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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제5차 촛불집회가 광화문 광장과 세종대로 일대에서 열리고있는 가운데 본행사가 끝난 후 행진을 시작하고있다.
 26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제5차 촛불집회가 광화문 광장과 세종대로 일대에서 열리고있는 가운데 본행사가 끝난 후 행진을 시작하고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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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시민의 촛불 속에 함께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이 땅이 지옥조선이 아니길, 시민들의 열망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소망들이 넘친다. 그런데 이건 뭔가. 한줄기 사라지지 않는 고독이라니.

26일 밤, 청와대와 가까운 청운동 골목 경찰차에 스티커들이 빼꼭히 붙어있다. 곁에는 소리 높여 스티커를 받아가라 외치는 시민들이 있다. 시민들은 경찰차에 스티커를 붙인다. 지난 주 집회 때는 떼어내려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차벽에 갇힌 비폭력프레임을 넘어서자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배자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폭력을 쓴다. 저항하는 사람도 권력이 두려워 폭력을 쓴다. 지금은 압도적 시민이 시위에 참여한다. 폭력을 쓸 수 없다. 경찰은 차벽 뒤에 숨어있을 뿐이다. 압도적 다수의 시민이 폭력을 넘어 평화를 열고 있다.

폭력을 넘은 우리는 광장에서 엄청난 촛불을 켠다. 제도권 정치에서 탄핵, 특검, 국정조사를 한다. 그런데 이 공허함은 뭘까? 차벽 때문인가? 이따위 차벽을 훨씬 넘어 외치고 있지 않은가? 광장정치에 놀란 제도정치가 움직이는데 왜 공허한가? 차벽 너머 '구조벽'이 자꾸 떠오른다.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데 나는 자꾸 삶터로 가고 싶다

왜 굳이 청와대로 가려 할까. 권력의 핵심 상징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기억이 살아온다. 거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 5년간 노동시민은 숱하게 잘리고 싸웠다. 얼굴 몇 번 마주쳤던 노짱이 대통령일 때도 겨울을 마다하고 여의도며 천막농성장을 오갔다. 야당정권 10년이나 이명박근혜 시절 사이에 별 차이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냥 쭉 달려오다 도착한 곳이 '헬조선'이라는 느낌은 편협하게 편집된 기억일까.

시위 끝난 근처식당에 들어서면 몰려든 손님들을 맞아 최고 노동강도로 일하는 식당노동자를 만난다. 광장의 거대한 촛불의 물결에서 돌아와 직장의 일감을 마주하는 왜소한 느낌을 '모멸감'이라고 하는 지인의 지적이 지나친 걸까.

11월 19일, '페미당당'과 함께 외치다 배고파 식당에 마주한 두 딸은 촛불의 열기로 그토록 빛났다. 그 후 일주일, 큰 아이는 시험에 골몰하며 머리가 아팠고 고3 문턱에 선 둘째는 스트레스의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큰 딸은 서울 시험, 작은 딸은 대구에서 스펙을 쌓기 위해 26일 촛불을 들지 못했다.

내가 조급한 것이리라. 청와대 주인 바뀌면 삶터에 새 볕 비출 텐데 성급한 것이리라. 청와대 주인 바뀌어도 삶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섣부른 초조감이 나를 흔들고 있는 것이리라.

"가자, 청와대로", 그런데 나는 청와대가 아니라 일상을 걱정한다. 다들 청와대를 향할 때, 삶터의 권력을 떠올린 내가 외곬수임을 누군가 일깨워 주면 좋겠다. 나는 청와대에서 내 일상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고 싶다. 첨단 내비게이션 많은데도 나는 청와대에서 내 일상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여줄 내비게이션을 찾고 있다.

"국정농단? 내 삶이 농락당해온 것은 어쩔 건데?"

'국정농단'의 뜻이 궁금해 사전을 뒤졌다. 이익을 독점하는 위치에서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란다. 세월호 참사로 엉망인 나라, 엉망인 삶을 혹독하게 확인했건만 이건 뭘까.

'국정농단'이라는 단어가 비딱하게 보인다. 이 단어를 쓸 때부터 결론은 예정된 것 아닌가. '국정농단 프레임'은 '권력구조개편' '개헌' '대통령 바꾸기'로 이어지는 예정된 길 아닌가. '국정농단' 프레임 안에서 광장정치는 제도정치의 조연역할로 끝날 것 같은 초조함이 올라온다. 

"국정이 농락당했든 말든 뭐! 내 삶이 농락당해온 것은 어쩔 건데?" 저토록 스트레스 받아내며 경쟁하는 내 딸들과 유라씨, 높은 권력의 언덕위에 서서 딸을 국가대표로 만들어낸 유라 엄마 순실씨와 나를 비교하니 자기연민이 솟아난다. 삼성에게 명마를 선물받은 유라씨 처럼 태어나지 못한 내 딸들아, 애비는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의 임금 한푼 올리는데 그토록 야박한 삼성과 무던히 부딪히고만 있었다.

