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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장윤선, 박정호의 팟짱>(오마이뉴스 팟캐스트)'라고 프로그램명을 정확히 밝혀주십시오.

■ 방송 : 장윤선, 박정호의 팟짱
■ 채널 : 팟캐스트(+아이튠즈 http://omn.kr/adno +팟빵 http://omn.kr/fe10)
■ 진행 : 장윤선 오마이뉴스 정치선임기자
■ 출연 : 조정래 영화감독

▲ [전체보기]'귀향' 조정래 "주름진 소녀와 만남, 아베에게 강추해요"
ⓒ 오마이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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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있는 인터뷰>

아래는 장윤선 오마이뉴스 정치선임기자와 조정래 영화감독과의 1문 1답이다.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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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잘 알려진 것처럼 14살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강일출 할머님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이 영화에 참여한 인원이 대단합니다. 7만5270명 시민의 후원으로. 무려 12억의 제작비를 모아서 14년 만에 완성한 영화입니다. 기록적인 숫자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다음 주죠? 24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벌써 상영관을 늘려 달라는 시민들의 청원이 쏟아지고 있는 데요. 오늘은 이 화제의 영화를 만든 조정래 감독을 스튜디오로 모셔서 영화 제작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감독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가 '손안에 있는 TV'라는 콘셉트로 처음으로 페이스북 생중계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입니다. (웃음) 해외는 시작한 언론이 있는데요. 국내 언론으로는 <오마이TV>가 첫선을 보여 주셨습니다. 잦은 실수는 있지만 재미있게. 저 카메라 재밌죠? 휴대전화입니다.
"정말 휴대전화가 앞에 있네요."

-그러니까요. 지금 이 페이스북 생중계는 <오마이뉴스> 공식 계정을 통해서 22만3108명에게 동시에 전송되고 있습니다. 22만 페이스북 친구 여러분, 지금 보고 계시죠? 댓글로 응원 말씀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말이 좀 길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시작하는 실험이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하느라 그랬고요. 14년 만에 이 영화가 완성됐어요. 대단히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1시간 정도 압축적으로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영화는 강일출 할머님의 사연을 가지고 영화가 제작됐어요. 어떻게 해서 처음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단 생각을 하시게 됐나요?
"제가 2002년도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봉사활동을 갔는데요. 제가 영화도 연출하지만, 판소리 고수랑 장구 같은 것도 치는 국악인이기도 해요. 뭐, 바닥소리라는 단체에서 최용석씨랑 국악인 박애리씨와 멤버를 꾸려서 저희가 봉사활동을 갔는데. 저희가 할머님들께 위로 드리겠단 마음으로 갔다가 첫째 날부터 진짜 펑펑 울고. 오히려 할머님들께 위로를 받고. 그렇게 인연을 맺어서 매달 같이 공연 활동을 했는데요. 공연도 하고, 소리도 가르쳐 드리고 그런 걸 하다가 제가 강일출 할머님께서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봤어요.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너무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림 속 담고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은 소녀가 끌려갔고. 저는 또 어딘가에서 고초를 겪고도 살아 계실 줄 알았지만 대부분 돌아가셨단 걸 그 그림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증언집을 보게 됐고.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꼭 영화로 알려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2002년에 학생이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그때 29, 30살 때였던 거 같은 데요. 어린 나이였는데. 그전에는 부끄럽게도 거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알지 못했고. 특히나 이런 인권 문제나 이런 거에 대해서도 많이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상태에서 갔던 것 같아요.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단순히 '일본이 나쁘다', '어떻게 일본이'가 아니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남성으로서 굉장히 충격 받았어요. 할머님들 만나 뵙고. 너무 가슴 아팠던 것은 할머님들 눈을 보면 할머님들 끌려가셨을 당시 나이가 평균이 16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오늘날로 보면 신체 나이가 12세 정도 되는 나이였고. 증언집을 보면 초경도 하지 않았던 분들, 이런 성행위 자체를 이해 못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였어요."

