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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파르나스 역의 기억을 떠올린 김에 기차역과 기차 여행 이야기를 좀 더 해 보기로 하자. 몽파르나스 역은 생 라자르 역, 동역, 북역 등과 같이 파리의 6개 기차역 중 하나다. 여러 개의 지하철 노선들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고 교외로 향하는 기차들의 출발 지점이기도 해서 역의 규모가 매우 크다. 지하도 그렇지만, 여러 개의 철로가 나란히 놓여 있는 지상의 거대한 공간은 늘 북적인다. 파리 근교로 나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에 서 있으면 클로드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이 절로 떠오른다.

모네는 1877년 무렵, <생 라자르 역>을 여러 점 그렸다. 그림을 위해 역장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모네의 패기도 놀랍지만 그 역장이 나는 더 궁금하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승객의 출입도 제한하고, 기차들을 플랫폼에 세운 후 동시에 엔진을 돌려 연기를 내뿜도록 했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결정이 미술사에 길이 남을 그림의 탄생을 가능케 한 사건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을 그 역장은 짐작이나 했을까?

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거대한 뭉게구름처럼 기차역에 가득하다. 두터운 연기 너머로 이제 막 정비를 끝낸 파리의 새로운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역의 지붕과 벽면과 철로의 차가운 철골,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육중한 쇳덩어리, 그 위로 뿜어져 나와 플랫폼을 가득 채운 뭉실뭉실한 거대한 연기. 근대의 공간으로 상징되는 기차역, 근대의 상징으로 해석되는 기차 그리고 꿈처럼 희망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모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상주의 그림들로 가득 채워진 오르세 미술관도 한때는 기차역이었다. 현대미술의 문을 연, 혁명처럼 등장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근대의 공간으로 상징되는 기차역에 걸려 있는 셈이니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파리 몽파르나스 역
 파리 몽파르나스 역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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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출현이 충격적이기는 했던 모양이라,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공개한 최초의 영화도 <기차의 도착>이었다. 3분짜리 영화는 1895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상영되었다. 모네가 생 라자르 역의 기차를 그리고 20년이나 지난 뒤인데도 영화가 시작되고 스크린 속에서 기차가 들어올 때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한다.

파리의 모네가 기차역과 기차와 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여러 개의 캔버스에 인상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속도감을 영상에 담아낸 것처럼, 미국과 유럽을 둘러보고 이제 막 돌아온 조선 사람 유길준은 1885년, <서유견문>에서 기차의 모양과 체계, 기차를 움직이는 증기기관의 원리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보고 온 서구 세계에 대한 감흥을 주체할 길 없다는 듯이 '오늘날의 세상은 증기 세계다'라고 선언한다.

"기차는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서 움직이는 차인데, 화륜차라고도 한다. 앞차 한 량(輛)에다 증기 기계를 장치하여 기관차라 이름하고, 기관차 한 량으로 다른 차 2,30량 내지 4,50량을 끈다. (...) 철로를 까는 비용은 지형이 험한지 평평한지에 따라 같지 않지만, 대략 평균 수치로 우리나라 1리 되는 거리에 3천 원이 든다. (...) 그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규모와 신속하고도 간편한 방도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넉넉히 놀라게 하였으며, 마음을 뛰게 하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기차의 규모나 속도에 놀라지 않는다. 기차역을 가득 채우는 연기도 없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기차역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한다.

파리의 기차 역
 파리의 기차 역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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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출현으로 일부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여행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싣고 빠른 시간 내에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는 기차의 등장은 사람들의 생활과 감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달라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들은 사실보다 인상으로 기억된다. 커다란 사각 프레임 속에 부서지듯 와 닿고 사라지는 빛과 멀리 펼쳐지는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프레임 속 세상은 드라마틱해졌다. 공간 이동의 자유는 경험을 확장시켰고, 사회적 교류와 지식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다. 실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좋아졌는가? 글쎄,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노동 시간의 단축이 개인의 여가 생활을 가져왔다지만 그마저 또 다른 노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계급에 무관하게 여행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는 하나 제한적 자유일 뿐이다. 여행의 내용과 선택에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대체로 씁쓸하게 타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축적'과 '세상을 보는 안목의 확장'에 대한 믿음은 어떤가? 여행을 즐기는 나는 이 말을 사실인 척 우기고 싶다. 그렇지만 그래도 될까? 달리는 기차 안에선 네모난 창으로 들어오는 세상을 스치듯 볼 수밖에 없다. 정해진 틀로 세상을 재단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표면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혹 여행의 본질적 속성은 아니던가.

직접 경험에 대한 맹신이 자칫 지식과 사고를 편협하게 가두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내가 보고 온 것이 진짜일까. 그것이 전부일까. 경험의 조각을 근거로 그 세계를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잠시 시간과 공간을 이동했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보장할 수 있는가. 

몽파르나스 역은 오늘도 기차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뜨겁다. 떠나는 이의 설렘과 도착한 이의 안도감이 서로 엉켜 춤을 춘다. 오늘 나는 무엇을 두고 오게 될까. 아니면, 무엇을 담아 오게 될까. 이 여행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태그:#파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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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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