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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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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을 일러 '개명군주'라는 학자들이 있다. 인물 평가는 생애 전체를 두고 시비곡직을 가려서 종합판단하는 것이 옳다.

고종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최소한 입헌군주제라도 수용하였다면, 청ㆍ러ㆍ일의 차례로 뒤바뀌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치를 면하였을 지 모른다. 고종은 초기에는 대원군, 나중에는 민비와 친러파, 종국에는 친일파 대신들에게 휘말려 국권을 상실한 망국군주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배척하면서 오로지 왕권유지에만 권력을 쏟았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대신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친위 조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1898년 6월 30일 황국협회의 결성으로 현실화되었다. 황국협회는 이기동ㆍ고영근ㆍ길영수 등 황실 측근 세력이 주도했지만, 몇 해 전에 고종의 밀명을 받아 김옥균을 암살했던 홍종우가 협회의 이념과 정책 방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황국협회의 행동대원은 황실의 지원을 받은 상부사의 보부상들이었다. 이들 세력 가운데 몇몇은 권력욕으로 황국협회와 독립협회를 오가며 활동했지만, 대부분은 확고부동한 고종의 친위대로서 얼마 후 벌어질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주석 9)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얻지 못한 수구세력은 음모와 술책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 든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시세와 민심을 타고 국정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하자 수구세력은 정치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음모를 꾸민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ㆍ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자, 개화파 인사들은 이 신정부를 지지하고 신정부와의 협의하에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후 의회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월 5일 한국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신관제(의회설립법)를 공포하였다. 또한 개혁파들은 그들의 체제를 굳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10월 28일 -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개혁파 정부와 독립협회 등 애국적 시민과 새로 개설될 '의회'가 단결하여 자주적 개혁정책을 실현할 결의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파 정부는 의회설립 하루 전인 11월 4일 밤에 붕괴되었다. 친러수구파들이 의회가 설립되어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자신들은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으로 국체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서(비밀삐라)를 뿌려 모략전술을 썼기 때문이다.

황제가 폐위된다는 모략보고에 놀란 고종은 11월 4일 밤부터 11월 5일 새벽에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다시 조명식을 내각수반으로 한 친러수구파 정권을 조직하였다. (주석 10)


1519년(조선 중종 14) 대사헌이 된 조광조가 사림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일부 공신들이 지나치게 차지한 토지를 회수하여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각종 적폐를 척결하면서 개혁을 시도하자 훈구파들이 움직였다. 이들은 궁중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글자를 쓴 다음 벌레가 파 먹은 나뭇잎을 왕에게 바쳐 중종으로 하여금 조광조를 위시로 사람파를 제거했던 수법과 유사한 모략이었다.

나뭇잎 대신에 날조한 삐라를 살포하는 선진성에서 달랐다면 달랐다고 하겠다. 조선왕조는 이 때의 개혁기회를 놓치고 얼마 후 임진왜란을 겪었고, 대한제국은 7년 후 을사늑변과 12년 후 국치로 이어졌다. "개혁의 기회를 놓치면 역사는 보복한다"는 말은 시공을 초월한다.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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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친러수구파 정권이 '관변단체'인 황국협회와 보부상들을 끌어들여 만민공동회장에 난입시켜 회원들을 폭행하고, 고종이 군대를 동원하여 보부상과 합동작전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들을 폭행ㆍ검거케 하였다.

고종은 12월 25일 11가지 죄목을 들어 이들 두 단체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다.   430여 명의 간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짧은 기간의 활동과 비참한 종말을 맞았지만, 이후 의병운동, 독립운동, 민주공화제 수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정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당장 서재필과 개화파 인사들은 위기로 내몰렸다.

수구파들은 독립협회의 전제정치를 지양하고 민주정치를 세우자는 독립당을 잡으라고 남대문에 방(榜)까지 써 붙이었다. 그리하여 이상재, 남궁억, 정난교 이하 17명은 경무청에 잡히어가고 윤치호, 정교, 이근호, 최정덕, 윤학주 씨들은 선교사 아펜샐러 댁에 숨어서 피난하였다. 선생과 이승만, 이동녕, 이갑, 양기탁, 신흥우, 유일선 동지들은 분개하여 가두연설로 군중을 격동시키어 수만의 군중은 평리원(平理院, 지금의 고등법원과 같음) 앞으로 물리어 가서 독립당원들을 내어놓으라고 한 큰 시위운동을 하였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의 시초였다. 이 때문에 특별 은사령이 내리어 그들은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승만, 이동녕, 양기탁, 신흥우 동지들과 합력하여 간신의 무리를 공박함은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것이 서재필 박사가 내어 쫓기게 된 까닭이었다. 수구파는 다시 선생과 이승만, 이동녕, 신흥우, 양기탁 여러 신진들을 잡아 경무청에 가두었다. 그러하나 잡히기 전에 미리 약속한 남은 동지들은 이구동성으로 잡힌 이들은 주모자가 아니니 책임이 없다고 하여 수십 일만에 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옥에서 나온 선생은 감옥에 있는 동지들을 구하여 내려고 만민공동회를 강화하였으나 내어 놓지 않으므로 이승만 동지에게 권총을 옥중에 던져 드리고 탈옥하기를 종용하였다. 그리하던 참에 또 황제의 특사령이 내리어 옥중 동지들이 놓이게 되었다. (주석 11)


여기서 말하는 '선생'은 주시경을 일컫는다. 먼저 풀려난 주시경은 구속된 이승만에게 권총을 구입하여 차입하면서 탈옥하기를 종용하였다고 한다.


주석
9>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105쪽, 프로네시스, 2007.
10> 신용하, 「만민공동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620~621쪽.
11> 『나라사랑』제4집, 220~22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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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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