-아이들이잖아요.
"아주 아이들이죠. 송구스럽지만 오늘날로 이해하려면 거의 아동 성폭력에 가까운 얘기에요. 그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사실 겉은 할머니지만 눈은 완전 소녀의 눈을 갖고 계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포근하고, 품어주는 그런 느낌의 할머니가 아니라 그냥 주름진 소녀를 만났달까? 그래서 그때 그 모습이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으로. 남자로서의 죄의식이 깊이 각인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물론 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영화 제작 기간이 굉장히 길었어요. 무려 14년간 한 영화에 매달리기 어려운데.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14년 동안 한 작품에 올인 하실 수 있었을까요.
"물론 중간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아이들을 다룬 <두레소리>란 영화도 만들었고, 고양원더스라는 독립야구단을 다룬 <파울볼>이란 영화도 맡았는데 너무 감사한 작품들이었고. 하지만 제가 이제 영화 개봉 준비하면서 지난 방송 출연했던 자료를 봤어요. 이렇게 불러 주셔서 말을 잘해야겠단 생각에서 봤는데. 실컷 <두레소리> 얘기를 하다가 마지막엔 <귀향>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기-승-전-귀향' 그런 느낌이었고. 우리 영화를 힘들게 같이 했던 핵심 동지가 임성철 PD라고 있는데. 알고 보니 김구 선생님의 외동손 되시더라고요. 그 사실을 모르고, 전혀 알지 못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가서. 그 친구 얘길 따르면 자기를 붙잡고 일본군 악역을 맡아 달라면서 <귀향> 얘기를 두 시간 동안 했답니다. 저는 한 10분 얘기한 것 같은데. '이 사람 정신 나갔나'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하나. 그 정도로 제가 계속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완전히 <귀향> 속에서 살았던 14년이라 봐야 할 텐데요. 사실 영화 제작을 하면 취재도 많이 다니시잖아요. 어떤 곳을 어떻게, 어떤 자료를 어떻게 취재하셨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고. 처음 그 그림 접했을 때 이해를 못 했어요. 그 그림을 보시면 아실 텐데. 지금 아마 페이스북 하시는 분들께서는 태워지는 처녀들 그림을 검색하시면 바로 보실 수 있는데요. 저는 참, 우둔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그림을 이해를 못 했는데. 홀로코스트 같은 학살 현장을 그린 겁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시다가 병에 걸리신 할머니께서 부대 밖에서 다른 병원에 이송해서 치료해주겠다고 데려갔더니. 사실은 치료가 아니라 다 한곳에 모아서 죽이는. 그리고 불태우는. 학살의 장면인 거죠. 제가 그 그림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고. 며칠 후에 꿈을 꿨어요. 엄청나게 몸살과 고열에 시달렸는데.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어떻게 보면 그 그림에 있는 내용이 그대로 재현되면서. 비디오로 치면 백워드되는 거예요. 되감기처럼. 불타고 있는 소녀들 옷에 불이 점점 없어지고, 그을림이 없어지고. 완전 백워드죠. 그렇게 되더니 소녀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늘을 보더니. 하늘을 날아서 고향으로 가시는 꿈을 꿨어요. 그 꿈이 뭐랄까. 굉장히 장관이었어요. 지금도 선명한 게 온 하늘을 소녀들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다 날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서 그 내용을 받아 적었어요. 그리고는 '아, 지금 소녀들이 고향으로 오고 싶어 하시는구나. 귀향하고 싶어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사로잡혔어요.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고향으로 모셔올까. 제가 할 수 있는 재주가 음악과 영화 만드는 재주밖에 없으니까. 저는 영화라는 대중 장르를 통해서 어떻게든 영화로나마 고향으로 모셔와야겠단 생각을 했고. 그 이후에 할머님들과 만나면서 나눔의 집에 있는 도움. 수요집회도 나가면서 정대협의 윤미향 대표님을 비롯한 수많은 분의 도움. 그 사이에 증언집이나 자료들을 수십 번 읽었던 것 같아요.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끔찍했고. 지금 저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이 우시고, 슬퍼하시는데. 사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그런 느낌이. 증언집을 읽는 거에 백 분의 일 수준밖에 되지 않아요."

