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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에 이어, 이번에는 '상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숭실대학교 - ②부부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집 터 - ③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과 자택 - ④상도동 철거투쟁의 현장 - ⑤현대판 송덕비 <동작을 빛낸 인물> - ⑥복개천(상도천, 대방천) - ⑦장승배기 장승 - ⑧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
  
단식 중인 김영삼(1983년 5월) 신군부의 강압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이하여 5.18영령들을 추모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 단식 중인 김영삼(1983년 5월) 신군부의 강압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이하여 5.18영령들을 추모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 김영삼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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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에 맞서 분투한 김영삼과 상도동계의 근거지

지하철 7호선 상도역 사거리에서 한강 방면을 바라보면 상도터널이 보인다. 그 상도터널 근처에 1970, 19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업적을 기리는 '김영삼 대통령기념도서관'이 있다.

당시 야당에는 김영삼(1927~2015)과 김대중(1924~2009)의 경쟁이 치열했는데, 김영삼을 따르는 사람들은 상도동계로, 김대중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교동계로 불렀다. 말하자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은 1970, 1980년대 '고난의 시기'에 상도동계의 활동 근거지였던 셈인데, 지금은 서울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놨다.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의 명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는 서울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의 명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는 서울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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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최연소 국회의원 김영삼, 이승만의 3선개헌을 비판하며 '야당의 길' 걷다

김영삼은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김영삼은 여당인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인 거제에서 당선했다.

그런데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3선개헌을 시도하자 이에 맞서 자유당 의원 20여 명과 함께 3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김영삼은 당시 상황에 대해 <김영삼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백산서당)에서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9월 초순경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자유당의 2인자이던 이기붕씨가 나하고 김철안(金喆安), 김상도(金相道) 의원을 데리고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景武臺)로 갔다. 우리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승만 박사가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李) 박사한테 간곡하게 말했다.

"박사님, 삼선개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삼선개헌만 안 하시면 박사님은 위대한 국부(國父)로 역사에 영원히 남으실 겁니다."

순간 이(李) 박사의 안면근육이 실룩이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이기붕은 전혀 예상 못했던 내 직언(直言) 때문에 한참 당황해하다가 볼멘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김 의원, 왜 그런 말씀을 드려?"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투표의원 202명(양일동 의원은 투표 반대) 중 찬성 135표(반대 60표, 기권 6표, 무표 1표)로 의결정족수 136표에 1표가 모자라 부결됐지만, 하룻밤 사이에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가결을 선포하여 통과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 파동이다.
  
김영삼은 이를 계기로 야당인 민국당과 무소속, 자유당을 탈당한 의원 60여 명이 결성한 원내교섭단체인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김영삼은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을 최고위원으로 하고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새롭게 결성된 민주당에서 중앙당 청년부장과 경남도당부위원장을 맡는다.

김영삼은 1956년에 이승만이 동양 최대의 동상을 남산에 세우자 이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UP통신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거대한 동상 2개와 1개의 기념비가 건립됐는데, 이에 소요된 경비는 40만 불(달러) 이상에 달한다" "동 금액으로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1개월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던 것이다(<경향신문>, 1956. 8. 25.).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독재경향을 우려>하며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한 김영삼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6세의 최연소 당선자가 되었다. 자유당 소속이었던 김영삼은 1956년 이승만의 삼선개헌 추진에 반발하여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독재경향을 우려>하며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한 김영삼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6세의 최연소 당선자가 되었다. 자유당 소속이었던 김영삼은 1956년 이승만의 삼선개헌 추진에 반발하여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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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사정권에게 초산 테러까지 당하다

이러한 김영삼의 태도는 5.16쿠데타 직후에도 쿠데타 자체에 대한 강한 거부감 속에 공화당 창당 참여 요구를 거절하면서 야당의 길을 걷도록 만든다. 김영삼은 야당인 민정당 대변인으로 활약하면서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에 맞서 야당 후보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 등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

김영삼이 상도동에 정착한 것은 1969년 3월이었는데, 원내총무 시절이던 1969년 6월 업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상도동 자택 입구에서 초산테러를 당한다. 상도동 집 입구 도로에서 옥신각신하는 쇼를 하던 3명의 괴청년이 김영삼이 탄 차량을 막은 후 초산을 들고 차량으로 돌진한 것이다.

초산은 살에 닿으면 순식간에 파고 들어가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다행히 차량 문을 잠궈 초산이 얼굴에 뿌려지는 끔찍한 일은 면했지만, 괴청년이 차량에 뿌린 초산은 차량 페인트를 다 녹아내리게 할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 초산테러는 김영삼이 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음모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앙정보부를 '국민의 원부(怨府)'라고 비판한 데 따른 중앙정보부의 보복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당시 <국회 속기록>(제70회 제2차 국회본회의, 1969. 6. 13.) 속 김영삼의 발언을 보면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심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 의원은 이 3선개헌음모는 제2의 '쿠데타'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입니다. 5.16쿠데타에 이어 다시 제2의 쿠데타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입니다.

