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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는 건 완전히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경험이다. 가끔은 실망스런 순간도 없지 않지만 굳어 있는 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잊지 못할 만남도 그곳에 있다. 얼마 전 내게도 그런 만남이 있었다. 아민 말루프라는, 이 책을 펴기 전에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작가의 작품이 그 귀한 순간을 선사해줬다.

내가 그의 세계를 만난 건 다른 많은 일처럼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했다.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다 항해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사표를 던진 뒤 낯선 도시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나는 틈날 때마다 배나 항구와 관련한 이야기는 무엇이든 찾아 읽던 중이었다.

책 표지
▲ 동방의 항구들 책 표지
ⓒ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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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배를 몰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해사란 직업에 매혹되었으나 감상만큼 아는 게 없었던 만큼 어떻게든 지식을 넓히자는 취지였다. 빠듯한 교육 과정 가운데 읽는 책이니만큼 소설이라면 더할나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동방의 항구들>과 만났다.

소설 속 '나' 역시 우연처럼 필연처럼 '그'를 만났다. 1976년 6월 파리의 지하철 안에서였다. 나는 그를 알아본 걸 순전히 우연한 일이라고 회상했으나 완전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몇해 전 학교에서 헤질 때까지 읽고 또 읽은 역사교과서에 그의 사진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 중에 중동의 몇몇 젊은이가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영웅으로 환대받았다는 설명과 함께.

다시 몇 가지 우연과 필연이 겹쳐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는 나흘 동안 기구했던 지난 삶을 풀어놓는다. 이 소설은 그가 말하고 화자가 받아 적은 한 사람과 한 사랑의, 그리고 쇠락한 제국과 '중동'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노인의 이야기는 이스탄불로부터 시작한다. 수많은 대사건을 겪은 유서 깊은 도시에 한 제국이 있었고 그 제국의 군주는 조카에게 왕권을 빼앗긴 뒤 자살한다. 그의 자살을 목격한 딸은 그만 미쳐버리고 만다. 그 딸, 그러니까 쇠락한 황실의 정신 나간 공주가 소설 속 '나'가 만난 주인공 오시안의 할머니가 된다.

"한 인간의 삶이 그의 출생부터 시작한다고 확신하시오?"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 오시안의 회고는 나흘 동안 이어진다. 그의 삶은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 몰락한 황실의 비극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비극이 터키에서 보낸 독특한 유년시절에 영향을 주고 그 유년시절이 청년기로, 그리고 다시 중년기로 이어진다.

그동안 오시안의 삶은 터키와 파리, 베이루트와 하이파, 다시 파리를 오간다. 제국은 몰락하고 2차대전이 발발하며 중동의 화약고가 폭발하고 6.8혁명이 일어난다. 모든 걸 얻은 듯했던 삶은 예기치 않은 곡절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고 시간은 덧없이 덧없이 흘러만 간다.

그가 겪은 사건 하나하나를 되짚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절망은 깊고 시련은 길지만 운명은 끝내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한 편의 위대한 사랑이야기이며, 자기극복의 드라마이고, 차이를 차별로 악화시키는 모든 구분과 압제에 대한 저항적 선언이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역경과 맞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응원가이며, 가끔은 잘못된 방향으로 발길을 들여놓는 역사를 신뢰하는 외침이다.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레바논에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 프랑스로 이주한 작가 아민 말루프는 프랑스어로 중동의 이야기를 쓴다. 책의 원제를 직역하면 <동방의 계단>(Les Echelles du Levant)이 된다. 이는 과거 유럽에서 동방으로 향하며 거쳐가게 되는 융성한 상업도시들을 뜻한다.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스미른과 아다나, 베이루트 등의 도시인데 이들은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각종 문화가 뒤섞이며 융성한 거대한 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 도시가 대표한 중동문화권은 서방과의 분쟁으로 무너져 과거의 영광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이곳에 한때나마 통용되었던 다원적 화합의 정신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아민 말루프가 궁극적으로 이룩하고자 했던 가치가 아닌지 짐작해 본다.