-영화보다 증언집이 훨씬 더 슬프다는 거죠?
"스태프와 배우들이 다 그 증언집을 읽으면서 했거든요. 읽으려면 10페이지 정도는 못 나가요. 중간에 멈추지 않고서는 읽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할머님들께서 증언을 남기신 거고. 238명의 생존자로 정부 등록을 한 분들의 증언인데. 하지만 이건 산 자들의 기록이고, 대부분 돌아가신 한 20만 명에 대한 죽은 자의 기록은 없는 거죠. 증언 사이사이에 동료들의 이름이나 한 소녀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남자로서 너무 죄스러웠고. 이런 전쟁의 폭력성에 대해 치를 떨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일본 제국주의가 뻔뻔하게 자행했고. 지금도 증거가 없다고 하고 있고. 오히려 그걸 명령하고 지시했던 A급 전범들이 모여진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정부 각료들이 참배하고. 전쟁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는, 오히려 자신이 저질렀던 전쟁을 미화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분노를 느꼈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쨌든 14년이 걸렸는데요.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고요. 할머니들은 70년 이상 고초를 겪고 계시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잖아요. 나눔의 집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면서 봉사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취재 과정에서 상당히 아픔과 슬픔을 겪으셨단 말씀을 주셨는데요. 제가 예전에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 데. 막 얘기하다가 학살의 현장이 있다는 거예요. 베트남에 한국군들이 베트남 여성, 아동, 노인 그런 분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던 지역을 가면 누가 다리를 잡는 데요. 그러면서 이제 그건 인터뷰 중에 나온 일종의 에피소드 같은 거로 설명해주시는 건데. 하다가 귀의를 느낀다는 거예요. 이상하게 그 지역만 가면 누군가 발을 끌어 잡아서 못 가게 한다는. 학살의 현장에 가면 귀의를 느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 설마' 제가 그랬었는데요. 실제 제작하시면서 그런 현장 다니셨습니까?
"저는 할머니들과 함께 있으면서 항상 느끼는 게 늘 그런 느낌을 언제나 받았던 것 같아요. 지금 스튜디오 안에도 계신 것 같고. 영화 제작하는 모든 과정에서 함께 하는 듯한 느낌. 그리고 우리 영화가 중국에서 투자한다고. 그 덕분에 중국을 리포터를 가고. 그쪽 현장 근처까지 가봤는데요."

-학살 현장의 근처까지도?
"근처까지. 네, 근데 그게 사실 다 사라지고. 정확한 장소를 모르는 부분도 있고. 사실 중국 정부가 그 부분에 대해 자료를 다 가지고 있고. 최근에 하나, 둘 씩 나오고 있는데. 영화 세트장 안에 실제 일본군이 사용한 모든 무기가 있는, 중국에 있는 관리인들. 특히 중국 군부가 관리하고 있더라고요. 그분들의 소개로 (현장에) 가봤는데요. 중국에서 촬영하는 것에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내부를 봤더니 세트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세트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제로 일본군이 쓰던 막사라던가. (일본이 점령한) 중국 점령지에 있었기 때문에. 탱크나 트럭 같은 거. 심지어 여성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행진하는 퍼레이드 카도 있었어요."

-어디에 그런 게 있습니까?
"거기가 북경 근처에 있는 영화세트장이라고 하는데 갔더니 총소장님이, 우리나라 치면 중령 정도 되는 분이 있더라고요. 북경에서 촬영하면 좋겠단 강력한 바람이 있어서. 여하튼 거기서 봤던 것들이 정말 소름 끼치더라고요. 저는 탱크보다도 소름 끼쳤던 것이 그 트럭이에요."

-실제로 위안소로 끌려가는 여성들을 태웠던 퍼레이드 카라고요?
"실제 일본군이 사용했던 트럭입니다. 그걸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유지·보수해서 가지고 있는 거고. 거기 있는 일본군 탱크들 다 움직이는 거예요. 섬뜩하고 만지기도 싫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라던가. 결국은 중국에서. 중국인 소녀가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말에 (촬영 허가가) 안 됐지만, 너무나 많은 피해자, 조선의 여성들, 중국의 수많은 피해자.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끔찍한 상처는 기억되고, 앞으로 하나의 작은 도구가 되어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제작할 때, 선뜻 제작비를 내겠다는 투자자가 없었어요. 그렇죠?
"그렇죠. 결국은 투자는 많은 전 세계 시민들, 국민께서 후원을 해주셨고. 개인 투자자들, 어떻게 보면 서민들께서 차 팔고, 전세를 월세로 옮기고. 이런 돈들이에요."

-아, 정말이요? 그게 한 분, 한 분의 7만여 명 시민들의 사연이 있는. 그냥 역사네요.
"100원부터 쌓인."

