소개로 임익서(林益瑞)에게  출가시켰다. 이 임익서는 해월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수운의 지도를 받았고 후일 수운이 대구 장대에서 순교했을 때 해월을 대신하여 그의 시신을 경주 용담정까지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바 있는, 초창기 동학조직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주석 5)

해월이 여기서 여섯해를 사는 동안에 그곳 지방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집강(執綱)으로 뽑혔다. 오늘날의 면장이나 이장에 해당하는 집강으로 천거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그의 공명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먼 일가에 한 몸을 의지하고 살아야 했던 그가 이제 떳떳하게 마북이라는 한 마을을 대표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스승의 가르침이나 가정교육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자랐다. 그러나 남달리 튼튼한 몸에 부지런하고 마음씨마저 착하고 어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과 믿음을 받을 수 있었다. (주석 6)


주석
1>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 
2> 최정간, 『해월 최시형가의 사람들』, 41쪽, 웅진출판, 1994.
3> 앞의 책, 44쪽.
4> 부산예술문화대학 동학연구소 엮음,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296쪽, 예문서원, 1999.
5> 최정간, 앞의 책, 51쪽.
6> 이세권 편저, 『동학사상』, 94쪽, 경인문화사, 198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월, #최시형 , #최시형평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