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위당 장일순 선생
▲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 무위당 사람들

관련사진보기

 대를 이어가면서 군사독재가 활개치는 한국사회에서 장일순은 저항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많은 사람ㆍ계층ㆍ단체와 연대하고 역량을 키웠다. 연약한 개인이 포악한 정권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연대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방법은 비폭력저항을 택하였다. 간디와 비노바의 길이고, 그가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은 해월 최시형의 생명사상이 원천이었다. 

박정희는 마지막 도박을 강행하였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대만(타이완)의 총통제를 명칭만 바꿔서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그에게는 헌법이고 나발이고 안중에 없었다. 오직 권력, 그것도 절대권력만이 요구되었다. 

유신정변과 이후 잇따라 선포한 긴급조치로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끌려가고 고문을 받고 학교와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다시 고난의 시대 고통 받는 사회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잡혀가고, 감옥을 마구 지었던지, '전국민의 죄인화', '전국토의 감옥화'라는 말이 나돌았다. 

1972년 여름 남한강 유역의 큰 홍수로 이 지역 주민들이 엄청난 재해를 입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집이 떠내려가고 농경지가 매몰되는 등 보기 드문 재난이었다. 정부의 지원은 형식적ㆍ일시적으로 그치고 말았다.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수해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지학순 주교가 세계 가톨릭에 지원을 호소하고, 특히 독일 가톨릭 재단에서 한화로 약 3억6천만 원을 지원했다. 당시에는 거액이었다. 이에 따라 장일순과 지학순은 재해민 지원의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였다. 

우선 실태 파악을 위해 현지 조사를 실시한 후 구체적으로 지원을 시작했다. 지원에 앞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여름에 수해가 났기 때문에 이듬해 수확기까지 먹을 게 없으므로 식량 지원을 최우선으로 한다. 

둘째, 수해로 소실된 농토를 복구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다. 

셋째, 농민의 소득원을 개발한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수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재해를 당한 농민들이 그 모든 작업 과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지원을 하되 품삯이란 명목으로 농민들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의도였다. 

절망에 빠진 농민들이 스스로 자립 의지를 다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마을 단위로 동일한 작목을 할 수 있는 생산 협동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계도하고 지원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농민들은 열성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자율적인 토론을 통해 여러 사안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고 협동했다. 두레, 품앗이의 전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대표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원주에 모여 그간에 진행된 활동 상황이나 결과 등을 서로 보고하고 점검했다. 이때 청강(장일순)은 항상 그 모임에 나가 농민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격려했다.
(주석 1)

장일순은 활동범위를 점차 넓혀나갔다. 세상이 변하고 경제가 발전해도 가난과 각종 재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는 민초들의 생활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이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이 협동조합운동이고 사회의 민주화에 있음을 거듭 헤아린다. 

장일순의 성육고등공민학교 제자로서 40여 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언론인 출신 한기호 씨가 지켜본, 이 시기 재해대책사업 관련 증언이다.

무위당 선생님은 1965년 교구창설과 함께 지 주교님을 만나게 되는데 지 주교님과의 만남은 정말 잘 맞은 것이고 인생으로 치면 홈런을 치는 계기를 맞으신 거지요. 무위당은 주교님에게 꼭 필요한 분이었고 또 서로가 잘 맞은 거예요. 그리고 교구청 재해대책 사업할 때 선생님이 처음으로 큰 일을 벌이신거라고 할 수 있어요. 가장 힘을 쏟아 일하신거지요. 

이경국ㆍ박재일 형제들과 함께 평소 생각하신 일을 성취하시고 그런 때였어요. 당시 한참 좌절하고 그러실 때였는데 재해대책 사업을 하게 되니까 정열을 쏟으셨어요. 선생님이 구상하신 일을 하게 되어 선생님의 꽃을 피운 것이지요. 그때도 공식 직함은 안 가지셨는데 그 양반은 그래서 영원한 야인이라고 생각해요.
(주석 2)

재해대책사업이 성과를 내면서 원주를 비롯 강원도 내에 신용협동조합이 여러 곳에 설립되고 농민들은 연대를 통해 농가의 생산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일종의 자치적인 모임이고 연대였다. 장일순은 조합원들에게 사람 중심, 신뢰, 민주적 운영, 기금운영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게 리드하였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신협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협동조합운동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농촌과 광산촌에 신용협동조합이 74개나 생겨났다. 3개 도, 13개 시군, 47개 읍면, 129개 리(里)와 17개 광업소가 사회개발위원회(재해대책사업위원회의 후신)에 참여했다. 

신협, 소협(소비자 협동조합)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생활협동조합의 추진도 결정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좀 더 넓은 단위를 아우르는 지역협동조합운동도 일어났다.

청강은 우주 천지만물이 모두 한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협동적으로 존재할 때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주의 모든 생명들의 존재 법칙인 협동과 공생을 민중이 본받고 실천하여, 자본가에 대한 경제적 약자의 대항 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주석 3)


주석
1> 이용포, 앞의 책, 114~115쪽.
2> 권영문, 대담, <모든 것 다 주고 모든 것 다 얻은 분>, <무위당 사람들>, 33호. 
3> 앞의 책, 12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협동조합운동, #신협, #장일순, #지학순 주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