-100원이요?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포털 사이트에 '희망해'라는 모금을 해서. '우리 영화를 도와줍시다'했는데. 캐시 형태로 147원 정도? 이렇게 기부하는 건데. 그러니까 1,000만 원이 모이려면 어마어마한 거예요. 나중에는 그것이 천만 원이 넘고 이천만 원이 넘고. 그런 일들이 있었고. 돈이 아니면 내가 재능기부라도 하겠다. 결국, 영화에 엑스트라나 단역 배우로도 출연해주시고. 물품도 많이 보내 주셨어요. 어떤 분은 쌀을 보내 주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슈퍼마켓 운영한다면서 거의 털어서 주시기도 하고. 사실 촬영 현장이 열악하고 힘든 환경이었어요. 스태프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루 2회 차정도 촬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후원해주신 물품이 순식간에 나가요."

-전체 촬영 스태프가 몇 분 정도 되세요?
"저희가 배우와 스태프 다 합치면 200명 정도 됩니다."

-전투 장면이 많아도 꽤 많고 그래서…….
"저희가 원래 전투 장면을 찍을 예산도 없고 그랬는데, 촬영 시작되고 일주일 만에 예산이 다 고갈됐어요. 그 이유는 저희 배우들이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까지 기다리면서. 리딩을 하면서 예행연습을 했던 배우들이거든요. 그것도 다 자비로. 거의 다 재능기부 형태였고. 재일교포 분들도 거의 자비로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사업을 놓다 시피하면서 (영화 제작에) 참여를 해주셨는데. 그분들께서 고생해서 촬영장에 오셔서. 뭐랄까. 1인 2역, 1인 3역 같은 걸 다 하셨어요. 그런 걸 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게 있어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웃음)
"드리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일단 배우, 스태프분들께 감사드리고. 특히 재일교포 분들께는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그분들의 노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보면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거든요. 얼마 전에 일본 후원 시사회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후원하신 분들 모시고, 많은 일본 분들이 오셔서 영화를 보셨어요. 굉장히 좋았습니다. 일본 분들도 꼭 이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돼야 한다고 하는데. 그 다음 날 우익 블로거가 글을 올렸는데 우리 영화에 출연했던 분들에 대해. 그전부터 우리 영화에 관한 기사가 오랫동안 있었는데 굉장히 무서운 악플들이 달렸었어요. 이분들에 대해 여러 가지 신상이나 이런 것들을 블로그에 올렸단 얘길 듣고 찾아봤더니 있더라고요. 저는 (재일교포 분들께) 너무, 너무 죄송하고. 이분들을 어떻게든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요. 하여튼 수많은 분의 도움, 지금 생각하면 눈물밖에 나지 않는 이야기들. 초기에 너무 빨리 제작비가 소진됐던 이유 자체가 기적이에요. 예를 들면 명량에서 특수효과를 했던 감독님이나 특수 분장 감독님이 베테랑이시거든요. 너무 좋은 의미로 한다고 해서 (촬영을) 도와주러 오셨다가. 신인 배우들이 대사 NG가 안 나는 거예요. 이분들이 도와주러 와야지 오셨다가 배우들 하는 걸 보고 너무 감동하셔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영화를 이렇게 찍으면 안 된다', '천만 원짜리 기계를 가져올 테니, 100만 원 구할 수 없느냐'. 또 세트비가 추가되면서 앵벌이하고 다녔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트 제작하던 분은 카드론을 받아서 제작하고 계시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린 특수효과에서 전쟁 신은 찍을 수 있는 사이즈도 안 되고, 돈도 안 됐었어요. 매일같이 통장 잔고에 10원밖에 없는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비용이 없다고 하니까. 아유, 알았어 하고 다음 날 가보면 폭약을 촬영장에서 심고 계시고. 우리 영화 전투 신보고 깜짝 놀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것을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여전히 많이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분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 개봉까지 못 했겠죠."