5.16 후에 소위 말하는 혁명정부에서 내놓은 책자에 보면 민주당정권이 수립되고 1주일 후부터 '쿠데타'를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나와 있습니다. 자기네들이 쓴 책 속에 있어요. 그렇다면 합헌적으로 수립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정권욕에 사로잡혀서 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소위 혁명공약이라고 하는 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민정에 복귀해 가지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고, 스스로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을 다시 고쳐서 대통령이 되겠다,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자기 손으로 만든 그 헌법을 또 고쳐 가지고 대통령이 되겠다 합니까? 언어도단이에요. 다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신 대통령이 되는 길을 터놓자는 것이에요.

4.19의 생생한 역사가 남아 있고 그 피가 지금 채 마르기도 전에 우리의 사랑하는 어린 동생들이 피 흘려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어 갔고, 그 피자욱이 아직 남아 있어! 그때 피해를 입은 우리의 젊은 청년들이 병원에서 아직까지 신음하고 있는 이 시간에 감히 이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말입니까? (중략)

중앙정보부는 우리 국민의 원부(怨府)요, 증오의 대상이요. 위로는 장관으로부터 밑의 말단 면서기에 이르기까지 공무원들은 물론 우리 국민들 전부가 중앙정보부 때문에 못살겠다는 거예요. 몸서리를 쳐! 이 뭐하는 데야요. 도대체 이 중앙정보부 때문에 친구들끼리 제대로 얘기도 하지 못해. 중앙정보부가 하는 일이 도대체 뭐예요. (중략)

야당사찰, 야당분열, 또 비위에 안 맞는 여당의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전화도청, 언론탄압, 사전검열 요따위 짓만 하고 있다 말이야. 이 중앙정보부의 검은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다 말이야.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사법부, 입법부에까지 이 중앙정보부의 검은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어. 이것이 고쳐지지 않는 한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야, 독재주의 국가지."

 

실제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신이 즐겨 찾던 지금의 서울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서울컨트리클럽(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난 고흥문 당시 신민당 사무총장의 배를 손가락으로 푹 찌르면서 "김영삼이 배때기에는 칼이 안 들어가나!"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영삼 회고록1>, 281쪽).

김영삼이 초산테러의 직접적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습관대로 항상 문을 안에서 잠그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한손에 뭔가를 들고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는 괴한을 본 순간 테러를 직감한 김영삼은 "수류탄이다, 차를 빨리 몰아!"라고 소리쳤고, 운전기사도 급히 차를 몰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수사본부까지 차리고 범인을 잡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중앙정보부에서 벌인 일의 범인이 잡힐 리 만무했다.

  
김영삼에 대한 초산테러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 1면 톱기사(1969. 6. 21)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에 대한 초산 테러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범인을 잡기 위해 100만원이라는 거금의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벌인 일이어서 끝내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
▲ 김영삼에 대한 초산테러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 1면 톱기사(1969. 6. 21)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에 대한 초산 테러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범인을 잡기 위해 100만원이라는 거금의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벌인 일이어서 끝내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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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5.18 3주년 맞아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투쟁에 돌입

김영삼의 수난은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에 이어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도 계속된다. 정계 은퇴를 강요받고 정치활동 금지조치를 당한 것에 더해 두 차례 가택연금까지 당한다. 김영삼은 상도동 집에서 늘 경찰의 감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 김영삼이 1983년 5월 18일에 큰 결단을 한다. 김영삼은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단식에 즈음하여'를 발표한 후,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23일간의 단식농성을 벌인다.
 
"나는 오늘 국민에게 밝힌 나의 뜻을 분명히 하고 민주투쟁에 대한 나의 결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단식에 들어감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의 단식은 5.17군사쿠데타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부정당함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백 수천 명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며, 비극적인 광주사태로 목숨을 잃은 연혼과 거기서 희생된 민주시민들과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기회이며, 동시에 반민주적인 독재권력의 강화와 인권유린 및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표시이자,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나마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나의 정치적 요구의 표시입니다. (중략)

나는 이번 단식투쟁에서 나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나 하나의 생명을 바쳐 이 나라의 민주화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나의 최후의 봉사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민주화투쟁을 더욱 굳건히, 그리고 더욱 튼튼한 신념으로 해 나아가기 위하여 이번 단식투쟁을 하는 만큼, 나는 이 단식으로 민주화투쟁에 대한 나의 움직일 수 없는 결의를 나 자신과 국민에게 분명히 하는 바입니다.

나에 대한 어떠한 소식이 들리더라도 그것에 연연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결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호소요 당부입니다."
 
