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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시간 서울 지하철역은 들고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인파의 흐름을 따라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며 미로 같은 통로를 능숙하게 헤쳐나가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대부분은 앞만 보며 자기 갈 길을 가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나처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 지 어느덧 한 달이다.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 힘들긴 하지만 익숙해지니 더 이상 실수도 안 하고 주변 사람을 관찰하는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들고나는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슬슬 궁금해졌다. 아마도 대부분은 일터로 향하는 거겠지. 일용할 양식을 구하러. 문득 그들 하나하나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처럼 보였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할 수 있다면 항해 중 겪는 풍파는 운명에 비유할 수 있으려나. 거센 풍랑을 만나면 배가 난파되는 것처럼 인간도 불행한 운명을 만나면 좌절하고 넘어진다. 

항해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그 원조다.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이타카로 귀향하는 오디세우스는 신의 도움을 받아 10년간의 항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한다. 그는 운명과 싸워 승리하는 신화 속 영웅이다. 그러나 현실 속 범인들은 세파에 시달려 좌절하거나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하철로 출퇴근을 반복하다 얼마 전에 읽은 어떤 소설이 떠오른 이유는 출퇴근길의 여정이 너무나 지루할 뿐만 아니라 힘들었기 때문이다. 

알프레트 되블린의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1920년대 베를린에 살았던 프란츠 비버코프의 인생 항로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서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베를린의 시멘트 공장 노동자이자 운송 노동자였던 프란츠 비버코프에 관한 보고서이다. 여기 내가 보고하고 있는 이 사나이는 평범한 남자는 아니지만, 그를 잘 이해하고 보면, 그리고 우리 역시 한 걸음 한 걸음 그와 똑같은 인생의 발걸음을 할 수 있고 또 그와 똑같은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 역시 평범한 사람이다." -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민음사) 

테겔 형무소에서 만기 복역 후 출소한 프란츠 비버코프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신문을 팔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 그가 또다시 뒷골목 패거리들과 엮이게 되었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다 팔 하나를 잃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마저 살해되고 애인을 살해했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자 충격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어긋났는지를 되돌아보고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웬만한 불행이나 실패를 겪으면 쉽게 무너진다. 불행과 실패의 충격 앞에서 꿋꿋이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프란츠 비버코프는 웬만한 세파에 잘 견뎌냈으나 애인마저 살해되고 누명을 쓰는 끔찍한 운명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너져버렸다. 다행히 그는 살인 누명을 벗고 자신의 삶을 성찰한 뒤에는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작은 공장의 수위 보조로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소설에 삽입된 이런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 풍상을 겪은 식물에는 단맛이 생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난을 겪은 인간은 지혜를 얻는다는 유추도 가능할까. 

"식물들은 추위에 대항하여 어떻게 몸을 보호할까? 대부분의 농작물은 약간의 서리에도 견디지를 못한다. 어떤 식물들은 추위를 이겨 낼 수 있는 화학 물질을 자체의 세포 안에서 만들어 낸다.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세포 안의 전분을 당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채소의 유용성이 이런 당화 때문에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얼어서 단맛을 띠게 된 감자가 가장 좋은 예이다. 그러나 채소나 과일이 얼면서 당도가 높아져 맛을 돋우는 경우도 있다. 야생 열매들이 그런 예이다. 이런 열매들을 서리가 살짝 내릴 때까지 나무에 그냥 놔두면 이것들은 곧장 당분을 만들어내 그 맛이 변하면서 더 개량될 수도 있다. 산사나무 열매가 이에 해당한다." -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민음사) 

출근길 지하철 역내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올려다보면 숨이 턱턱 막혀온다. 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 드디어 역 바깥으로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면 눈앞에 어김없이 토스트나 김밥을 파는 상인이 나타난다. 토스트와 김밥의 가격은 천오백 원에서 이천 원이다.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역 Wurst-seller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역 Wurst-seller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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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알렉산더 광장역 근처에서 한 젊은 남자가 붉은 파라솔과 붉은 통이 연결된 장비를 허리에 동여맨 채 걸어다니며 소세지와 빵을 팔았다. 가격은 1유로 50센트. 우리 돈으로 약 이천오백 원. 3년 전 가격이다. 

나의 지하철 출퇴근 항로는 앞으로 한 달 정도 더 지속될 예정이다. 이후로는 재택근무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 항로가 또다시 바뀔 때까지 나는 가파른 계단을 계속해서 오르내리며 인파의 흐름을 따라 미로 같은 지하철역 통로를 헤쳐나가야 한다. 바깥으로 나와선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토스트를 하나 사야지.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아메리카노 커피도 한 잔 사고 말이다. 

태그:#지하철 출근길, #오디세이, #알렉산더광장, #인생항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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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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