-어떻게 보자면 우리 동포들의 힘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우리 역사잖아요. 잊지 말아야 할 슬픈 역사. 여기서 일단 '잊지 말아야 하는' 지우시고. '다시는 있어서도 안 되는'은 쌍시옷입니다. 이런 역사를 만드신 주역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네요. 앞서 캐스팅 관련해서 전부 자비로, 또 자원봉사로 참여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특히 재일동포분들은 현대사에서 보면 그분들도 피해자시잖아요. 결은 달리하지만. 만주에 계셨던 분들, 국내로 오지 못한 분들이기 때문에 슬픈 역사를 갖고 있고. 일본 우익들로부터 당할 수도 있는데. 본인의 피해를 감수하고도 이 영화를 꼭 하려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요?
"<두레소리>란 영화로 도쿄국제영화제에 초대받아서 갔는데. 제가 그때도 아까 말씀드린 '기-승-전-귀향'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계속 <귀향>의 배우를 찾고 있었어요. 우리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리얼리티'거든요. 이 영화는 일본인들이 봤을 때, 양심적인 일본인뿐만 아니라 우익 일본인도 봤을 때 이해할 수 있고, 적어도 화가 나도 용납할 수 있으려면 기본적인 사항들이 준비돼야 한다. 그중 하나가 일본어에 대한 거였어요. 언어적인 완벽함. 그러려면 네이티브가 필요한데. 일본인 배우를 구하려니까 당연히 실패하죠."

-일본인 배우는 (배역을) 안 하겠다는 거죠?
"그렇죠. 그러고 재일교포 분들과 접촉을 해봤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의 삶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 그거는 힘들다 해서 거의 포기를 했었어요. 하지만 거기에 대한 집착 가까운 게 있어서인지. 우연한 장소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 너무 제가 생각했던 일본인 악역? 일본인 배역 중에 주인공인 역할, 기노시타란 역인데. 배우도 아니었고, 사업하시는 분이었어요. 근데 제가 거기서도 2, 3시간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땐 확실히 기억이 나는 게. 제가 귀향 얘기를 했더니 그분이 우시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분이. 제가 생각하면 저는 너무 나쁜 놈이죠. 그분이 후원, 투자, 출연, 온갖 허드렛일. 일본어 교사까지 다 하셨어요. 얼마 전에 일본 후원 시사회 할때 자기가 되게 아끼는 일본인 후배가 영화를 보러 왔데요. 그러고 난 다음에 이틀 동안 전화를 안 받더랍니다. 이틀 후에 전화해서 '왜 안 받냐'고 했더니. 영화 보고 나서 '형님을 볼 수가 없다'고. '당신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했다고 해서.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연기를 했다? (웃음)
"그만큼 일본어에 대한 부분이나 아까 말씀하셨던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면 당연히 재일교포 분들이나 혹은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잖아요. 결국은 우리 영화에 재일교포 분들도 참여하게 해주시고. 일본인 분들도 소수지만 함께 출연해주셔서. 그런 부분에 대한 리얼리티를 살려 주셔서 너무 감사했고. 그분들이 고생하시면서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다가도 이해가 안 가요.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였기 때문에. 나중에 여쭤 봤어요. 어떡해요? 형님, 분위기가 진짜 만들어질 것 같은데. 어떡해요? 그분이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그분의 선조가 경남 거창군이 고향이셨는데. 저희가 거창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주인공인 최리 양도 거창이 고향인데. 그분이 선조 분들의 무덤도 거기 계시데요. 밤하늘 보면서 울면서 그러셨어요. '저는 영화 안 만들어져도 괜찮다고. 나는 이 영화 출연 결심하면서 내가 귀향을 했다'고. 그런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에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저도 눈물이 나네요. '내가 귀향을 했다'.
"저희 할아버지도 미쓰비시에서 징용으로 일하셨거든요. 그러다 해방 후에 해방선을 타고 오셨거든요. 저도 해방선을 만약 타지 못하고, 그런 루트가 없었고. 그래서 주저앉으신 분들이 매우 많잖아요. 강제로 끌려가셨다가 남아 계셨던 분들."

