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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기호들
 파리의 기호들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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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기호들은 우리를 들뜨게 한다. 때론 설렘으로, 때론 불안함으로, 때론 안도감으로. 여행 중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색다른 음식, 멋진 건축물과 예술 작품 따위에 감동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느 곳이 되었든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은 기호들이 주는 감동은 오래도록 매우 사적인 경험과 추억으로 기억되곤 한다.

20년 전 처음 파리에 와서 미로 같은 지하철을 타고 어리둥절 헤매고 다닐 때 그 땅 밑에서 가장 반가운 글자는 'Sortie'였다. '출구'라는 말이 그렇게 따뜻한 말인지, 그것을 문자로 표기한 'S,o,r,t,i,e'라는 기호의 배열이 그렇게 매력적인 조합일 수 있는지, 심지어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파랑색이 하얀색 글자들과 어울릴 때 배경 색으로 그렇게 미더울 수 있는지 그 전엔 몰랐었다. 어디가 되었든 낯선 역에 내릴 때면 제일 먼저 'Sortie'를 찾고 엄마 거위 따라가는 아기 거위마냥 무작정 그것을 찾아 따라 나오곤 했다.

이번에도 'Sortie'는 여전히 반가웠지만 물론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파란색 표지판 위의 'Sortie'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스무 해 전 어렸던 날이 바로 어제가 된 느낌이었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호기롭게 떠나오긴 했지만 멀고 먼 낯선 나라에서의 첫 여행에 두려움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등에 짊어진 초보 배낭여행자의 가방은 한달치 생필품으로 무겁기만 한데, 열과 성을 다해 떠나온 몸과 마음은 그보다 열배는 묵직했다. 늘 긴장 속에 헤매고 다니다 일단 '출구'를 찾고 나면 안심이 되곤 했던 그때 기억이 떠올라 혼자 실실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파리의 기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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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라면 노란색이 좀 옅을 것이고, 글자체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부드러운 쪽이었을 것이고, 외국 사람들이야 혼란을 느끼건 말건 외국어 표기는 하지 않을 것이고, 글자에 a가 이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 a의 반복에서 나는 다른 역사, 다른 사고방식의 존재를 느끼며 혼란을 경험한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 )은 <여행의 기술>에서,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 터미널의 천정에 걸려 있는 안내판을 소재로 '이국적'인 것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플러그 소켓, 욕실의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건물 출입문이 밀어서 여는 유형이 아니고 앞으로 당겨야 열리도록 되어 있다든지, 호텔의 창문이 양쪽 옆으로 미는 미닫이 형식이 아니라 유리문의 아래쪽을 밖으로 밀어 열도록 되어 있는 형태라든지, 레버를 위로 올려야 내려가는 욕실 변기라든지, 잡아 당겨야 물이 그치는 샤워 손잡이라든지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국적인 것이 어디 한둘이랴.

이러한 사소한 것들은 모두 다 디자인의 차이 너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갈망해 왔으나 얻지 못했던 어떤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갈망의 문제는 차치하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마주치는 이런 소소한 낯선 장치들이, 뻔할 수도 있는 여행에 이국적인 정취를 더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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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지명에 무심히 들어 있는 숫자들은 파리 사람이 아닌 이에겐 퍽이나 이국적이라서 자꾸만 입으로 말하거나 글자로 쓰고 싶게 만든다. '파리 8구에서 만난 까만 스웨터의 그 남자'랄지, '파리7대학 카페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라든지, '메트로 6과 12가 만나는 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그 악사'라든지 하는 식이다. 거리를 걷다 길모퉁이에서 '5e Arrt'라고 쓰여진 표지판을 만난다거나, 지하철 개찰구에서 작은 동그라미 속에 쓰여진 'M13'을 마주칠 때면 문득문득 '아, 맞아! 내가 지금 파리에 있는 거잖아!' 생각하며 새삼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심지어 파리의 주소 체계를 알고 난 뒤엔, 서울에서 예약한 파리의 호텔 주소 끝에 '75014'라고 붙어 있는 우편번호를 보면서, '75'에서 이미 에펠탑과 센 강을 떠올리고, 끝자리 '14'를 보면서, '흠, 호텔이 14구에 있단 말이지'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이쯤 되면 이미 마음은 바다 건너 저 멀리 센 강의 좌안, 파리 남쪽 14구 골목길 어디쯤으로 날아가 버리고, 머릿속엔 하루 종일 에디뜨 피아프(Edith Piaf, 1915-1963)나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의 샹송이 맴돌아 일하는 내내 흥얼거리게 된다. 어느새 파리의 차가운 가을 밤공기가 코끝에 와 닿는 느낌이 들고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들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건물의 층수를 표기하는 방법도 '이국적'이다. 지상층을 1층으로 시작해 한 층 올라가면 2층, 3층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와 달리, 이 사람들은 지상층은 0층이고, 한 개 층만큼 올라가면 그때부터 1층, 2층, 3층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어색하고 지루한 시간을 때우며 버튼 옆에 층수를 표기한 숫자를 보고 있자면, 인간의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 언어가 세계관을 결정하는가 해묵은 주제가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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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20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를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이라 한다. 파리를 걷다 보면 도로 표지판 맨 위에 '5e Arrt' 등의 숫자와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때 'Arrt'가 바로 이 '구'의 약자이다. 즉, '5e Arrt'는 '5구'라는 뜻이다. 파리 시 한가운데 시테 섬의 일부를 포함해 센 강 변 북쪽 부분, 루브르 박물관과 튈르리 공원 등을 포함하는 1구에서 출발해 마치 달팽이집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뱅글뱅글 돌며 파리 2구, 3구, 4구, 5구 등으로 이어진다.

