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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멀리 일월산(1,217m)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백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멀리 일월산(1,217m)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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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21구간 산행은 사정이 있어 산악회와 함께 하지 못하고, 한 주 당겨서 미리 다녀왔습니다. 제가 혼자 떠나는 게 미덥지 못했는지 아내가 따라 나섰습니다. 남편이 혼자 산행하는 것을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이 따뜻하긴 했지만, 저는 오히려 아내 때문에 걱정이 컸습니다.

이번 구간은 21㎞가 넘는 장거리인데다가 봉우리도 수없이 넘는 터라 산행에 그리 능숙하지 못한 아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최종적인 판단을 아내에게 맡겼는데, 남편을 혼자 보낼 때의 걱정 > 본인이 산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이렇게 판단했는지 결국 저를 따라 산행에 나서게 됐습니다.

산행 종료 지점인 영양 검마산자연휴양림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미리 불러 둔 영양 개인택시를 타고 출발 지점인 아랫삼승령으로 이동합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시간만 해도 40분이 족히 걸립니다. 아내의 표정이 무척 긴장되어 있습니다. 아랫삼승령 고갯마루까지 험한 고갯길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부부 사이에 무거운 정적마저 감돕니다.

아랫삼승령을 출발하자마자 가다바리버섯 무리를 만났습니다. 참나무에서 자라는 가다바리버섯은 돼지고기 볶을 때 함께 넣으면 맛있다고 합니다.
 아랫삼승령을 출발하자마자 가다바리버섯 무리를 만났습니다. 참나무에서 자라는 가다바리버섯은 돼지고기 볶을 때 함께 넣으면 맛있다고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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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삼승령에서 우리를 내려 준 기사님은 요금 5만 원을 손에 쥐고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갯길을 내려갔고, 밝은 웃음 뒤의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 부부에게 드리워졌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이제는 걸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내딛으며 산을 넘고 고개를 지나서 차가 서 있는 검마산자연휴양림까지 21㎞ 넘는 고난의 산행을 해야 합니다.

♤ 낙동정맥 21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9월 2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양군, 영덕군, 울진군
날씨 / 구름 많고, 기온은 20~24도여서 비교적 시원한 날씨
산행 거리 / 21.3㎞
소요 시간 / 10시간 15분
산행 코스(북진) / 아랫삼승령 → 굴바위봉(삼승령) → 윗삼승령 → 매봉산 → 백암산 → 임도 → 갈미봉 → 검마산자연휴양림
동행 / 아내와 함께

애써 침착해 하며 첫 발을 내딛습니다. 제가 앞장을 서고 아내는 뒤에 따라옵니다. 아내가 뒤처지지 않고 따라올 수 있도록 저는 걷는 속도를 한껏 낮춥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산행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올라갈 때는 숨이 차서 힘들고, 내려갈 때는 넘어질까 봐 조심스럽습니다. 아내와 저 사이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지려 합니다. 평지 길은 자신 있다고 하는데, 오늘 산행 구간에 평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랫삼승령에서 올라간 봉우리에 삼승령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봉우리에 고개 이름을 붙이는 건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아랫삼승령에서 올라간 봉우리에 삼승령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봉우리에 고개 이름을 붙이는 건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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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에 붙은 고개 이름

아랫삼승령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첫 번째 봉우리에 오릅니다. 봉우리에는 삼승령(748.5m)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삼승령은 분명히 고개 이름이고,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아랫삼승령과 좀 더 가면 나타나는 윗삼승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고개 사이에 있는 봉우리를 또 삼승령이라고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산행을 하다 보면 봉우리에 '○○령'으로 고개 이름을 붙인 경우가 간혹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21km를 가야 하는 산행 길인데... 고작 4km쯤 와서 이런 자세가 나타나니 과연 오늘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21km를 가야 하는 산행 길인데... 고작 4km쯤 와서 이런 자세가 나타나니 과연 오늘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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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삼승령을 지나 매봉산에 오릅니다. 날개를 쭉 펼친 매의 모습이어서 매봉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산이 가파른 만큼 아내의 속도는 뚝 떨어집니다. 매봉산 정상에 오른 뒤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노라니, 이제 겨우 4㎞쯤 왔을 뿐인데 과연 오늘 이 산행을 해낼 수 있을지 막막하여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습니다. 북한 핵실험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우리의 곤혹스런 처지처럼 산행을 시작한 우리 부부에게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옵션이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그저 한 걸음씩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요.