-주로 그런 분들이 많으시죠.
"그렇죠. 저도 어쩌면 형님같이 일본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는. 그런 걸 생각하니 너무 가슴 아팠고. 저희 영화 주인공 강하나 양도 재일교포 4세로 오사카에 있거든요. 그 용기. 출연 결심할 때 나이가 중학교 2학년, 촬영 시작했을 땐 중학교 3학년, 지금은 고1로서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아주 뛰어난 친구예요. 당차게, 힘든 환경 속에서도 이걸 하겠다고 부모님 앞에서 펑펑 울고 그렇게 출연했던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정래 영화감독.
 조정래 영화감독.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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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이게 정말 살아있는 산 역사를 우리 후대들이 (영화를) 잘 만들어서 할머니들의 넋을 잘 기리는 작품 하나 나왔다고 말씀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영화 보면서, 저와 함께 봤던 모든 사람이 너무 울었어요. 앞에는 분노가 막 치밀고, 뒤로 가면 다들 안 우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였는데요. 손숙 선생님이 캐스팅된 배우 중에서 제일 유명한 분인데. '시나리오 받자마자 나는 울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떻게 해서 손 선생님 찾아가서 '이분이다'라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손숙 선생님 뵈면 이미지가 제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 만나 뵀을 때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선생님은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대선배님이시고, 연극계 연로이시기도 하고. 연기하시는 걸 보고 '정말 대배우시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의 눈이 딱 소녀의 눈이세요. 그리고 뭐랄까. 소녀 같은 면이 너무 많으세요. 촬영 내내 '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선생님도 뵈면 나이를 안 드셨어요. 사실은. 그렇다고 해서 철이 없다는 느낌이 아니라 선생님 당신 자체가 나이와 관계없이 사시는 분이시더라고요. 특히 제 아내가 손 선생님 굉장히 좋아해요."

-저도 좋아해요. (웃음)
"그래서 손 선생님께 시나리오 보내 드렸죠. 손 선생님께서 전화로 연락이 와서 '많이 울었고, 만나자'라고 해서 만나 뵙는데. 선생님께서 일사천리로 말씀하셨어요. '나 영화 보고 많이 울었고, 나 이 영화할 거야. 참고로 얘기하면 난 개런티는 안 받을 거야'라고 쭉 말씀하셨어요. 그냥 가만히 어쩔 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그다음 말씀이 '대신 영화가 잘 되면 나에게 인센티브를 줘. 그러면 그걸 다 기부할 거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제가 이 영화 준비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겠습니까."

-눈물 나셨을 것 같아요.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그 시간 이후로 선생님이 (촬영 현장에) 투입된 거예요. 당신도 주변에서 막 자료를 조사하시고 그러면서. 마음으로 함께한 분? 촬영 내내 천 원 한 장 받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차비라도 드리면 오히려 혼내시고. 우리 영화에 거의 재능기부에 가까운 출연자, 스태프들. 후반 작업 감독님들 말할 것도 없고. 그분들은 저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그분들이 전부 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에요."

-이 영화 앞서 얘기했던 대로 일본군, 강제로 끌려간 성노예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한 대목이 '리얼리티'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대목은 리얼리티, 또 어떤 대목은 극영화로서의 허구적 상상? 이런 게 섞였을 것 같은데요. 리얼리티에 가장 충실했던 장면, 허구에 가장 충실했던 장면이 궁금하네요.
"영화를 보셔서 잘 아시고. 트레일러나 여러 가지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실 수 있을 텐데. 우리 영화에서 어떤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과거에 돌아가신 위안부 소녀들의 영혼을 끌어안는 얘기 자체가 판타지적 요소죠. 제가 꿈을 꿨던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형문화재인 진도씻김굿판 그런 것들을 영화 속에다 넣고. 하지만 리얼리티를 구현하려고. 고증이나 증언집을 철저하게 바탕으로 하면서도. 저는 이 영화를 하면서 아팠고, 증언집에 있는 내용으로 꾸미면 아무도 영화를 안 볼 것 같았어요. 저부터도 못 보고."

