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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에서 천리마고속 상무 용석(김의성 분)은 사다리 걷어차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좀비로 변한 승객들을 피해 다른 객실로 간 뒤 함께 피신하던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버리지요.

좀비가 창궐한 극한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도 이런 사다리 걷어차기 논란은 종종 일어납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의 조처도 그 중심엔 사다리 걷어차기 논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변협은 제10회 변호사 시험 합격자 실무 연수자를 최대 200명으로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4년간 변협에서 실무 연수를 받은 인원이 대략 700명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숫자가 대폭 줄었습니다.

변호사 시험 합격자는 변호사법에 따라 실무 연수를 반드시 받아야 하며, 이를 마치지 못하면 변호사 업무를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변호사 시험 합격자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해 온 변협이 이런 조처를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변협은 양질의 실무 연수를 하려면 인원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이날 법학전문대학원 원우협의회가 낸 성명은 같은 로스쿨 출신 선배들이 후배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모순적이게 합격자 수 축소를 주장하는 핵심 인사들은 변호사 시험 1, 2기 초기 기수로... 자신들은 훨씬 수월하게 합격하고도, 후배 기수들은 힘들게 공부하고 더 점수를 잘 받아도 탈락하게 하고 있다.
 
 2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법학전문대학원 원우회와 변호사시험 수험생들이 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변호사시험의 자격시험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기득권의 밥통 사수, 학생들은 죽어간다'라는 구호가 눈에 띈다. 2021.4.21
  2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법학전문대학원 원우회와 변호사시험 수험생들이 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변호사시험의 자격시험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기득권의 밥통 사수, 학생들은 죽어간다"라는 구호가 눈에 띈다. 2021.4.21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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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부동산 민심에서 빠지지 않는 것도 사다리 걷어차기입니다. 대출받아 집 사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근로소득으로는 집을 살 수 없어 대출받아서라도 사려고 하는데 사다리라 할 수 있는 대출마저 막혀 버린(걷어 차인) 현실에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2018년 9월 "모두가 강남에 살 필요가 없다"라고 한 당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발언은 서울 부동산 급등 관련해 가격 대책을 말하던 중에 나왔지만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비난의 핵심은 본인은 거기 살면서 남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고위 공직자들 중 일부가 정작 자신들의 자녀는 자사고와 외고에 보낸 것도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로남불의 또 다른 이름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닌가 싶네요.

<부산행>의 용석처럼 기득권에 편입되면 진입 장벽을 치고 싶은 것이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처럼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특히 더 그렇겠지요. 이 때문에 개개인의 양심이나 도덕을 꾸짖는 것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정치입니다.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정치'는 일반적으로 '기득권'에 대항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이란 왕가, 법조계, 교회의 기득권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치가 원래의 의미처럼 기득권에서 배제된 사람들, 말하자면 몫 없는 사람들에게 몫을 나눠 주고, 그들이 공동체의 질서와 자유를 보존하는 행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때, 또 정치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좀 더 안정되고, 문명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은 기득 세력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
- 정치는 도덕적 선악의 선택·선언 아냐, <레디앙> 2021. 4.24

기득권에서 배제된 사람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에게도 몫을 나눠주고 기회를 주는 것이 정치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임을 표방했습니다. 정치의 본질을 잘 보여준 구호였으나 문재인 정부와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는 이에 못 미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2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연 집회에서 변호사들은 "무책임한 대량공급으로 변호사들이 다 죽을 판"이라고, 같은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법학전문대학원 원우회와 변호사시험 수험생들이 연 집회에서는 "기득권의 밥통사수로 학생들이 죽어간다"라고 각각 분노했습니다.

'님아, 그 사다리 치우지 마오'라는 단순한 주문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정치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2009년 로스쿨이 도입된 지 12년이 되어가도록 정부와 국회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의 현주소입니다.

태그:#사다리 걷어 차기, #변협,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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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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