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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찾아 산티아고 07] 지저스 러브스 미 ⓒ 정효정
순례 6일째. 팜플로나(Pamplona)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22km를 걷는 날이다. 9월 중순을 지난 시점이다 보니 이미 추수가 끝난 밀밭을 계속 따라 걷게 된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해발 800m에 위치한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이다. 오르막을 올라가다보면 하얀 바람개비같은 풍력발전기들이 세워져있고, 그 정상에 오르면 순례자행렬을 본따 만든 철로 만든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철로 된 기념물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 스페인어로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이란 뜻이다. 바람은 지금 내 온몸을 강타하는 이 바람을 뜻할 테고, 별의 길(la ruta de las estella)은 오래전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뜻하는 말이었다. 옛 순례자들은 은하수를 따라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에도 이 은하수는 모든 여정의 시작을 장식한다.

'살아오는 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 중에서, 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낸 그 첫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여름인데도 추웠던 그날 밤, 페트루스가 건네주었던 포도주의 향이 아직도 입 안에서 맴돌고 있다. 침낭에 들어가 누운 내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에는 우리가 앞으로 거쳐 가야 할 광막한 길을 보여주는 은하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
바람부는 언덕 바람개비같은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서있다 ⓒ 정효정
산티아고를 대표하는 이미지 순례자들의 사진 명소다 ⓒ 정효정
이날 순례자들의 화두는 단연 '용서'였다. '용서의 언덕'을 향해 오르는 길은 어떤 이들에게는 영감을 주기도 한다. 오리손에서 처음 만났던 미국 노부부가 그랬다. 조금 감격한 표정의 그들은 이 길을 걸으며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인생의 큰 기회라며, 내게도 용서할 존재가 있는지 물어봤다. 

걷기도 힘든데 뭘 또 용서까지 해야하나 싶다. 그래서 그냥 '딱히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일이 없다'고만 대답했다. 실제로 없기도 했고, 설사 있더라도 내 용서가 의미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상대는 내가 용서를 하든 말든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 산길을 용을 쓰고 오르며 용서를 해봤자, 내 심신의 안정을 위한 소소한 정신승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늘 용서의 힘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 테러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테러범을 용서하는 미담은 전 세계에 보도되며 우리를 훈훈하게 만든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거나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 어머니는 분명 자유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 뛰어난 개인의 사례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남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선 자신이 그것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용서 또한 마찬가지다. 지니고 있지 않는 것을 화해와 평화라는 명목으로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사실 피해자가 '용서를 하는 것'보다, 가해자가 '용서를 비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좀 복잡한 심정이 되어 남은 길을 걸었다.
오바노스 성당 성당은 다시 지었지만 내부의 일부는 초기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 정효정
용서의 언덕을 내려와 한참 걷다보면 오바노스(obanos)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의 성당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키텐 왕국의 펠리시아라는 공주가 있었다. 이 공주는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이 작은 마을에 멈췄다. 그리고 이곳에서 평생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를 돌보며 살기로 했다.

그 사실을 듣고 그의 오빠 기욤 공작이 동생을 데리고 돌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동생의 설득에 실패하자, 그는 분노하여 그녀를 칼로 죽이고 만다. 죄책감에 빠진 그는 신에게 죄를 용서받고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했다. 그런데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 마을에 멈췄다. 그리고 마을에 성당을 짓고 동생이 뜻했던 것처럼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가 지었다는 성당에서 그의 선택을 되새겨봤다. 기욤 공작은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당시 교리상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면 그는 죄사함을 받는다. 만약 그가 순례를 통해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다면 그는 이 마을에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동생의 선한 뜻을 이어받는 길을 택했다. 교회의 용서가 있었음에도. 그는 '용서받기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용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용서를 받는 것'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어떤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가해자의 '용서를 받기 위한 행위나 자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나 약자가 '용서를 하는 행위'는 그 이후에 올 수 있는 선택형 옵션이 되어야 한다.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화해니 평화를 말하는 것은 가해자의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한 면죄부에 지나지 않는다. 면죄(免罪), '죄를 면하다'는 그 말을 되새기며 나는 진저리를 쳤다. 용서가 면죄에 이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추수가 끝난 밀밭과 해바라기밭 9월이다보니 밀밭은 이미 추수가 끝나있었다. ⓒ 정효정
"설마 너 얘 모르니? 교회 안 다니는구나"

어느날, 독일 코미디 영화를 봤다. <지저스 러브스 미 (Jesus Loves Me, 2012)>라는 영화였다. 결혼에 실패한 독일 노처녀 마리 앞에 어느날 한 청년이 등장한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마리는 이 톡특한 청년에 대해 궁금해졌다.

"어디 출신이에요?"
"갈릴리. 팔레스타인에 있어요."

해맑게 팔레스타인이라고 답하는 청년의 모습에 그녀는 기겁한다.

'팔레스타인! 세상에, 테러리스트... 잠깐, 쉽게 단정짓지 말자.'

"이름은 뭐예요?"
"여호수아."

'거봐, 진짜 테러리스트잖아'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지구 종말을 지켜보기 위해 신의 아들 지저스가 지구에 왔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환생인 독일 노처녀 마리와 썸을 탄다는 설정이다. 사실 영화는 재미있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않았지만 잘생긴 지저스(플로리안 데이비드 핏츠)는 확실히 기억에 남았다. 사실 겉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현혹되어 미끼를 물기 가장 쉬운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럴듯한 겉모습에 현혹된 아픈 경험이 있다. 

