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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요즘 따라 글이 잘 쓰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마도 이즈음의 세태 탓인가 보다. 헤밍웨이의의 명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미국인 로버트 조던과 스페인 여인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17세기 영국의 성공회 존 던(John Donne) 신부가 쓴 시 '명상 17'의 구절을 인용했다.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어떠한 사람의 죽음도 나를 축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누가 죽었기에 조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결코 사람을 보내지 말라.
조종은 너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까.
이 시는 세상을 좀 더 큰 눈으로 보면, 사람은 인류의 한 분자로 모든 사람의 삶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말해준다. 시인 존 던은 심지어 낯모르는 사람의 죽음까지도 자기 삶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요즘 나라를 어지럽힌 주인공들도 바로 내 이웃이요, 한 사람 건너면 알 수 있는 나와 유관(有關)한 사람이다. 더욱이 미국의 한 주보다, 중국의 한 성보다 훨씬 더 작은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일도 태양은 뜬다

동복을 예쁘게 입은 이대부고 여학생들과 함께 본관 현관 앞에서(1979 12.)
 동복을 예쁘게 입은 이대부고 여학생들과 함께 본관 현관 앞에서(1979 1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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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들어설 때 그를 아주 잘 아는 가까운 지인은 대통령 당선 축하의 덕담보다 "5년의 임기를 채울지 걱정이 된다"라고 염려했다.

연초에 한 제자가 강원 산골에 사는 나에게 전화로 문인인사를 하면서 이화여대 총장에 최아무개라는 사람이 뽑혔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이름조차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답하자 그 제자는 그 언저리 사람을 말하며 이대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다.

두 사람의 기우는 2016년 대한민국 국기를 뒤흔든 문제로 현실화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과 이화여대 총장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막힌 그물코 관계로 동반 추락할 뿐 아니라 나라를, 대학을 아주 수렁으로 빠트렸다.

당신뿐 아니라 소속 집단 사람을 매우 허탈케 했다. 기초가 부실하고, 인문적인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지은 모래성에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 초토화된 현실에서 우리들은 망연자실하고만 있어야 할까? 빈 쭉정이를 추수한 농부는 다시 희망을 갖고 다음해 농사를 준비하지 않는가.

이렇게 나라 안이, 우리 교육계가 지탄의 대상이 된 원인을 밝히고 그 대안을 말하고, 다음 세상의 주인들을 위해 살아온 얘기를 진솔하게 남기는 것이 한 훈장으로, 한 글쟁이로 살아온 나의 마지막 소명일 것이다.

우리 역사는 시련을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다. 시행착오의 교훈을 역사에서 배우는 겨레이어야만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 선진국이 될 수 있을 테다. 이제 황량한 폐허더미 위에 다시 옷깃을 여미고, 신발 끈을 조이며,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하여 나의 남은 얘기를 마저 풀어나가련다.

완전한 남녀공학학교

1976학년도 2학기 개학 첫날 나는 광화문에서 보광동 행 23번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도중 세검정 삼거리 정류장에서 522번 신촌행 버스를 탔다(나는 평생 운전면허증 없이 대중교통만 타고 다녔다). 연세대 앞에서 내린 다음 걸어서 이대부중으로 출근했다. 집에서 거리는 오산중보다 이대부중이 더 가까웠지만 교통편은 직선 길이 아니라 소요시간은 비슷했다(그 이후 금화터널 개통으로 단축됐다). 나는 첫 등교 길에 비장한 각오를 했다.

지난날 시집을 가는 딸에게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시집 살라는 친정 부모의 말처럼 아내는 그런 당부의 눈빛을 보냈다.

"새파란 솔밭 속에 깃들인 동산…"

이대부중고 교가에 나오는 '새파란 솔밭'은 그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자그마한 동산이었다. 이 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로 그 교명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1951년 전쟁 중에도 나라의 장래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위하여 사범대학교를 창설한 이후, 학생들의 교육현장 실습을 위하여, 대학에 이어 중등교육에도 더 나은 선진 교육이념을 펼치고자 1955년에 부속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애당초 두 학급 100명 학생으로 사범대학의 교육 연구 및 실험 실습학교로 개교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등교육계의 선도적 학교로 완전한 남녀공학 실시와 더불어 자유복으로 학생들에게 '자율과 책임'을 다하게 하는 창의적이며, 민주교육의 실현의 장으로, 사범대학 본래의 역할을 담당케 했다.

이후 이 학교는 중등학교의 평준화 정책으로 본래의 성격과 다소 달라져 당국의 지시로 교복을 착용케 했고, 학교의 규모도 4학급으로 늘어났다.

부임하던 해 이대부중2학년 학생들과 행주산성 답사를 가다(1976. 9.)
 부임하던 해 이대부중2학년 학생들과 행주산성 답사를 가다(1976. 9.)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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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적인 분위기의 소규모 학교

1976년 8월 23일 월요일은 개학식 날이다. 이날 정식으로 첫 등교하여 교직원회의에 참석, 인사를 하는데, 좌석배치가 다른 학교와는 달랐다. 대부분 학교에서는 제1교무실에서 전 교사들이 참석, 교직원회의를 하기 마련인데, 이 학교에서는 별도의 회의실에서 교직원회의를 했다.

