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쿄타워> 스틸 컷

영화 <도쿄타워> 스틸 컷 ⓒ 스폰지

 
'어머니'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화 <도쿄타워>는 어머니를 소재로 모성애를 그린 영화다. 그런 만큼 감동과 눈물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마사야가 딸이었다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리고 어머니로 살았던 에이코의 마음 깊은 곳은 어떤 상태일까.
 
마사야(오다기리 죠)는 홀어머니 에이코(키키 키린) 아래에서 외동아들로 자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가족에 대해 무책임할 뿐이다. 술주정뱅이에 바람둥이다. 에이코는 마사야를 데리고 시가를 떠나 친정으로 들어간다. 마사야가 잘되기만을 바라며 식당 일을 열심히 해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다. 

미술 공부를 하던 마사야는 고등학생이 된 뒤 어머니 곁을 떠나 생활한다. 그때부터 마사야는 방탕해진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학교에 지각하고 등등. 동경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그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급기야 졸업을 제 때 하지 못하여 어머니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다. 마사야는 어느새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도 마사야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자식들의 교육과 생계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몫까지 감당하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어머니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군것질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간혹 맛있는 거라도 생기면, 어머니 입에 넣어드리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도 나의 욕구보다 어머니의 형편을 살폈더랬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었다.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과외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마사야처럼 먹고 마시고 노느라 어머니가 보내준 돈을 탕진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깊이 내상을 입은 어머니, 에이코 
 
 도쿄타워가 보이는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 에이코

영화 <도쿄타워> 스틸 컷. 도쿄타워가 보이는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 에이코 ⓒ 스폰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에이코는 남편과 헤어진 지 30년 정도 흘렀을 때 암 진단을 받는다.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항암치료를 기다리고 있다. 비로소 마사야도 철이 좀 든다. 어머니의 간호에 나름 정성을 다한다.

마사야는 아버지가 병문안 온다는 소식을 전한다. 에이코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남편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미용사인 아들 친구에게 머리카락을 다듬고, 립스틱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목에는 스카프를 두른다. 그리고 침대에서 무릎을 꿇고 남편을 맞는다.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겨졌을 때, 남편은 뜬금없이 발모제 덕분에 머리카락이 나왔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 거기에 에이코는 맞장구를 칠 뿐이다. 남편을 원망하는 말도 하지 않는다. 혼자 아들을 키워낸 공치사도 하지 않는다. 항암 치료를 앞두고 자기가 얼마나 두려운지 입도 뻥끗 않는다. 오히려 남편의 병문안이 얼마나 황송한지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하다.

두 사람은 매점에서 무언가를 사고 있다. 

"뭘 그렇게 많이 사요."
"당신만 먹나, 먹을 사람 많잖아."
"그래도 미안하게(すみません)."
"이것도 사."
"이리 주세요(すみません)."
"자!"
"에구 됐다니깐요. 자꾸 미안하게(すみません)."
"이것도, 이것도."
"그만 사요(すみません)."


에이코는 남편 앞에서 할 줄 아는 말이 'すみません(스미마셍)' 뿐인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을 할 때도 '스미마셍'이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 에이코의 '스미마셍'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현으로 들린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뭐가 그렇게 고마운 건지.

에이코는 남편의 행위에 대해 과도하게 만족한다. 그 관심을 과대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의 사랑이라고 가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 속 진실은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게 편하고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사는 법 외에 다르게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는 달라지지 않았냐고. 과연 이런 부부의 모습이 지금은 사라진 구시대적 유물일까.

어떤 점에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 흐르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내를 두고 남편에게 의지하는 존재요, 남편보다 열등한 존재요, 혹은 남편이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인간이 이렇게 동등한 주체로 인정되지 않고 대상화될 때, 그 자아상은 깊은 내상을 입는다고 한다. 에이코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녀의 자아상은 깊이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나는 에이코와 같은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어머니 연민 영화<도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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