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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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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와 저술을 하는 동안 틈틈이 두 아들과 둘째 형님 그리고 제자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다산 연구에 일가를 이룬 박석무 전 의원은 1991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편지 57편을 뽑아 편역하여 '장안의 종이값'을 올렸다.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26통,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이 9통, '둘째 형님께 보낸 편지'가 13통, '다산의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9통이다. '편지'는 안부나 가정사 등 내용이 없지 않지만, 그의 역사관과 철학ㆍ사상이 담긴다.

"다산의 글이 어느 것인들 값지지 않으리오만, 오래 전부터 가서(家書) 가계(家誡) 증서들이야말로 다산의 인품과 철학사상 및 문학사상을 제대로 나타내준 글들이라는 정평이 있던 터였다. 인간 다산의 면모를 살필 수 있고 그의 세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사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는 데는 그 이상 좋은 자료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배생활이라는 극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전혀 좌절의 분위기는 나타내지 않고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을 저술해야 하는지 등, 그의 탁월한 학자적 모습이 옴소롬히 담겨 있는 내용이 다름 아닌 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인 것이다." (주석 4)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하피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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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곳으로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문득 한 구절이나 한 편 정도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이윽고 생각하길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나 보여줄 수 있겠다 여기는데 너희들 생각은 독서에서 이미 연(燕) 나라나 월(越)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나가서 문자를 쓸데없는 물건 보듯 하는구나."(「두 아들에게 주는 편지」, 1802년 12월 22일)라고 안타까워하였다.

그가 할 일이란 '글과 붓'이 있을 뿐이었다. 지은 글과 책도 그나마 당장 읽어줄 사람은 두 아들 뿐인데, 자식들이 제대로 글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서운해 한다. 그가 '글과 붓' 바꿔 말하면 글쓰기에 그토록 집념한 것은 '자식교육'과 더불어 자신의 치열한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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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취급받겠느냐? 아무쪼록 너희들은 이런 점들까지 생각해 다시 분발하여 공부해서 내가 이어온 실날같이 된 우리 집안의 글 하는 전통을 너희들이 더욱 키우고 번창하게 해 보아라.

그러면 세상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될 것은 물론 아무리 대대로 벼슬 높은 집안이라도 우리 집안의 청귀(淸貴)와는 감히 견줄 수 없을 것이니 무엇이 괴롭다고 이런 일을 버리고 도모하지 않느냐.(앞의 편지)

정약용이 추구하는 철학의 본질은 만백성에게 도움을 주는 실학(實學)사상이다. 따라서 그의 '독서론'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實學)에 마음을 두고 옛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된 뒤 더러 안개 낀 아침, 달 뜨는 저녁, 짙은 녹음, 가랑비 내리는 날을 보고 문득 마음에 자극이 와서 한가롭게 생각이 떠올라 그냥 운율이 나오고 저절로 시가 되어질 때 천지자연의 음향이 제 소리를 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시인이 제 역할을 하는 경지일 것이다. 나보고 너무 실현성 없는 이야기만 한다고 하지 말거라.(앞의 편지)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 1808년 겨울에 「학연에게 부친다」는 편지의 한 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사실을 인용하는데 이 역시 비루한 일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신증동국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과 동방의 다른 문자와 사실을 수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한 뒤에 시에 인용해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유득공의 『16국(國)회고시(懷古詩)』를 중국 사람들이 책으로 간행했던 이유는 우리나라 사실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주석
4>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6쪽, 창작과비평사, 2001(개정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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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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