둔한 펜으로 더이상의 해석은 무용할 것이다. 아래, 이 책에서 발췌한 인상적인 구절을 여럿 옮긴다. 눈이 있는 독자라면 이들을 읽어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충분히 알아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간의 끝없는 싸움에, 어쨌든 피를 토할 정도로까지 큰 관심은 없다고 말했소. 선대의 할아버지가 독일 남부 바바리아 출신의 모험가와 결혼한 이후 전통적으로 우리 가문은 늘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동시에 배웠고, 두 나라의 문화를 같게 평가했소. 그리고 내 언어와 사고 체계에서는 점령이나 점령자라는 단어들에 대해 프랑스인이 느끼는 것처럼 즉각적인 반발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말했던 것 같소. 나는 오랜 역사에 걸쳐 지속적으로 점령이 있었던 지역 출신이고, 내 조상 역시 수세기에 걸쳐 지중해 유역을 폭넓게 정복했었으니 말이오. 그러나 내가 혐오하는 것은 특정 인종에 대한 증오와 차별이오. 내 아버지는 터키인이고 어머니는 아르메니아인인데, 두 분이 대량 학살이 벌어지는 가운데서 결혼하실 수 있었던 것은 두 분 다 증오를 거부하셨기 때문이오. 그 점을 나는 물려받았다오. 그게 나의 조국이오. 나는 나치주의를 싫어하며, 나치가 프랑스를 침략한 날이 아닌 독일을 점령한 날을 증오한다오. 나치주의가 프랑스 또는 러시아 또는 내 조국에서 개화했더라도 마찬가지로 나는 나치를 증오했을 것이오.' -97p

'위조서류 작업장에 대해서는 감동적인 추억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오. 그곳은 조용한 개미집과 같은 곳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했소. 단지 서류를 위조하는 일이 다가 아니었소. 절대 권력을 가진 적에 맞서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관리하여 신빙성 있게 만들어야 했소. 자크와 그의 동료들의 세밀한 작업이 없었다면 어떤 저항 운동도 불가능했을 테고, 지하운동 조직이라는 개념조차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럼에도 그들의 이름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오. 최소한의 물질적 또는 정신적 보상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그런 거친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소? 그들 중에는 신을 믿지 않아 내세의 보상조차 바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오.

내가 그들과 함께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느냐고? 그건 그렇소. 자부심을 느낀다오. 단호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소! 전쟁이 끝난 직후, 나는 이따금씩 레지스탕스의 이런 드러나지 않은 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우리가 했던 일들에 대해서 몇 시간이고 세세히 설명했다오. 반면에 나의 '영광스런' 탈주에 대해 몇 번이고 얘기해 달라는 사람들을 만나면 짜증이 났소. 대체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이오? 60미터를 달린 뒤 훌륭한 식사를 했고 천만다행으로 동지를 만났소. 그것으로 난 영웅이 되었소! 하지만 내가 수도 없이 죽음을 무릅쓰고 한 일은 손에 펜을 쥐고서 필체를 위조하고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었소.' -127p

'나치주의가 패배한 직후 히틀러가 증오했던 두 민족이, 각자 자기 민족만이 부당함의 유일한 희생양이고 따라서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일어나 상대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그녀는 참을 수 없어 했소. 유대인은 한 민족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즉 민족 말살 시도를 당했고 따라서 그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결단해야 하기 때문에, 아랍인은 자신들은 유럽에서 자행된 범죄와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자신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잘못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들고 일어섰던 것이오.' -162, 163p

'그렇소, 바로 내 딸애는 이슬람교도이면서 유대인이라오! 그 애의 아버지인 내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이슬람교도이고, 그 애의 어머니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유대인이니까. 우리 관습에 따르면 종교는 부계로 전승되고, 유대인들 관습에서는 모계로 전승되니 말이오. 따라서 나디아는 이슬람교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도이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이오. 딸애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소. 그러나 그 애는 동시에 둘 다를 선택하기를 원했소. 그렇소. 동시에 둘 다를, 그리고 다른 것들도 더 원했소. 자신에게 도달한 모든 혈통을 자랑스러워했소.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 우크라이나, 아라비아, 베사라비아, 아르메니아, 바이에른에서부터 시작된 정복과 후퇴의 모든 여정을 말이오. 그 애는 자신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영혼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선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오!' -261, 262p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포털사이트에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동방의 항구들 / 훗 / 아민 말루프 지음 / 박선주 옮김 / 2016. 12. / 12000원>



동방의 항구들

아민 말루프 지음, 박선주 옮김, 훗(2016)


태그:#동방의 항구들, #아민 말루프, #박선주, #김성호의 독서만세,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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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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