매가 날개를 펼친 모습이어서 매봉산인데, 잘 보니 실제로 매가 날개를 쫙 펴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매가 날개를 펼친 모습이어서 매봉산인데, 잘 보니 실제로 매가 날개를 쫙 펴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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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산에서 내려올 무렵, 오랜 기간 산행에서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푸~ 푸~"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요. 아주 가까이에서 짐승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들립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섭니다. 얼음 땡, 할 때처럼 제자리에서 몸이 딱 얼어붙습니다.

"푸~ 푸~"
또 들립니다. 쉬익쉬익~ 제 호흡이 가빠집니다. 두 다리가 얼어붙은 자세로 공포에 질린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면서 저 소리의 정체를 찾으려 애씁니다.

11시 방향으로 20m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짐승이 포착됩니다. 멧돼지입니다. 색깔은 희끄무레하고 덩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20m쯤 떨어져 있는데 "푸~" 소리는 바로 앞에서 나는 것처럼 스테레오로 들립니다. 그것도 녀석의 기술인지 모릅니다. 콧김 소리로 겁을 주려는 기술 말이지요.

난생처음 멧돼지를 만나다

숨을 죽이며 놈의 동태를 살핍니다. 앞쪽으로 몇 m 걸어가던 놈은 "푸~ 푸~" 하며 다시 섭니다. 놈도 우리의 동태를 살피는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숲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필 사라진 방향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눈을 크게 뜨고 놈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합니다.

요 며칠새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헤치며 가다 보니 이런 거미 터전을 수도 없이 망가뜨립니다. 거미에게는 참 미안한 일입니다.
 요 며칠새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헤치며 가다 보니 이런 거미 터전을 수도 없이 망가뜨립니다. 거미에게는 참 미안한 일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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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서 있기만 할 수는 없어서 살살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놈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자연히 걸음이 빨라집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뒤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뒤를 돌아보는데... 이런! 아내가 제 뒤에 바짝 붙어 쫓아옵니다. 스틱으로 제 발을 건드릴 만큼 바로 붙어 있습니다. 제가 속도를 좀 내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쉬지도 않고 3㎞ 거리를 쭉 빠져나갔습니다.

"당신도 아까 엄청 무서워하던데……."
아내가 이제 좀 살 만한지 저를 놀립니다.

"그럼… 나도 무섭지. 나도 멧돼지와 마주친 건 처음이거든……. 그런데 멧돼지도 우리가 무서운 거야. 그러니 도망가면서 눈치를 살피는 거지."
멧돼지도 사람이 무서웠을 거라면서, 마냥 나만 무서웠던 건 아니라고 쫀쫀하게 자위를 해 봅니다.

어수리가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이름은 어리숙하지만 꽃은 아주 정교하게 피어납니다. 비숫하게 생긴 꽃이 더러 있지만, 어수리는 꽃 무리마다 가장자리에 있는 꽃이 안쪽 꽃보다 더 큰 걸로 구분합니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습니다.
 어수리가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이름은 어리숙하지만 꽃은 아주 정교하게 피어납니다. 비숫하게 생긴 꽃이 더러 있지만, 어수리는 꽃 무리마다 가장자리에 있는 꽃이 안쪽 꽃보다 더 큰 걸로 구분합니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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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긴장감에서 좀 벗어날 무렵 우리는 백암산 갈림길까지 왔습니다. 백암산은 낙동정맥 마루금에서 400~500m 정도 벗어나 있지만, 우리나라 200대 명산에 든다고 하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멧돼지에 쫓겨 지친 아내를 쉬게 하고 저만 다녀오기로 합니다.

