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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서원 강당
 매양서원 강당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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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서원은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로37길 48에 있다. 지금은 매천동이라 부르지만  이곳의 예전 지명은 매양마을이었다. 그래서 1692년(숙종 18)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1548∼1615)를 기려 서원이 세워질 때에도 매양서원이라는 이름이 선택되었다. 

송원기는 1548년에 태어나 1615년에 타계했다. 우리나라 전역을 휩쓴 초유의 전쟁,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끝난 때가 1592년과 1598년이다. 임진왜란 발발시 송원기의 나이는 43세였다. 선비인 그가 왜적의 침입을 맞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추측이다.

그의 벗인 서사원, 곽재겸 등도 모두 임진왜란 당시 대구 일원의 의병장들이다. 송원기는 명나라 군사들이 팔거(지금의 칠곡)에 주둔할 때 형 송원도(宋遠度)와 함께 쌀 700석을 군량미로 지원했다. 또 체찰사 이원익에게 군무십책(軍務十策)을 제안하여 도움을 주었다.

특히 송원기는 명나라 관리 정응태가 '조선이 왜와 결탁하여 함께 명을 공격하려 든다'라고 모함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이 곤경에 빠진 1598년,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변무서(卞誣書)를 지어 중국 조정에서 두루 읽어보도록 조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일로 그는 중국 조정에서도 유명한 인사가 되었고, 선조는 왜적 척결에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하여 공신으로 임명했다.

매양서원 입구의 선무원종공신 송원기 기적비
 매양서원 입구의 선무원종공신 송원기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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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매양서원 입구에 가면 선비 송원기의 임진왜란 당시 공적을 길이 역사에 새기기 위해 2009년에 세워진 비석을 볼 수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선무원종공신 야성송공 아헌선생 기적비' 열일곱 자가 한자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은 임진왜란 종전 후 선조가 전란 극복에 기여한 사람들을 포상할 때 무술 분야에서 큰 공을 세운 신하로 임명되었다는 뜻이고, 야성송공 아헌선생 기적비(冶城宋公啞軒先生紀績碑)는 호가 아헌인 야성송씨 송원기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빗돌이라는 의미이다.

선무원공신이기도 했을 뿐더러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도 급제한 송원기였지만 벼슬을 한 기간은 아주 짧았다. 조정에 들어간 그는 광해군에게 <육강소(六綱疏)>를 바쳤다. 정심술(正心術), 입지기(立志氣), 진기강(振紀綱), 용인재(用人才), 득민심(得民心), 수군정(修軍政) 등 6개 분야에 걸쳐 정치를 바르게 할 것을 주장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원기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논어의 가르침대로 조정을 나왔다. 그는 몸이 아파서 벼슬을 할 수가 없다고 핑계를 댔다. 그 이후 그는 스스로 자신을 아헌(啞軒)이라 불렀다. 말을 못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몸이 병약해진 탓인지, 불과 몇 년 뒤인 1615년(광해군 7) 세상을 떠났다.

그런 점에서 송원기는 마치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 1392~1480)을 재현한 듯하다. 경은(耕隱) 이맹전은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하자 이듬해 고향 선산으로 돌아간다. 그는 평생을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람인 척 살다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실제 그런 줄 알았다고 하니, 그의 충절은 참으로 지독한 고독이었다 할 것이다.

매양서원의 사당 숭현사
 매양서원의 사당 숭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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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冶城)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를 가리킨다. 따라서 송씨 가문이 스스로 야성송씨를 자칭하는 것은 가문의 선조들이 야로 지역과 관련하여 특별한 역사를 남겼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기록에 따르면 가문의 시조 송맹영(宋孟英)이 고려 998년(목종 1) 야성군(冶城君)에 봉해지고, 그의 11세손 송길창(宋吉昌)이 또 다시 1361년(공민왕) 홍건적의 난 때 세운 공로에 힘입어 야성군에 봉해진다. 야성은 한때 손씨 가문의 땅이었던 것이다.

기적비 옆에는 '야성송씨 매남 세거지(世居地)의 유래'를 밝힌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은 '매남 이주(移住) 1대가 매헌공(송명기)이요, 2대가 남촌공(송명기의 아들 송이석)이며 3대가 문양공(송이석의 아들 송학렴)이다. 매헌공과 문양공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양공은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인품이 뛰어나 지방 유림에서 극진한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칠곡 일대와 대구 근교 유생들이 매남마을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읍(揖)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전하니 이때가 아헌공파의 전성기라 하겠다'라고 말한다.  

향교와 서원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빗돌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요즘말로 하면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차에서 내려 걸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학교인 향교와 서원이 공자 등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의 뛰어난 선비들을 제사 지내는 역할까지 한 시설이었으므로 '말(현대 사회의 자동차)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오라'는 것은 당연한 요구였다.

매양서원 양정문
 매양서원 양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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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구 일원의 선비들은 매양서원 안으로 들어올 때는 물론이지만 심지어 매양마을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을 하고 통과했다고 한다. 만약 현대 사회에서 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진풍경일 것이다. 안내판의 '칠곡 일대와 대구 근교 유생들이 매남마을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공손하게 절을 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전하니 이때가 아헌공파의 전성기라 하겠다'라는 표현은 조금도 지나친 추억이 아니다.

안내판 옆의 '매양서원의 연혁(沿革)'은 이 서원이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겨우 복건(復建), 유지되어 오던 중 연도는 알 수가 없으나 두 차례에 걸쳐 소실(燒失)되는 재난(災難)을 겪고 2006년 4월에 후손들의 단성(丹誠)을 모아 재건(再建), 복원(復元)되었다'라는 사실을 안내해 준다.

좌우로 나란히 서 있는 두 안내판 '야성송씨 매남 세거지의 유래'와 '매양서원의 연혁'은 높이도 폭도 빛깔도 재질도 동일하지만 특히 마지막 문장이 똑같아 답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두 안내판은 한결같이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너무도 따뜻한 안내판을 즐겁게 읽은 후 서원 전역의 출입문인 양정문(養正門) 지나고, 이윽고 강당과 사당을 둘러본다. 사당이 강당 옆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태그:#매양서원, #송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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