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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타기 전의 명동학교와 학생들
 불 타기 전의 명동학교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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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은 1914년 10월 3일 청파호에서 개천절 행사를 거행하고, 10월 5일에는 고령사 제례를 행하는 등 대종교 관련 행사와 함께 은밀히 각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교민들에 대한 민족교육 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당시 간도에는 많은 한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1909년 북간도 한인수는 9만 8천여 명이었으나 1911년에는 12만 6천여 명, 1921년에는 30만 7천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190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북간도 지역 한인 수는 북간도 전체 인구 수의 70~80퍼센트에 달했으며, 한인들은 간민교육회, 간민회, 간민교육연구회 등 사회 단체를 통하여 한인의 각종 권리와 자치를 신장시킴으로써 북간도 지역에는 명실상부한 한인 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주석 3)

정착 인구가 많아지면서 곳곳에 한인학교가 들어섰다. 대종교 계열을 비롯하여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개설한 것이다.

"북간도의 연길ㆍ화룡ㆍ왕청ㆍ훈춘ㆍ안도 등 3개 현에서만 1916년까지 존치된 여러 행태의 한인학교를 총 158개교에 달했으며 재적 학생수도 모두 3,879명에 이르렀다." (주석 4)

대종교에서 만주에 세안 시교당과 주요 학교는 다음과 같다. 

명동학교(明東學校) - 개천 4369(1912)에 서일(徐一)이 명동학교를 동만왕천현에 세워서 경영하고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정암 윤정현(尹廷玄)들도 모두 지내고 있는 곳에서 동포교육에 전력했었다. 대종교 북도지사를 중심으로 한 교육시설이 십여개의 이르렀다. 남북 만주지역에서도 대종교의 포교와 함께 지사 또는 시교당이 있는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민족교육과 국민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東昌學敎) - 경남 밀양 출신의 단애 윤세복(대종교 제3대 교주)은 형 윤세용과 함께 4369(1911)년 봄에 만주로 가서 남만주 봉천성 환인현 성내에 대종교 환언 시교당을 설립하고 한국인 교육기관의 동창학교를 세워 빈곤한 동포에게 학비를 보조하면서 계몽과 민족정신 앙양에 주력하였다.

이 학교장에 선임되었던 백 농(白 濃), 이동하(李東廈)도 대종교인이었고 고향에서 교육에 힘썼던 김영숙(金永肅), 이극로(李克魯) 등의 인사를 맞아 그들과 협력해서 교육을 추진했으므로 동포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그런데 이러한 대종교의 활동이 일본 영사관의 방해공작에 의하여 주춤하게 되더니 결국 폐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세복은 실망하거나 굴하지 않고 무송현(撫松縣)으로 장소를 옮겨서 홍업단(興業團)을 조직하여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설립하는 등 끈기있게 활동을 계속했다.

서전의숙과 한흥의숙 - 또 함북 경원출신으로 일찍이 민족교육의 선봉으로 나서서 교육에 주력한 호정(湖亭) 한기욱(韓基昱)은 용정촌(龍井村) 서전의숙(瑞典義塾) 학감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동포의 교육에 노력하다가 4370(1913)년에 길림성 이란도(以蘭道) 밀산(密山)에서 대종교 시교당과 함께 한흥의숙(韓興義塾)을 설립하고 전력을 기울여 동포교육에 헌신 노력했다. 그로부터 북만주 지방에서의 민족교육의 길이 열려 동포 사회의 단결과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많았다.

박달학원 - 중국 상해에서는 예관 신규식의 지도로 박달학원이 설립되어 그 지역 동포의 청년자제를 교육하였고 남경(南京)에서는 백암 박은식이 자유 본부 내에서 강습소를 설립하여 대종교 경배식과 함께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주석 5)

 
홍암 나철선생
▲ 홍암 나철선생 홍암 나철선생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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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주의 동포사회에서는 처음 창동학원에서 불리기 시작한 다음과 같은 교가가 널리 알려졌다. '한배검' 등의 표현으로 보아 대종교인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한줄기 뻗친 맥줄 흰 뫼 아래 
 한배검이 처음 닦은 굳고 굳은 터
 그 위에 우뚝 솟은 우리 창동은
 인류문화 발전하려 떨쳐 나섰다.(1절)

 여기저기 배달나라 남녀제씨들
 애를 쓰고 힘들여 거둬 기를제
 피어린 역사로써 거름을 주어
 사랑스런 강토에 다시 보내자.(2절)

 참스럽다 착하다 아름다워라
 정신은 백산이요 이상은 독립.(후렴) (주석 6)

   
주석
3> 김춘선, 「간도지역이 왜 독립운동기지가 되었는가」, 『내일을 여는 역사』, 008호, 145쪽. 서해문집, 2002.
4> 『조선족략사』, 280쪽, 연변인민출판사, 1986. 
5> 강수원, 앞의 책, 230~231쪽.
6> 윤병석,『간도 역사의 연구』, 46쪽, 재인용, 국학자료원, 200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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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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