200대 명산 백암산에서 주위를 조망하고

서둘러 오른 백암산 정상에서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중년 커플이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백암산은 해발 1천 m가 넘는 산이라 사방으로 넓게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좋습니다. 동해바다와 우리가 밟아 가는 낙동정맥 산줄기가 선명하게 보이고, 멀리 일월산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산줄기가 지평선 끝까지 꿈틀거리며 펼쳐집니다. 얼른 사진을 찍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보나마나 혼자서 무서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백암산은 흰 바위가 있는 산입니다. 백암산 정상 오른쪽 경사면으로 흰 바위가 보입니다.
 백암산은 흰 바위가 있는 산입니다. 백암산 정상 오른쪽 경사면으로 흰 바위가 보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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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에서 서둘러 내려오는데 "컹~ 컹~" 웬 개 짓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깊은 산속에 웬 개 소리가 날까, 의아해 하며 뛰다시피 산길을 내려옵니다. 아내가 있는 곳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여보~ 어디 와요~" 하는 아내의 외침이 들립니다. "어~ 다 왔어~" 하고 가 보니 역시 아내는 겁에 질려 서 있습니다. 내게는 개 짓는 소리만 들렸는데, 아내는 개 짓는 소리에 앞서 멧돼지가 "푸~ 푸~" 하는 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 멧돼지가 나타나면 올라가려고 나무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배낭을 들쳐 메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갑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오르내린 산길이 또 3~4㎞는 될 듯합니다. 힘이 빠질 때마다 멧돼지가 뒤에서 몰아붙이는 모양새입니다. 영화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배가 난파되어 주인공이 구명보트에서 벵골호랑이와 함께 여러 날을 지낸 이야기를 엮은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입니다. 표류 당시를 회고하며 주인공이 말합니다.

"호랑이가 없었으면 아마 저는 죽었을 거예요."
호랑이와 동거하며 끊임없이 긴장하고 정신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내에게는 멧돼지가 호랑이였습니다.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꽃을 피운 이놈들은 잎이 단풍잎처럼 생긴 단풍취입니다. 봄에 나는 잎은 맛있는 나물입니다.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꽃을 피운 이놈들은 잎이 단풍잎처럼 생긴 단풍취입니다. 봄에 나는 잎은 맛있는 나물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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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봉을 지나 임도를 만났습니다. 여기서 다시 산으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데, 어떡하다 보니 산줄기 옆으로 따라가는 임도를 걷게 됩니다. 임도나 산줄기나 걷는 거리는 비슷할 것 같지만, 그래도 임도가 산줄기보다는 오르내림이 덜할 것이니 체력이 이미 바닥난 아내에게는 다행이다 싶습니다.

임도와 낙동정맥 마루금은 갈미봉을 앞두고 다시 만납니다. 마지막 힘을 내어 갈미봉에 오른 뒤 검마산자연휴양림을 향해 하산을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산이 더 힘들고 위험합니다. 무릎이나 발목에 가해지는 압력이 내리막에서 훨씬 심하고, 자칫 발을 헛딛어 자빠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힘도 정신도 다 빠져나간 아내에게 "힘 내… 다 왔어" 하며 응원해 보지만 효과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숲에서 흔히 만나는 하찮은 풀이지만, 석양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제법 화사해 보입니다.
 숲에서 흔히 만나는 하찮은 풀이지만, 석양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제법 화사해 보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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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내리막길을 해가 진 깜깜한 밤에 랜턴을 켠 채 내려오려니 급한 마음과 달리 걸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이때 필요한 덕목은 인내입니다. 참고 또 참는 것입니다.

밤 8시가 다 되어 휴양림에 도착합니다. 여기저기 텐트도 보이고 불빛 아래 밥을 해 먹거나 어른 아이 어울려 웃고 떠들며 놀고 있습니다. 그제야 아내 표정도 밝아집니다. 하루 힘들었던 산행이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무사히 하산한 게 거의 기적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 산행 후기

산행 도중에 아내와 이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친구는 서서히 줄어든다. 만남의 간격이 멀어지면서 잊히기도 하고, 가끔은 세상을 먼저 뜨기도 한다. 그런데 새 친구를 사귀는 일은 쉽지 않다. 감성이 퇴색해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친구들과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만나자. 새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옛 친구를 잃지 않는 게 더욱 중요하다.'

결심 21 / 새 친구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지금 제 곁에 있는 친구를 더욱 소중히 대하려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맨 뒤에 있는 산행 후기와 결심 부분은 박스 안에 넣든지 해서 본문과 구별되게 처리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태그:#낙동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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