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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함께 근무했던 E는 나와는 구면이었다. 5년 전 내가 늦깎이 실습학생으로서 렌프루 카운티 노인들 대상의 건강검진 자원봉사에 참가했을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때 E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어서 현장근무는 하지 않았고 대신 카운티 관내 양로원을 돌며 자원봉사하는 패러메딕 실습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당시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줘서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제는 동료로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E도 나를 기억하고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그때 이야기를 한참 하던 중에 출동신고가 들어왔다. 17번 도로에서 두 대의 차량이 정면 충돌한 교통사고. 그중 화물을 적재한 트럭은 길옆 웅덩이로 빠졌는데 트럭에 적재한 화물이 운전석을 덮고 있어서 전체 차량 탑승자가 몇 명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되는 중이라고 했다. 
 
끔찍한 사고,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이야기를 한참 하던 중에 출동신고가 들어왔다.
 이야기를 한참 하던 중에 출동신고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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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 번째로 현장에 도착한 근무조였는데 우리가 현장에 도착할 때 그 트럭 운전자를 막 빼내고 있었다. 정면충돌한 두 대 중 중앙선을 넘은 차량의 운전자는 부상 정도가 경미했는데 맞은 편에서 오던 트럭은 중앙선을 넘은 차량을 피하느라 길옆으로 빠졌던 것.

트럭 운전자는 중상이었다. 그의 왼쪽 안구가 탈출했고, 코와 입이 뭉그러져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며, 부러진 치아들이 기도를 막고 있었고, 골반뼈 골절도 의심되었다.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끝나자마자 때마침 도착한 헬기가 17번 도로 한가운데 내려앉았고 곧바로 오타와 외상센터로 환자를 이송했다.

여담이지만, 캐나다에서 6년 반째 살면서 택시는 딱 한 번 불러봤는데 헬기는 수시로 부르고 있다. 이 곳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는 '오렌지'라고 부르는 응급의료용 항공기를 운용 중이다. 각 항공기마다 (헬기 포함) 응급의학전문의 수준의 패러메딕 2명이 탑승하고, 기상조건이 허락하는 한 이착륙이 가능한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뜨고 내린다.

E와 나는 혹시나 제 3의 환자가 화물 아래 깔려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현장에 잠깐 남았다. 차근차근 사고 차량 주변을 살펴보니 트럭 운전기사는 분명 중상이긴 했지만 그나마 운이 좋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트럭은 무거운 원목을 싣고 가던 중이었다. 트럭이 도랑으로 빠지면서 뒤에 실은 원목이 운전석을 덮쳤는데 자칫 잘못했으면 얼굴이 아니라 상반신 전체가 날아가서 헬기가 아니라 검시관을 부를 뻔했다.

사고 현장에 뛰어든 남자 
 
사고를 최초 목격하고 제일 먼저 달려와서 트럭 운전자를 빼내려고 애쓴 행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참전 후유증으로 PTSD를 겪고 계신 분이었다.
 사고를 최초 목격하고 제일 먼저 달려와서 트럭 운전자를 빼내려고 애쓴 행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참전 후유증으로 PTSD를 겪고 계신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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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화물 아래에 깔린 사람은 없었지만 사고 현장의 눈밭에 주저앉아 눈에 손을 비벼대며 흐느껴 우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사고를 최초 목격하고 제일 먼저 달려와서 트럭 운전자를 빼내려고 애쓴 행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전직 캐나다 군인으로서 참전 후유증으로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계신 분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운전자를 구하려고 자신의 손과 몸에 운전자의 피가 잔뜩 묻자 그걸로 인해 PTDS 증상이 다시 찾아와서 눈으로 피를 씻어내며 울고 계셨던 것.

혹시 몰라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봤다. 생체징후(vital sign)부터 심전도까지 거의 다 체크해봤는데 다행히 별다른 이상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분을 모시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피 묻은 자신의 옷과 손을 씻고 싶다고 해서 물을 흘려주며 손 씻는 걸 도와드렸다. 하지만 손에서 피가 잘 지워지지 않아서 아예 눈에 띄지 않도록 환자분의 손에 장갑을 씌우고 수건으로 감아 드렸다. 

그분은 이미 자살기도 전력이 수 차례 있었고 늘 죽을 생각에 사로잡혀 산다고 했다. 방금 구한 트럭 운전사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고 겨우 돌아서려는 참이었지만 이 환자는 끊임없이 그 문턱을 향해 다가가고 또 그것을 넘어서려고 했다.

그런 둘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마주쳤다. 제 한 몸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인 자가 다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기도 모르게 뛰어들었을 때는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좋은 뜻, 좋은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주제 넘는 짓인 줄은 알지만 그 환자가 어서 나쁜 생각을 접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다.

"지금 이렇게 살아계시니까 아까 그분이 구조되도록 도울 수 있었잖아요. 할 수 있는 거 다 하셨어요. 그리고 정말 큰 일 하셨고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위에 계신 분께서 두 분을 위해 마련한 것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살아 계세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태그:#캐나다, #응급구조사, #패러메딕, #PARAMEDIC,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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