오래전 북인도 마날리를 여행할 때였다. 전망 좋은 숙소를 찾아 헤매다가 포기하고 골목 귀퉁이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너무 저렴한 숙소였나 보다. 짐을 풀고 보니 이스라엘 여행자들의 아지트였다.

인도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여행자 중 다수가 군복무를 마치고 온  20대 초반 젊은이들이다. 군대에서 막 제대해서인지 술과 마리화나에 적극적이고, 시비가 붙는 경우도 많았다. 휴양도시 마날리는 온천으로도 유명하지만 마리화나로도 유명했다. 때문에 이스라엘 여행자 아지트에 들어섰다는 것은 24시간 머리 아픈 마리화나 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거다.
설산으로 유명한 마날리 하지만 야생 마리화나도 유명하다 ⓒ 정효정
마당에 둘러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이스라엘 친구들은 어김없이 얇은 미농지같은 담배종이를 꺼내 마리화나를 돌돌 말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어쩐지 낯이 익다. 잘생긴 것 뿐 아니라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었다. 나는 자꾸만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랫동안 알아온 듯한 이 느낌... 이 익숙한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결국 물어봤다.

"저기, 작업 거는 건 아닌데,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니? 낯이 익어서 그래."

그러자 곱슬머리에 납작한 키파(유대인 모자)를 쓴 그의 친구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설마 너 얘 모르니? 교회 안 다니는구나."
"응. 안 다니는데...?"
"얘 그 사람 닮았잖아. 지저스."
"오. 마이. 갓."

그냥 감탄사일뿐인 '오마이갓(oh my god)'이 이렇게 적절하게 사용되다니.  그윽한 눈빛에 어깨까지 오는 갈색 웨이브 머리... 진짜 성화에 그려져 있는 그분을 닮았다. 어쩐지 오랫동안 알아온 듯한 느낌이 들더라. 내가 교회는 안 다녀도 성탄절마다 영화는 많이 봤다.

문제는 그분과 외모만 닮았다는 거다. 그는 그윽한 눈빛을 하고 내게 마리화나 연기를 내뿜곤 했다. 대체 왜 저 외모로 저런 행동이나 하는 건지. 나는 연기와 함께 내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바라봐야 했다.
야생 마리화나 마날리에는 지천으로 피어있다 ⓒ 정효정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날 밤,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자니? 나야, 지저스." 

'오. 마이. 갓'

나는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혹시 몰라서 의자까지 문 앞에 가져다 둔 후, 그가 물러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생긴 것에 현혹되지 말자는 교훈을 늘 가슴에 새겼다. 그윽한 눈빛은 미끼일 뿐이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한 친구에게 하자, 그는 박장대소했다.

"맙소사. 문자 그대로 지저스가 네 방문을 두드렸는데 넌 그냥 보냈어? 이 지옥에 갈 여자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했는데?"
"따뜻한 스프를 대접했어야지."

글쎄, 그가 배가 고파서 내 방문을 두드린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분도 설마 이런 일로 날 지옥에 보내시진 않겠지. 어쨌든 시간이 흘러 2015년, 난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에서 다시 지저스와 마주쳤다. 이번에도 진짜 지저스는 아니고 닮은 남자였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지저스
배낭을 메고 걷는 순례자들 배송 서비스를 사용해 배낭을 목적지까지 미리 보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 지고 걷는다. ⓒ 정효정
푸엔테 라 레이나로 향하던 중, 그만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끈 때문이었다. 배낭끈 조절하는 법을 배우긴 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배낭과 등이 완전히 일치되어 내려놓기 싫을 정도의 궁합을 자랑하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아무리 고쳐매도 글러먹은 날이 있다. 이날은 아침부터 꼬인 날이었다. 배낭이 사람을 업고 다니는 거라면, 얘가 얌전히 업혀있지 않고 계속 온몸을 비틀며 투덜대는 식이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마을이 나왔지만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겠다. 길바닥에 앉아있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때마다 문제없다고 답하고 잠시 더 망연히 앉아있었다. 목적지까지는 8km 정도 남은 듯했다. 그때 누군가 또 다가왔다.

"괜찮아? 도움이 필요해?"
"아니야, 조금 지쳤을 뿐이야."

답하면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빛을 등지고 서 있기에 그의 온 몸이 빛에 싸인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름부터 물었다.

"근데 너는 이름이 뭐니?"
"다니엘이야."

다니엘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온 이 순례자는 깊고 그윽한 눈, 갈색 곱슬머리를 지녔다. 그리고 그는 특이하게도 진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등산스틱을 지니고 다니고, 그게 아니더라도 생장의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잘 손질된 가벼운 나무스틱을 들고 다니는데, 그에 비하면 그의 나무 '작대기'는 너무나 야생 그 자체였다.

그 외모에 저 지팡이까지 짚고 있으니 정말 광야를 걷는 그분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그가 나타날 때마다 한국인 순례자들끼리 '오, 주님이 오셨어'라고 소곤거리며 웃곤 했다. 아아, 단지 겉모습일 뿐인데 나는 어느새 현혹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순례자의 나무 지팡이 정말 생나무를 짚고 다닐 줄은 몰랐다 ⓒ 정효정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까미노, #카미노, #순례길, #용서의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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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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