국정농단의 프레임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촛불 꺼지면 열리는 제도정치의 무대에서 놀다가 대선 후 새 권력구조에 정착하겠지. 농락당한 우리 삶은 먼 무대 밖에 삭제된 채 잊힐까 초조하다. 아니라고, 대통령 바뀌면 우리 삶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누군가 믿음직하게 설득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권력구조 개편'이라고? '삶의 구조 개편'은 어찌 할텐가

한쪽에선 "페미당당" 다른 쪽에선 "페미나치"를 말한다. 어쩌면 아직 나는 "아줌마" "미쓰박" 따위의 언어들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길라임, 시술, 비아그라... 그토록 많은 말초적 폭로들이 흘러넘친다. 클래식음악 익숙하지 않은 내게 뽕짝이 훨씬 위로가 되는 이치처럼, 이 또한 비판의 물결이라 여겨도 좋은 걸까. 뒤틀린 내 마음은 '말초적 프레임'과 '구조적 프레임'을 분명하게 대비시키라 한다.

예능사회의 권력으로 유느님 탄생하고, 저 멋진 말들의 김제동이 어찌 고맙지 않은가. 지지리 궁상 꼰대느낌 가득한 내 쉰소리보다 헬조선 백성에게 위로가 되는데, 어찌 감히 토를 달겠는가. 하지만 '예능사회'를 소비하면서 '야생사회'를 살아가는 이 모순을 꼬집는 것이 어떤 언론 편집실의 지적처럼,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뱉어 내고 싶다.

이토록 촛불을 들고 우리가 주권자라 외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권력자들, 이 때를 권력획득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에겐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역동적 정세가 맞다.

그러나 삶의 무게로 촛불 시위에 참여할 수 없는 노동시민들, 촛불 끝난 손님을 분주하게 맞는 노동자들, 촛불 들다 직장에 돌아와 사용자들의 권력에 고개 숙인 노동시민, 탄생부터 지금까지 경쟁에 시달려 시험과 스펙에 붙잡혀 촛불 들지 못한 딸들, 이들 모두에게 '삶의 구조개편'이 시작되는 역동적 정세일까.

우라질 고독, 위로해 줄 누구 없소?

지금은 투쟁도 비판도 예능을 닮아가고 결국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구조는 그대로 남을까봐 초조하다. 누군가 나의 이 고독을 소주 한잔 따르며 위로해 줄 사람 없을까.

최순실 교과서라며 국정교과서 거부움직임이 꿈틀대고, 전설같은 혁명의 기관이었던 '소비에트'를 떠올리게 하는 '평의회'의 이름으로 '시민 평의회'를 개최하는 지인들 노력이 애틋하고, "민주화 시대처럼 숱한 지식인들까지 농민과 노동자와 빈민속으로 들어가 운동을 바닥에서 일으켰던 투자가 없기에 지금은 학생들의 자각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지인의 평가가 나를 위로하는 전부다.

아니, 대통령의 퇴진, 하야, 탄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 자각은 결코 혁명적 기관, 육중하고 강력한 집회투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도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애꿎은 초조감으로 나를 몰아붙이고, 어디 소주한잔 따르며 위로 해 줄 친구를 무망하게 찾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권력 구조 개편'을 향해가는 당신들의 길과 굳이 대비시켜 '일상권력 개편' '삶의 구조개편'의 길을 걷겠노라 다짐하려 노력한다.

너희에게 구조적 두려움 돌려줄 그날이 시작되고 있어

촛불시위에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여기 이곳, 수원에서 술잔 기울이는 밤, 오롯이 헬조선을 버텨온 비정규직이라 불리고 여성이라고 불리고 알바라고 불리고 이주노동자라고 불리는 곁의 사람들 얼굴이 유난히 애틋하다.

"민중은 개, 돼지"라고, 우리를 개돼지 취급하는 너희는 국회에서 떠들고 대통령 바꾸고 그렇게 우리를 다시 통치하고 싶겠지. 개돼지들이 학교와 직장과 우리의 모든 삶터에서 빳빳하게 고개 들고 권리를 외칠 때, 너희의 지배구조 마디마디가 무너지고 새싹이 돋아 날 때, 너희는 비로소 구조적 두려움을 느끼겠지. 그때는 평화시위 예찬할 여유도 없이 가증스런 폭력을 내보일지 몰라.

잊지 마렴, 벌써 구조의 마디마디에서 씨앗이 움트고 있음을. 내 곁에도 일상에서 권리의 향기를 틔우기 위해 함께 해온 벗들이 적지 않게 있음을. 이 거대한 촛불이 너희의 제도정치의 힘에 의해 꺼지고 흡수된다 해도 스멀스멀 시작된 자각이 나의 '백만 속 고독'을 지우며 자라날 것임을. 그날이 올 것임을. 벌써 시작되고 있음을.


태그:#백만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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