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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주시경 묘비.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주시경 묘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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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ㆍ19혁명 후 각계 인사들로 '고 주시경 선생 이장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동안 경기도 수색 고택굴 공동묘지에 방치되었던 묘소를 이해 10월 1일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장현리로 이장하고, 제자 최현배가 짓고 후학 정인승이 쓴 묘비명을 세웠다. 서거 46년 만의 일이다.

다시 선생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1981년 12월 12일 광복회와 한글학회가 주관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제2묘역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묘비명

스승은 열아홉 살 때 갑오경장의 해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 들어 신학문을 닦고 학문과 영어의 공부에서 우리 말 글의 훌륭한 가치를 깨닫고 이의 연구에 착수하니, 이것이 실로 배달의 말 글이 과학스런 진리 탐구의 괭이를 보기 처음이었다.

이로부터 스무 해 동안, 혹은 정치 운동에, 혹은 사회 개량 운동에, 혹은 순 한글 신문내기에, 마침내는 망국민의 생활에까지 갖은 풍상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 말 글 연구에는 잠시의 쉼도 없이 그 밝혀낸 학리를 베풀어 말본과 말모이를 지으며,

서울 안 모든 중등 학교와 일요 강습소까지 혼자 도맡아 가르치기에 편한 날이 없이 성근을 다하다가 드디어 서른 아홉 살 장년으로써 아깝게도 이승을 하직하였다.

스승은 실로 배달 말 글의 과학스런 연구의 개척자이요, 국어 교육 한글 운동의 선구자이었다. 우리들이 국어 존중, 한글 사랑의 겨레 정신으로써 왜정의 압박에 항거하고 해방을 맞아서는 국어 교육, 한글 운동의 줄기찬 발전을 이룬 것은 다 직접 간접으로 스승의 끼친 교화의 소치이다.

아아! 갸륵하다.
스승은 겨레 정신의 영원한 거울이요 한글문화의 불멸의 봉화이다. (주석 3)

 
 광화문 <한글학회> 입구에 설치된 주시경 선생 흉상. 이곳부터 북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난 길이 '한글가온길'이다.
 광화문 <한글학회> 입구에 설치된 주시경 선생 흉상. 이곳부터 북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난 길이 "한글가온길"이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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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업은 계속되었다.

1974년 7월 한글학회는 민족문화협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서거 60주기 추모식과 흉상 제막식, 강연회를 갖고, 1976년 12월 국어학회는 선생 탄생 100돌을 기념하여 이기문 편 『주시경 전집』 상ㆍ하 두 권을 아시아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한글학회는 1986년 10월 한글날을 맞아 천안 독립기념관 뜰에 선생의 〈말씀비(어록비)〉를 세웠다.

북한에서도 선생의 유업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1957년 10월 북한 언어문화연구소는 한힌샘 탄생 80주년을 맞아 『주시경 유고집』을 간행하고, 1961년 12월 평양의 과학원에서 선생 탄생 9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김병제ㆍ홍기문ㆍ이극로ㆍ이기영 등 한글학자ㆍ교육자ㆍ문인 등이 참석하였다.
  
주시경학보 1988년 7월부터 탑출판사의 '주시경연구소' 주관으로 『주시경학보』가 간행되면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 주시경학보 1988년 7월부터 탑출판사의 "주시경연구소" 주관으로 『주시경학보』가 간행되면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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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탄생 111주년을 맞은 1987년 12월 서울에서는 도서출판 탑출판사 안에 '주시경 연구소'가 설립되고, 1988년 7월부터 탑출판사의 '주시경연구소' 주관으로 『주시경학보』가 간행되면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연구소 책임을 맡은 김민수 소장은 '학보' 창간사에서 "아직 장년의 나이인 37세 7개월을 일기로 평생의 숙망이던 구국일념을 이루지 못한 채 아깝게도 유한의 생애를 끝마쳤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갔어도, 그가 남긴 공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추모하였다.
 
창간사는 이어 "가장 명심할 것은 단순히 우리 선현의 유업을 선양함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적 공적과 시대적 사상을 오늘에 새롭게 다시 살리되, 현재와 미래에 알찬 피와 살이 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석 4)
라고 다짐하였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 한힌샘 주시경 선생
▲ 한힌샘 주시경 선생 한힌샘 주시경 선생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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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 중에서 연구와 업적으로 '학(學)'을 이룰만한 분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학보(學報)'를 발행하는 경우는?


주석
3> 『나라사랑』 제4집, 32쪽.
4> 김민수, 「'주시경학보'를 창간하면서」, 『주시경학보』 제1집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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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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