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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집, 동네, 도시, 나라 곳곳에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이야기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어떤 이야기는 육하원칙에 입각해도 될 정도로 정확하다. 이야기의 가치는 여기에서 결정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진 이야기라도 '했다더라'로 끝나는 것은 그냥 이야기로 전락한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정확한 내용을 근거로 기록한다면 '그냥 이야기'는 '역사'로 바뀐다.

역사는 어느 국가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집안도 역사를 가질 수 있고 어느 개인도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일기를 쓴다면 훗날 나만의 역사가 될 수 있다.

인터넷이나 안내 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군산' 이야기

나는 군산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책 <군산>을 처음 읽은 때 나는 새로운 것이나 어떤 정보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TV나 영화에 군산이 배경으로 나오면 한 번 더 보는 딱 그 호기심이었다. 내 예상을 뒤엎고 책 속에는 내가 모르는 군산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학창시절에는 근현대사에 대한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 그 시절에 근현대사 이야기는 역사 교과서의 몇 페이지가 전부였다.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아이가 하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어지자 나는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책 <군산>에는 이야기 해주는 어른들이 나온다. 그들은 역사서에 나오는 장소와 이야기 속의 산 증인이다. 인터넷 검색이나 안내 책자에 나온 설명에는 나오지 않는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고 그 당시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군산의 도슨트 배지영 작가에게 직접 듣는 군산이야기
▲ 군산의 도슨트와 함께 군산의 도슨트 배지영 작가에게 직접 듣는 군산이야기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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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의 마지막 날(30일) 저녁,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 '군산'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40년 넘게 살아온 도시, 역사책과 군산에 관련된 책을 읽고도 그에 대한 강연을 들으러 간 이유는 따로 있다. 나도 몰랐던 도시의 이야기를 내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책 <군산>을 쓴 배지영 작가는 군산에서 발굴한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연장에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부터 70세가 넘은 어르신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청중이 있었다. 학생들은 역사시간에 배웠던 구석기, 신석기, 삼국시대, 일제 강점기, 고군산 군도 등의 용어가 나오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가는 책 속에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역사서나 다른 책에 담겨 있는 이야기 말고 살아있는 이야기를 구하기 위해 각 장소를 여러 번 방문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귀인이 나타나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다. 군산에 있는 카페 '오산상회', '임피역' 등을 여러 번 방문했던 그녀를 지켜본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귀인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연이 근대사로 접어들자 강연장에 있던 어르신들의 대답 소리가 커졌다. 책속에 문화재로 지정된 중국집 '빈해원'에서 약혼식을 한 어르신도 이날 강연장에 있었다. 그녀는 빈해원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얼마 전 결혼기념일에 그곳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빈해원 주인이 반가워했다는 이야기도. 나는 이런 것이 생생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책 <군산>의 표지에 '옛 군산세관'의 사진이 있다. 책 속에는 세관 건물 앞에 지나다니는 그 당시 군산 시민들의 모습이 있다. 흑백 사진이지만 번듯한 건물 앞에 허름한 옷차림의 우리 백성들, 새삼 애국심이 솟아오르게 하는 그 사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외부 벽에 사용된 붉은 벽돌을 벨기에에서 수입해서 지었다는 이 건물은 국내에서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지만 그 당시 군산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가슴 아픈 건물이다.

그 당시의 백성들은 세관 앞을 지날 때 일본의 힘으로 지어진 건물이 싫어서 또 너무나 번듯한 건물 앞을 지나는 자신들의 옷차림이 너무 추레해서 고개를 건물 반대편으로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고 했다.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짐작되어 내 마음도 아팠다.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지은 별장주택인 '이영춘 가옥'. 원래의 집주인은 일본인이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 위생의 선구자인 쌍천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며 이영춘 가옥이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호교사제와 의료보험조합을 실시한 그는 제도만 만든 게 아니라 몸소 어려운 사람들을 위했다.

그 당시의 은행원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은 이영춘 박사는 항상 가난했다고 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군산 곳곳으로 왕진을 다니며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먹거리 등을 챙겨주었다. 배지영 작가도 시어머니가 어린 시절 이영춘 박사의 집에 놀러 다니곤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말이 기록으로, 기록이 역사로 
 
책 표지에 실린 옛 군산세관의 사진
▲ 책 <군산> 책 표지에 실린 옛 군산세관의 사진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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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영 작가는 군산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전남 영광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군산을 처음 방문했다. 군산에서 태어난 남자와 결혼한 그녀에게 시아버지는 군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아버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면서 모르는 것은 언제든지 아버지에게 물으라는 당부를 하셨다고 했다. 사람은 언제나 궁금한 점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답을 얻어오셨다. 배지영 작가는 그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냥 없어질 수 있는 이야기는 이렇게 남아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도 전해들을 수 있었고 내 아이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었다.

강연 막바지에 작가는 근대시대 군산의 사진과 현재 군산의 사진을 같이 또 번갈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을 보며 아픈 역사를 딛고 현재를 이뤄낸 군산 시민들이 자랑스러워졌고 한편으로 수십 년 후의 군산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때쯤 나도 할머니가 되어 손자나 증손자에게 "할머니가 예전에는"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가정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정이 모인 동네, 도시, 나라가 가진 각각의 이야기들은 전해지고 누군가의 기록이 남아 역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가정, 도시, 나라의 도슨트가 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brunch.co.kr/@sesilia11)에도 실립니다.


군산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배지영 (지은이), 21세기북스(2020)


태그:#군산, #도슨트, #군산세관, #빈해원, #작가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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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아들을 키우며 꿈을 이루고 싶은 엄마입니다.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다같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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