골목 입구 건물의 모퉁이마다 이 구의 번호와 도로의 이름이 붙어 있어 여행자도 위치를 짐작하기 편리하다. 하지만 문제는, 파리의 골목은 깍두기를 썰어 늘어놓은 네모난 모양이 아니라, 피자 조각 마냥 건물의 각진 부분이 골목 입구를 차지하고 그것들이 방사형으로 이어진 모양새라는 점이다. 어떤 골목이든 그 끝에서는 반드시 두 갈래의 다른 골목길을 만나게 되어 있는데, 이때 선택이 그릇되면 하염없이 목적지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야속한 구조다.

헤밍웨이의 집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 밤, 카디날 르무완 거리에서 지나가던 여인을 붙들고 지하철역을 물었다. 파리에 머무른 동안은 매일매일 길 묻고 길 찾기가 주요 일정 중 하나였던지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는데, 이 여인의 답이 걸작이다.

"파리의 길들은 꽤 트리키하죠? 직선이 마구 엉켜서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예측하기도 어렵고. 아무튼 지금은 조기 앞에 난 길로 쭉 가세요. 가다 보면 첫 번째 교차로에서 큰길을 만날 거예요.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돌면 돼요. 아마 그때쯤이면 작은 정원을 코너에서 만나게 될 텐데, 그 정원을 끼고 돌면 바로 메트로가 나올 거예요. 그게 여기서 제일 가까운 메트로랍니다. 행운을 빌어요!"

나만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게 아니구나! 여인의 명랑한 목소리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친구의 행운이 힘을 발휘했는지 그날은 헤매지 않고 곧장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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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이야기가 나와 말인데, 파리 지명에 오죽 숫자가 많았으면, 퐁네프(Pont Neuf)도 으레 '아홉 번째 다리'라고 잘못 해석되곤 한단다. 프랑스어로 '퐁(pont)'은 '다리'라는 뜻이고 '네프(neuf)'가 '아홉 번째'와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퐁네프는 사실 '아홉 번째 다리(ninth bridge)'가 아니라 '새로운 다리(new bridge)'라는 뜻이다.

줄리에트 비노쉬(Juliette Binoche)의 광기어린 연기로 우리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영화 속 퐁네프는 레오 까락스(Leos Carax) 감독이 촬영을 위해 따로 만든 세트장이었다지만, 실제 다리는 1578년 앙리 4세(Henri Ⅳ, 1553-1610) 때 지어진 것이다. 당시 센 강 위에는 다리가 두 개뿐이어서 교통체증이 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 번째로 놓게 된 다리가 퐁네프란다.

당시에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양편에 벽처럼 집이 세워져 있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이에 비해, 퐁네프는 지금의 흔한 다리들처럼 양편에 건물이 없이 센 강을 시원하게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당시로선 새로운 양식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 '새로운 다리'가 파리 센 강 위에 놓여 있는 현재 남아 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사실. 모든 오래된 것은 한때 새로운 것이었으니! 

파리 퐁네프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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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파리 여행, #숫자, #기호, #아롱디스망, #퐁네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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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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