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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떡해요? 설 끝나고 2학년 수업 들어간대요. 야자(야간자율학습)도 3월 31일까지는 무조건 해야 하고요. 그동안 밥하는 거 다 까먹을 것 같애. 엄마처럼 리셋되면 어떻게 해요?"
"푸하하하! 그거 다 오해야. 첫째, 엄마 음식솜씨는 원래 밑바닥이야. 해본 적도 없고. 둘째, 기술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야. 야자 끝나면 다시 맛있게 잘할 걸?"    

2월 15일, 제굴은 오전 6시에 혼자 일어났다. 7시 30분에 카풀버스를 탔다. 8시 30분에 "엄마, 나 좀 태우러 와 줘요"라고 전화를 걸었다. 보충수업을 하는 친구들만 학교에 오는 것이었단다.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오는 중이라면서…. 시내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제굴이의 학교, 날씨마저 지독히 추운 날이라서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남편이 태우러 갔다.

봄방학 하면 다르게 지낼거라던 제굴, 자기만 기분 좋아지는 밥상을 차렸다. 갈비와 닭 가슴살이 번갈아서 올라왔다.
 봄방학 하면 다르게 지낼거라던 제굴, 자기만 기분 좋아지는 밥상을 차렸다. 갈비와 닭 가슴살이 번갈아서 올라왔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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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제굴은 자기만 기분 좋아지는 밥상을 차렸다. 갈비와 닭가슴살이 번갈아서 올라왔다. 남편이 "엄마 먹게 채소로 뭐 좀 해봐!"라고 했다. 꽃차남은 "고기가 질겨"라고 불평했다. 오, 예! 기회였다. 나는 다 맛있다며 제굴 편을 들었다. 눈에서 하트를 뿜어내면서. 그리고는 내 계략을 살짝만 드러냈다.

"제굴아! 진짜로 호주나 캐나다에 있는 요리학교 갈 거야? 그럼 '아이엘츠'(IELTS) 시험 봐야 해.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를 영어로 보는 거야. 할래?"

봄 방학, 제굴은 여전히 하루 18시간을 잤다. 나머지 시간을 쪼개서 밥하고, 웹툰 보고, 음식에 관한 책을 읽고, 거기에다가 영어공부까지. 슈퍼히어로라도 견뎌낼 수 없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평범한 열여덟 살인 제굴은 사흘 만에 지쳐 떨어지고 말았다. 2월 18일, 낮밥을 차리고는 "저녁에는 치킨 시켜 먹을 거예요"란다.

우리집에서 음식 해먹자고 했다, 사실은 치킨 시켜 먹고 싶었는데...

한편, 그날 군산 동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마친 제굴의 친구 성헌이는 얼큰한 음식 생각이 났다. 제굴과 똑같이 평범한 청소년인 성헌이는 천리 밖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천리안이 아니다. 밥하기 귀찮아진 제굴에게 음식을 가르쳐달라고 카톡을 보냈다. 열흘 전쯤에 제굴이가 알려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는 너무 느끼했다면서.  

"성헌이한테 우리집에서 음식 해보자고 오라고 했어요. 걔가 학교에서 카풀버스 타고 올 시간에 나가서 장을 봤어요. 홍합 2000원, 새우 5000원, 오징어 2000원 어치 샀어요. 대파도 사고요. 홍합은 양식이라서 껍데기에 털 같은 게 나 있어요. 그거는 그물이라 다 떼어내야 해요. 나는 우선 소금이랑 후추, 대파, 다진 마늘 넣어서 홍합탕을 끓였어요."

성헌이는 교복 차림으로 우리 집에 왔다. 제굴이는 성헌에게 오징어 손질하는 것부터 알려줬다. 생선가게에서 내장은 빼 준다. 하지만 윗니 아랫니가 있는 오징어 이빨은 별미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떼어주지 않는 거라고. 제굴은 이빨을 제거한 오징어에 칼집을 냈다. 성헌이한테도 해보라고 칼을 잡게 했다.

새우 등을 반으로 갈라서 똥줄을 빼 내고 익히면 새우 모양이 예쁘게 나오는 거란다.
▲ 새우 손질하는 제굴 새우 등을 반으로 갈라서 똥줄을 빼 내고 익히면 새우 모양이 예쁘게 나오는 거란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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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먼저 재료 손질을 한 다음에 친구 성헌에게도 해 보라고 했다.
 제굴은 먼저 재료 손질을 한 다음에 친구 성헌에게도 해 보라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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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새우도 등을 반으로 갈라서 똥줄을 빼냈다. 그렇게 손질해서 익히면 새우 모양이 예쁘게 나오는 거라고 알려주면서. 성헌은 제굴이가 한 그대로 새우 손질을 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제굴은 "안 돼요. 머리 자라면 찍어요"란다. 성헌이는 "저도 (글에) 나와요?"라고 물었다.    

"식용유에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볶아요. 그러면 고추기름이랑 마늘기름이 빨갛게 국물에 떠다녀요. 그걸 '라유'라고 해요. 거기에 매운 맛을 강화해야 하니까 소주를 넣어요. 고춧가루 비율만큼. 그 다음에는 양파를 넣고, 손질한 해산물까지 넣어서 볶다가 물을 부으면 짬뽕맛이 나요. 그렇게 만들어진 매운맛은 물을 마셔도 안 가셔요. 그래서 인도에서는 '요시'라는 요구르트를 먹거든요. 나도 우유랑 요구르트 파우더 섞어서 만들었어요."