그런데 좌석 배치가 네모꼴로 빙 둘러 앉아 여유롭고 자유스럽게 다과를 나눴다. 선생님들은 다과를 나누며 그날 일과를 주고받는데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교사 상호간 서로 의견 교환형식의 회의라 기존의 지시전달 교무실 분위기에 익숙한 나로서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2학기에 중2 국어와 중3 한문 교과를 배정받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남녀 학생들이 거의 동수로, 반에 따라서는 남녀 짝을 한 교실 분위기에 내 눈이 어리둥절했다. 중고 7년을 남학생 학교에서 배웠고, 그리고 지난 4년 반의 오산중, 중동고에서 남학생만을 가르쳐 온 나로서는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교실뿐 아니라 교무실에도 남녀 선생님 숫자가 비슷했고, 교장, 학장, 총장, 이사장 등 윗분들은 모두 여성분이고, 이대 캠퍼스는 온통 여대생이라 마치 여성 왕국에 온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15년을 서울에 살아도 이화여자대학교는 교외선 열차를 타고 한두 번 지나치며 힐끔 바라봤을 뿐이다.

교실에서 공부하는 남녀학생들이 예쁘고, 쉬는 시간 그들의 노는 모습은 천진난만했다. 그들은 숨바꼭질 중 교장실까지 뛰어든다니, 이 하나로도 이 학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그때까지 각 학년 4학급의 소규모 학교로 중고교 동일 교장, 교감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중고 선생님들은 교무실도 함께 썼고, 교무행정도 중고 구분이 없는, 중고교가 한 울타리 한 가족이었다.

이대부중 학생들과 경복궁에서 (1976. 12.)
 이대부중 학생들과 경복궁에서 (1976. 1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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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범대학 부속학교이기에 교사로서는 연구수업 등 수시로 수업을 공개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내가 부임하자 곧 사범대학 대학생들이 2학기 교육실습을 나왔는데, 나는 그들을 위한 연구수업을 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중2 국어교과서 단원이 '행주산성을 찾아서'였다. 그래서 교과서대로 답사키로 하고, 일요일 날 학생들과 함께 신촌역에서 열차를 타고 행주산성을 찾아갔다.

답사를 마친 뒤 그것을 토대로 교안을 짰다. 그 교안에 따라 연구수업을 하자 참관 교생들도, 교사들도 현장감 있는 수업이었다고 후하게 강평해줬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이 학교에서 그 점이 가장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히 학교에서는 예수 믿기를 강요치 않았다. 교사로 채용할 때도 그게 결격 사유가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매주 목요일 1교시는 채플 시간이었는데, 비록 비신자라도 목사님의 설교는 들어보면 다 좋은 말씀이었다.

이대부고 교사가 되다

새 학교에서 조심조심 적응하는 동안 한 학기가 후딱 지나갔다. 새 학년도를 위한 직원회 직전에 전병진 교감 선생님은 나를 당신 자리로 부른 뒤 두 가지를 말씀했다. 그 첫째는 새 학기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낸다는 것과 담임 배정은 하지 않는 대신 교무의 수업계, 학적계 등 중요업무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나는 젊은 나이에 이미 세 학교를 거쳐 온 터라, 내심으로 이 학교에는 최소한 20년을 채운다는 목교였기 때문에(그래야 연금을 탈 수 있기에) 아주 흔쾌히 수락했다. 나중에 어렴풋이 알게 됐지만, 전 교감 선생님은 일찍이 나를 신임하며 그때부터 교육행정가로 키울 복안이었다.

이대부고 학생회 간부들과 고인이 되신 전병진 교감선생님 무덤을 찾아가다(1978. 4.)
 이대부고 학생회 간부들과 고인이 되신 전병진 교감선생님 무덤을 찾아가다(1978. 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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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직책을 맡게 되자 학년말 꿀 같은 일주일 간의 방학기간을 시간표 짠다고 거의 다 보냈다. 중고 24학급 40여 분 선생님들 시간을 짜는데 조건이 많아 무척 힘들었다. 대학에 출강하는 분, 기간 강사로 출강하는 분 등 조건이 복잡했는데도 아무튼 시간표를 만들었다.

사실 나는 치밀치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세파를 많이 겪은 데다가 앞의 세 학교에서 마음 고생을 많이했다. 그런 탓으로 나도 모르게 성격이 변한 탓인지 그때 학교 윗사람으로부터 매우 정확하고 치밀하다는 평을 받았다.

아마도 상류에서는 모난 돌멩이가 강물에 휩쓸려 하류로 내려가면 저절로 부드러운 모래알이 되듯이 사람도 그와 같이 되나 보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지음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이 출간 되었습니다. 허형식 장군은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으로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앞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서로 다른 인생길을 걸은, 이 추운 겨울에 꼭 읽기 좋은 항일전사의 '사이다' 이야기입니다(눈빛출판사 / 1만3000원).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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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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