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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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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전한다. 이 속담을 빌려서 학자는 죽어 글을 남긴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자가 남긴 글이라고 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글은 활지화와 동시에 사문자(死文字) 되기도 하고, 어떤 글은 시공을 초월한다. 주시경은 학자이고 연구가이면서도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쇄 매체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고 너무 일찍 요절한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서우학회 협찬원으로 있을 때인 1907년 1월 1일 『서우』 제2호에 쓴 「국어와 국문의 필요」는 시공을 초월하는 글 중에 속한다.

가) 대체로 글(文字)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형상을 표하는 글이요, 하나는 말을 표하는 글이다. 대개 형상을 표하는 글은 옛적 덜 열린 시대에 쓰던 글이요, 말을 표하는 글은 근래 열린 시대에 쓰는 글이다. 그러나 형상을 표하는 글을 지금까지도 쓰는 나라도 적지 아니하니, 중국의 한문 같은 글이다. 그 외는 다 말을 기록하는 글인데, 이국(伊國), 법국(法國), 덕국(德國), 영국(英國) 글과 일본 가나(假名)와 우리나라 정음 같은 글들이다.
  
대개 글이라 하는 것은 일을 기록하여 내 뜻을 남에게 통하고 남의 뜻을 내가 알고자 하는 것뿐이다. 물건의 형상이나 형상없는 뜻을 구별하여 표하는 글은 말 외에 따로 배우는 글이요, 말을 표하는 글은 이왕 아는 말의 음(音)을 표하는 글이다.

나) 이러므로, 형상을 표하는 글은 힘이 더 들어서 그 글을 배우는 것이 타국말을 배우는 것과 같이 세월과 힘이 허비될 뿐 아니라, 천하 각종 물건이 무수한 이름과 각양각색 사건의 무수한 뜻을 다 각각 표로 구별하여 그림을 만들므로 글자가 많고 자획이 번다 하여 배우고 익히기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말을 표하는 글은 음의 십여가지 분멸만 표하여 돌려 쓰므로, 자획이 적어 배우기와 익히기가 지극히 쉬울 뿐 아니라 읽으면 곧 말인 즉 그 뜻을 알기도 말 듣는 것과 같고, 지어 쓰기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편리함이 형상을 표하는 글보다 몇 배가 쉬울 것은 말하지 아니하여도 알 것이다.

다) 또, 이 지구상의 육지가 천연으로 그어져 그 구역 안에 사는 한떨기 인종이 그 풍토에서 품부받은 토음에 적당한 말을 지어 쓰고 또 그 말의 음에 적당한 글을 지어쓰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나라에 특별한 말과 글이 있는 것은 곧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자연히 바로 자주국 되는 표요 그 말과 그 글을 쓰는 사람들은 곧 그 나라에 속하여 한 단체되는 표다. 그러므로, 남의 나라를 빼앗고자 하는 자가 그 말과 글을 없애고 제 말과 제 글을 가르치려 하며, 그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제 말과 제 글을 유지하여 발달코자 하는 것은 고금천하 사기(史記)에 많이 나타나는 바이다. 그런즉, 내 나라 글이 다른 나라만 못하다 할지라도 내 나라 글을 숭상하고 잘 고쳐 좋은 글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라) 우리 반도에 태고 적부터 우리 반도인종이 따로 있고 말이 따로 있으나 글은 없었다. 중국을 통한 후로 한문을 쓰다가 세종대왕이 지극히 밝아서, 각국이 다 그 나라글이  있어 그 말을 기록하여 쓰되 홀로 우리나라는 글이 완전치 못함을 개탄하고, 국문을 창제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으니 참 거룩한 일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그 뜻을 본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문만 숭상하여, 어릴 때부터 이삼십까지 아무 일도 아니하고 한문만 공부로 삼되 능히 글을 알아 보고 능히 글로 그 뜻을 짓는자가 백에 하나가 못 된다. 이는 다름 아니라 한문은 형상을 표하는 글일뿐더러 본래 타국 글이므로 이 같이 어려운 것이다.

마) 사람의 일평생에 두 번 오지 아니 하는 때를 다 한문 한 가지 배우기에 허비하니 어찌 개탄치 아니하겠는가? 지금 뜻있는 이들이 교육교육하니 이왕 한문을 배운 사람만 교육코자 함이 아니겠고, 또 이십년 삼십년을 다 한문을 가르친 후에야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치고자 함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어나 일어로 가르치고자 함인가? 영어나 일어를 누가 알겠는가? 영어, 일어는 한문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지금 같은 세상을 당하여 특별히 영(英語), 일(日語), 법(佛法), 덕(德語) 등 여러 외국말을 배우는 이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국 인민의 사상을 변화시키며 지식을 다 넓혀 주려면 불가불 국문으로 각양각색의 학문을 저술하며 번역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다 쉽게 알도록 가르쳐 주어야 될 것이다. 영, 미, 불, 독 같은 나라들은 한문을 구경도 못 하였으되 저렇듯 부강함을 보라. 우리 동반도(東半島)가 사천여년 전부터 개국한 이래 이천만중 사회에 날로 통용하는 말을 입으로만 서로 전하던 것도 큰 흠절이어늘, 국문이 생긴 후 몇 백년에 사전 한 권도 만들지 않고 한문만 숭상한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겠는가?

오늘 이후로 우리 국어와 국문을 엄수이 여기지 말고 힘 써 그 법과 이치를 궁구하며, 사전과 문법과 독본들을 잘 만들어 더 좋고 더 편리한 말과 글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온 나라 사람이 다 국어와 국문을 우리 나라 근본의 주장글로 숭상하고 사랑하여 쓰기를 바란다. (주석 4)


주석
4> 『주시경학보』 제4집, 이윤표, 「주시경 '국어와 국문의 필요'」 252~253쪽, 1989, 탑 출판사.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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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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