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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가 남긴 두가지 정치적 유산

유신독재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관료권력기구'이다. 정당들은 이념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명사 중심의 지역 정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권력기관을 장악한 관료집단은 더욱 공고하게 이익집단화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유신잔재의 청산이란, 단순한 과거사 정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나라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건강한 토대 위에 바로 세우기 위한 긴급하고 현실적인 과제라고 할 것이다.

유신체제는 근대헌법의 가치를 부정한 불법국가

소위 유신헌법은 그 제정 과정이 불법이었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 선포, 기존 헌법의 효력정지, 국회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과 찬반토론을 금지한 가운데 국민투표 부의 등 유신헌법을 제정한 일련의 과정은 헌정질서를 파괴한 군사쿠데타였다.

근대헌법은 국민주권주의와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 대의제와 권력분립 등을 핵심적 가치로 삼는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대의제를 형해화시켰으며,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국가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켰고, 국회나 법원의 통제를 받지 않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함으로써, 독재자는 언제든지 헌법과 기타 법률에 우선하는 긴급조치를 발령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모든 국가기구를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 1인을 위하여 복무하는 통치기구로 변질시켰다. 정당과 관료권력기구들은 독재자에게 복무하는 댓가로 대의제 원리에 따른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직무상 권한을 남용하더라도 감시를 받지 않는 등,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허울뿐인 대의제에 안주하며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는 정당들

유신헌법은 대통령 선거를 폐지하였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지명하여 사실상 국회를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고위 법관들 역시 대통령이 임면하도록 하였다.

물론 국회의원 정수의 2/3는 국민들이 선출하도록 하여 대의제의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소선거구-단수투표제로 '명사 중심의 지역정당'만 존립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정당 결성의 문턱을 과도하게 높이고, 국회의원 수 내지 득표율만을 기준으로 정당보조금을 배분하는 등 독과점적 지역당 구도를 고착화시켰다.

이러한 독과점적 지역당 구도는 대통령직선제를 회복한 87년 헌법 제정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기득권 거대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 때문에 신생 정당의 존립 기반은 매우 협소하며, 거대정당들 역시 패거리 정치로 신진 세력의 등장을 철저히 배제한다.

법치를 가장하여 국가폭력을 자행한 유신통치기구

유신독재 정권은 수시로 군을 동원하고, 정보기관을 앞세워 정치공작을 일삼았지만, 법보다 주먹이 앞섰던 이승만 독재 시기와는 달리 법치주의를 강조하였다. 유신헌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긴급조치를 발령하고, 노동악법을 비롯한 숱한 악법들과 이를 집행하는 관료권력기구를 통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거나 탄압하였다. 반면,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적인 기업경영, 환경파괴, 산업재해 등을 규제하는 법과 제도의 정비는 뒷전이었다.

본래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며, 법 위에 군림하는 어떠한 특권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유신체제 하에서의 법치주의는, 권력기관들이 법 위에 군림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악법에 순응할 것, 즉 준법의식을 강요하는 무늬만 법치주의였다, 유신 시대에는 심지어 악법조차 공평하게 집행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의민주주의는 일부 회복되었으나 - 예컨대 대통령 직선제가 회복되었고, 군이 정치에 개입한다든가, 정보기관이 공작정치를 주도하기 어렵게 되었다. - 유신독재 시기에 조성된 관료·권력기관의 특권적 지위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리하여 민주적인 통제에서 벗어난 관료집단은 이익집단화 되었으며,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법 집행은 일상이 되었다. 특히 검찰과 법원은 대의제와 무관하게 사법관료들로만 구성되며, 사법관료들은 권한을 남용해도 탄핵 절차 외에는 어떠한 민주적인 통제도 받지 않는다. 검사, 판사들은 편파적인 수사와 재판진행, 심리소홀, 재판지연 등의 행위가 드러나도 사실상 감찰이나 징계를 받지 않는다. 고충 민원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기관조차 두지 않았다.

본래 법이란,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보호하고 자의적인 권리행사를 금지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안된 것이다.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거래관계에서의 신뢰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통제가 작동하지 않는 권력기관은 사적 이해를 추구하며 기득권세력과 야합한다든가 직무상 권한을 남용하기 마련이므로, 결국 사회적 신뢰를 보호하고,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사법신뢰도가 최하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신잔재 청산 없이 민주주의 발전과 법치주의 정립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공연히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세력은 물론이고 독과점적 지역정당 구도 속에 안주하는 정치세력을 청산하는 한편, 법 위에 군림하며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관료권력기구들을 민주적 통제 하에 두기 위해서도, 유신헌법이 불법 무효였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당시 관료권력기구들이 자행했던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은 필수적이다.

아무리 선거를 통해 여러번 정권이 바뀌더라도 대통령이나 집권여당이 유신 잔재를 청산하는 데 앞장설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 역시 독과점적 지역정당 구도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므로, 상대 당을 파트너 삼아 국가 정책을 수립하고, 기존 관료권력기구에 의존하여 정책을 집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발전을 염원한다면, 비상시에 촛불을 든다거나 선거에서 개혁을 표방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권 담당자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만을 탓할 수도 없다,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부족함과 단점(=관료 의존, 패거리 정치 등)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정당과 관료권력기구의 개혁을 위해 꾸준히 법과 제도의 개선을 추진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운동에 꾸준히 동참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다.

유신청산특별법 제정은 첫째, 헌정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필요하다.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한 유신헌법은 불법 무효이며, 유신헌법에 근거한 유신체제가 '불법국가'였음을 유신청산특별법 제정으로 확인하여야 한다. 나아가 대의제를 형해화한 '독과점적 지역정당' 구도 속에 안주하는 정당은 용인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군, 정보기관, 형사사법기관 등이 유신독재의 통치기구로서 자행한 국가폭력에 대하여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그동안 여러 과거사 관련법들이 주로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신원을 위해서 제정되었지만, 유신청산특별법은 국가폭력을 자행한 관료권력기구 그 자체를 진상규명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진상규명은 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관료권력기구의 개혁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태그:#유신청산, #관료권력기구,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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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교육청소년위원회) 변호사 2010. 9. ~ 2013. 1. 서울시교육청 감사관 2013. 2. 2015. 2. 서울시 감사관 현 (사)시민자치감사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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