이러한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외신에 크게 보도됐다. 하지만, 보도통제로 국내언론에는 보도되지 않는다. 단식 사흘째 되는 5월 20일 <동아일보> 정치 가십란에 '정세흐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토막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최근의 '정세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19일부터 신경을 쓰는 눈치. 민한당의 유치송 총재 등 당간부들은 이 흐름을 관심 있게 관망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에 대한 당 차원의 논의까지는 생각 못하고 있으며, 유총재는 19일에는 당사에 나오지 않았고, 20일에는 지역구에 귀향."

김영삼은 단식농성 8일째인 25일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됐음에도 계속됐고, 문익환 목사, 함석헌, 홍남순의 동조 단식농성과 학생들의 지지시위로 이어진다. 김영삼은 단식 23일 째인 6월 9일 '단식을 중단하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중략)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그 언젠가 국민과 더불어 '민주주의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을 갈 것입니다."

이 일로 김영삼의 비서로 있던 김덕룡이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하지만, 결국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연합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만들어내는 발판이 됐다. 또한,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선명 야당의 기치아래 신민당을 결성해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된다.

이후 신민당은 민한당을 흡수한 야권통합을 일궈내고 '직선제 개헌'을 전면에 내걸면서 6월 민주항쟁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5.18진상규명요구 단식농성 현장을 방문한 김영삼(1985) 김영삼이 1985년 5월 17일 5.18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통련(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의 단식농성장을 김대중과 함께 방문하여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 5.18진상규명요구 단식농성 현장을 방문한 김영삼(1985) 김영삼이 1985년 5월 17일 5.18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통련(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의 단식농성장을 김대중과 함께 방문하여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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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집을 턴 도둑, 누가 보낸 도둑이었을까

1985년 2.12총선을 승리로 이끈 이후에도 김영삼의 수난은 그치지 않는다. 그해 3월 6일 '가택연금 전면 해제'가 이뤄지면서 김대중이 김영삼 집을 방문(1985. 3. 22)해 함께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아연 활기를 띄었다. 하지만, 곧바로 20대 청년으로부터 "김영삼을 저격하겠다"는 협박전화를 받기도 하고(1985. 4. 18), 군 정보사(당시 사령관 이진삼)의 지시로 만들어진 테러단에 의해 집이 몰래 털리면서 명함과 탁상용 일기, 녹음 테이프 등을 절취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이들은 취객을 가장해 같은 해 10월 신대방동에 살던 양순직 신민당 부총재의 이를 부러뜨리는 테러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건 발생 8년이 지난 1993년에야 밝혀지는데, 정보사 사령관 이진삼의 지시로 북파공작원 출신 4명이 김영삼 자택의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 그와 같은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노린 것은 김영삼의 정치자금 리스트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삼의 약점을 잡아 협박용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1986년 신민당의 개헌투쟁이 본격화하면서 다시 시작된 김영삼의 가택연금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에나 명실상부하게 해제됐다. 

'5.18특별법' 제정하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하다
 
전두환-노태우의 재판 소식을 전하는 당시 언론(1996. 8. 27)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노태우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 전두환-노태우의 재판 소식을 전하는 당시 언론(1996. 8. 27)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노태우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 언론보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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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면서 3당합당(민정+민주+신민주공화=민자당)에 참여한 김영삼은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문민정부를 표방하면서 하나회 척결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특히 라이벌 김대중과의 신경전 끝에 제정한 '5.18 특별법'과 전두환·노태우의 구속 조치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세기의 대결 벌인 김대중-김영삼... '집회 명소'였던 그 공원> 참조).

최근 자유한국당 당대표 선출과정에서 터져나온 '5.18 폄훼 사건'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5.18 특별법 제정, 전두환·노태우 구속, 국가기념일 제정 등이 김영삼이 대통령 시절에 취한 조치라는 점에서 자유한국당의 우경화 정도가 아니라 극우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후대에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 자유한국당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는 등 김무성은 물론 심지어 서청원에 이르기까지 모처럼 대동단결해 자유한국당의 5.18민주화운동 폄훼 사건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1970, 19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싸워온 YS와 상도동계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쉽게 이해가는 대목이다.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다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 상도역 근처 상도터널 왼편에는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이 있다.
▲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 상도역 근처 상도터널 왼편에는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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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터널 입구에 있는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은 2012년부터 공사가 진행돼 이미 준공해놓고도 자금난 등으로 8층에 (사)김영삼민주센터가 들어서 있을 뿐, 한동안 열지도 못하고 있었다. 2017년 말에는 김영삼의 고향인 경남 거제시가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려 조만간 개관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거제시가 서울에 있는 건물을 관리한다는 게 어색한 상황이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2018년 8월에는 동작구청이 인수해 2019년 5월에 개관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언론에 등장하더니 2019년에 들어서면서 동작문화재단이 기념도서관 건물에 입주하고 창립행사를 하는 등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은 사료관과 전시관으로, 3층은 도서관으로 쓰일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 김영삼의 고향 거제에는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도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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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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