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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의사당.
 여의도 국회의사당.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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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입법이라는 직무 외에 예산 심의라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직무를 지니고 있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국민의 혈세인 그 국가 예산이 어떻게 구성되고 사용되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보고 바로잡는 일은 실로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중요한 임무를 과연 국회는 어떻게 수행하고 있을까?

과거 필자가 국회에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 한 국회의원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의원실에 가보니 그 의원은 필자가 쓴 기고문들을 모두 프린트해서 색연필로 밑줄까지 쳐가며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글들을 감명 깊게 보고 있다고 했다. 이를 시작으로 함께 여러 얘기를 나눴다.

아무도 읽어보지 않는다는... 산더미 같은 예산심의 자료들

그날 필자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의원의 증언'은, 바로 예산 심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의원은 그간 국회에서 실제로 여러 차례 예산 심사를 해왔다고 한다. 그는 예산 심사가 본래 두 달의 심사 기간이 주어지지만, 실제로 의원들이 행정부로부터 심사 자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겨우 회의 일주일 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 키 정도 높이 몇 개에 이르는 엄청난 자료이고, 또 그것도 일 년 전의 그 자료에 단지 숫자만 바꾼 것이 태반이라 했다. 그러니 열람할 수도 없고, 의원들은 또 실제로 이를 거의 열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의원에 의하면, 그렇게 하여 예산 심사에 들어간다 해도, 의원들은 언론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언론에 이미 소개된 예산 관련 사안 발언을 되풀이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역구 관련 예산 발언만을 계속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행정부 공무원들은 "일 년에 3~4일만 국회에 나가 수모당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의원들 질문이 이어지는 회의장 뒤쪽에서 조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사실 공무원들도 실제 예산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한다고, 그 의원은 말했다.

이렇게 시종일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되는 심사는 결국은 대부분 규정에도 없는 이른바 '소소위'에 넘겨져 예산의 구체적 내용이 아닌, 단지 "총액 규모를 얼마 깎자"라는 여야의 '보여주기식 숫자 싸움'으로 마무리된다. 이 와중에도 각 당 중진들을 비롯해 자기 지역구 예산 증액을 목표로 하는 '쪽지예산'이 횡행한다. 결산 분야는 더욱 심각해서, 아예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평가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대한민국 역대 국회의 행정부 예산안 수정은 겨우 1%에 그치고 있다. 99%가 그대로 통과된다. 이야말로 '통법부'의 전형적 모습이다.

더구나 이 예산 심의에서도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가 의원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국회 전문위원은 비단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산과 결산에 대한 '검토보고'도 수행하는데, 이 분야에 대한 의원들의 "전문성 및 시간" 부족으로 인해, 법안 검토보고의 경우보다 입법 관료의 주도권이 훨씬 강하다.
  
지난해 11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1차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예결위 간사(오른쪽)와 추경호 국민의힘 예결위 간사가 악수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1차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예결위 간사(오른쪽)와 추경호 국민의힘 예결위 간사가 악수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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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진정 '국민의 대표'라면 먼저 예산심의부터 제대로 수행해야

이러한 국회의 모습은 본연의 임무에 대한 직무유기이고, 국민주권주의 시대에 대한 배신이다. 미국의 의회는 행정부 예산국에 비견되는 의회예산처(CBO)의 뒷받침에 의해 충실한 예산심의를 수행한다. 의회예산처는 의회 예산위원회에 경제 및 예산 전망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며, 각 상임위도 예산위원회에 예산 관련 입장과 추정치를 제출한다. 의회의 예산 심사 기간은 약 8개월에 이른다.

국회 예산 심사 기간은 확대되어야 하고, 예·결산 상임위원회의 위원 임기는 4년 임기로 전문화되어야 한다. 예·결산 검토를 담당하는 국회 전문위원은 명실상부하게 각계의 전문위원으로 개방되어 의원들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자문과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국회 내 예산정책처가 분명하게 전문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함으로써 의원의 예·결산 심사 활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국가 재정에 대한 통제는 당연히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통제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주권주의 정신의 실현이며, 재정 민주주의의 내용이다. 그리하여 원래 의회의 형성이란 행정부에 대한 재정통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국회가 진정 '국민의 대표'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 재정통제라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태그:#예산심의,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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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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