제굴이랑 성헌이가 만들고 있던 상하이 파스타. 둘은 식탁에 앉아서 아무 말없이 먹기만 했다. 열여덟 살 소년 둘이 마주앉은 식탁에는 말하는 소리가 안 들렸다. 그저 흡입하는 소리만 있었다.
 제굴이랑 성헌이가 만들고 있던 상하이 파스타. 둘은 식탁에 앉아서 아무 말없이 먹기만 했다. 열여덟 살 소년 둘이 마주앉은 식탁에는 말하는 소리가 안 들렸다. 그저 흡입하는 소리만 있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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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파스타면을 삶고 나서 기름에 볶았다. 그 면을 짬뽕에 넣고 끓여서 상하이 파스타를 완성했다. 열여덟살 소년들의 식탁. 대화는 없다. 오로지 먹는 소리만 난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성헌은 책가방을 들었다. 제굴은 음식하면서 조금씩 떼어놓은 새우, 오징어, 홍합을 성헌에게 건넸다. 집에 가서 한번 해보라면서. 

"성헌아, 이거 다 시장에서 장 본 거야. 대형마트보다 훨씬 싱싱하고 값도 싸."  

제굴은 음식이 맛있게 되면 기분이 좋다. "아으, 설거지하기 싫어"라면서 늘어지지 않는다. 친구가 가자마자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닦고, 행주를 빨아 넣었다.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했다. 나는 제굴에게 짬뽕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얘기해줬다. 제굴은 재깍 지현 이모한테 "내일 점심 드시러 오세요"라고 전화했다.     

인생짬뽕을 만난 날에 무너져버린 다이어트

다음 날, 지현은 오후에 출근하는 제부 점심을 미리 차렸다. 평생 다이어트를 해온 사람이라서 점심 한 끼만 제대로 먹는 편인 지현은 오전 10시쯤에 먹는 과일도 먹지 않았다. 조카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란다. 잠결에도, 제부는 외출복 차림으로 나가는 지현에게 "부럽다"라고 했다. 지현은 제부가 서운하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제굴이가 이모부도 드시러 올 거냐고 물어봤었어. 근데 출근해야 하니까 못 간다고 했지."

지현은 '짬뽕의 노예'. 주기적으로 먹으러 간다. 이름난 맛집으로는 가지 않는다. 동네 중화요리점에 간다. 게다가 지현은 '조카 바보'. 어린 제굴은 지현과 '절친'이었다. 청소년이 된 제굴은 "이모, 엄마랑 지금 같이 있어요?"라고 물을 때만 전화하지만, 이모가 좋아하는 상하이 파스타를 해주겠다고 했다. 지현의 가슴은 벅찼다.

제굴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어떻게 해! 맛없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지현은 부엌으로 가서 제굴 옆에 섰다. 끓고 있는 국물을 한 입 떠서 먹었다. 짬뽕도 즐겨먹지 않고, 요리에는 관심마저 없는 나는 그냥 식탁에 앉아있었다. 지현은 제굴에게 자신을 갖고 음식을 만들라면서, "이모가 '짬뽕인'인 거 알지? 진짜 맛있어"라고 했다.

제굴은 다 된 짬뽕에 삶아서 기름에 볶은 파스타면을 넣었다. 그리고는 파슬리 가루와 파를 뿌려서 마무리했다. 제굴이가 쓰고 있는 모든 접시와 조리도구를 사다준 지현은 상하이 파스타를 담을 그릇이 마땅치 않다면서 고민했다. 나는 잘 안 써서 넣어둔 꽃무늬 그릇을 꺼냈다. 그때 제굴은 파스타가 든 프라이팬을 통째로 식탁에 올렸다.

주기적으로 짬뽕을 먹어야 하는 '짬뽕인' 지현. 제굴이가 해 준 상하이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고. 참고로 그녀는 매우 (주관적으로) 냉정하게 맛을 평가하는 사람임.^^
▲ 동생 지현의 인생 짬뽕 주기적으로 짬뽕을 먹어야 하는 '짬뽕인' 지현. 제굴이가 해 준 상하이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고. 참고로 그녀는 매우 (주관적으로) 냉정하게 맛을 평가하는 사람임.^^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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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식당에 온 것처럼 차려입은 지현은 "꺄아! 그냥 접시에 덜어서 먹자"라고 했다. 지현이 딱 좋아할 만큼 매운 맛이었다. 우리 셋은 코를 훌쩍이면서 먹었다. 얼얼하니까 한 번씩 입을 벌려서 "쓰읍" 했다. 남은 상하이 파스타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은 뒤에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지현은 말했다.

"조카 음식이니까 '아, 맛있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왔는데 너무 맛있는 거야. 외국에서 요리공부하고 온 선생님들이 만든 상하이 파스타보다 훨씬 내 취향이었어. 아까 간을 한 번 봤잖아. 그때 맛있는 걸 딱 알았어. 내가 10년도 넘게 외식하러 다녔잖아. 맛에 대해서는 엄격해. 솔직하고. 오늘 제굴이가 해준 음식은 내 생애 최고의 짬뽕이야."

집에서 해먹는 음식은 자유를 준다. 본성이 드러난다. 기분 좋게 배가 부르면, 식탁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는 시시한 얘기를 한다. 자꾸 낄낄거리면서 웃는다. 지현과 나는 그 와중에도 진지한 고민을 했다.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군산의 '복성루'나 '지린성'의 짬뽕보다 (주관적으로) 훨씬 맛있는 제굴의 상하이 파스타. 맛있는 건 일단 우리끼리만 먹는 걸로. 그러니까 우리집 주소는 절대 안 알랴줌.


태그:#인생 짬뽕, #상하이 파스타,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안 얄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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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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