-저도 사실 영화 보러 갈 때 망설였어요. '저 끔찍한 장면을……. 아, 어떡하지?'. 그런 생각 다들 하실 거예요. 보고 싶긴 한데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고 메시지 보내는 분들 많거든요.
"저희가 후원 시사회 등 하고 있는데. 한 여성 관객께서 그런 말씀 하셨어요. '저는 이 영화 보고 남자 감독이 만든 느낌이 안 들었다'. 여성 감독이 만든 작품에 대해 느꼈던 것을 설명해주시더라고요. 그분 말씀에 따르면 '아프기만 한 부분이나 최대한 선정적인 부분은 배제하면서 소녀들이나 할머니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지만, 그 고통이 오롯이 온다.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해준 감독님께 감사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포인트가 고통이나 아픔에 있는 게 아니라. 이분들을 위로하고, 고향으로 모셔오는 장면에서 눈물이 너무 났고. 어떻게 보면 치유하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란 표현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는 표현을 했는데요. 저는 남성 감독으로서, 남자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많은 분이 공감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전 개인적으로 평생 할머님들이 겪은 고통은 절대로 모를 거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저는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만들었고. 영화 속에 있던 모든 장면을 구현할 때 제 머릿속에 나온 게 아니라 철저하게 증언집을 바탕으로 하고. 수많은 나눔의 집에 계신 분들께 계속 자문하고. 할머니들 또 주변 여성분들의 조언을 구했고.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감독 조정래가 만든 게 아니라 7만5천 명이 같이 만든 영화란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많이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에 보면 위안소의 풍경이 나옵니다. 실제로 그랬을까. 과거에도 그랬을까. '저건 영화 세트장에 불과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저는 인상적인 장면이 놋대야예요. 대야 속에 물이 잠겨 있는데. 그 물이 핏빛이 느껴졌어요. 어떤 처리를 한 건지 모르겠는데. 소녀들이 씻은 물 같은 느낌? 이런 게 있고. 위에 올려 있는 작은 상자가 어떤 건지. 콘돔인가요? 하여튼 그래서 일본 스타일의 깔끔한 내부. 내부는 깔끔하지만 담고 있는 소도구는 참담한.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거는 어떻게 과거의 역사를 재현한 건가요? 아니면 허구로 만들어진 건가요?
"그건 완벽하게 고증으로 재현한 겁니다. 위안부 할머니 피해자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보면 역사관이 있어요. 역사관 지하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것이 실제로 소녀들이 고초를 겪었던 위안소 안의 풍경이에요. 당시 썼던 팻말이라던가, 담요라던가. 이런 부분들이 갖춰져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스태프, 배우들이 나눔의 집에 수시로 갔는데요. 배우들 거기 가면 다 울어요. 들어가자마자. 한여름에 저희가 갔어요. 한여름에 가도 밑에 내려가면 희한하게 온도가 엄청나게 차이가 날 정도로 엄청나게 추워요. 저희가 위안소 세트를 만들고 꾸려 놓고 하는데 촬영 자체가 고통이잖아요. 배우분들이 거기 안에 들어갔는데 희한하게. 4월이면 사실 봄이잖아요. 밖에는 따뜻한데 세트장 안에만 들어가면 영하예요. 세트장 바깥에 설치된 부스는 그렇지 않아요. 모두가 겪었던 기묘한 체험인데. 내복을 입고, 다 입고 껴입어도 한기가 뼈까지 와요. '아, 정말 소녀들의 원한이 여기를 맴돌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고요. 많게는 4, 50명씩 받잖아요. 줄 서서. 일본군의 증언에 따르면 '화장실 가는 그런 풍경'이라는 표현을 하거든요. 거기 안에 들어가면 여성의 그걸 씻어내는……. 소독약이 있는 거예요. 위에는 (일본말로) 사쿠라고 하는 콘돔이죠? 그 콘돔을 만들었던 회사는 여전히 콘돔을 만들고 있죠. 일본의 가장 큰 기업입니다. 위안소 설치 자체가 잘 아시겠지만, 일본군이 주둔한 점령지에서 지역에 있는 여성들을 대규모로 강간하면서 생기는 문제들. 범죄, 성병 등을 통해서 군사력이 상실되거나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하자면 시스템화를 시킨 거잖아요. 사기를 진작시키고, 성욕을 해결하고. 어떻게 보면 군사력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했다는 게 가장 극악무도한 시점이거든요. 단순한 성폭력과 강간의 문제가 아니라 성노예란 말의 함의가 그 부분인 거든요. 이걸 제도화시키는, 일본 병사로부터 죄의식을 거세시키는. 당연하도록. 바깥의 팻말도 그런 식으로 해놓고. 이거는 그야말로 '지옥'이에요. 아이들이잖아요."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대부분 소녀가 초경도 하지 않은 소녀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데 특히 조선의 처녀들은 우리 예전에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그런 의식 있잖아요. 깨끗하다는 의식? 굉장히 많이 일본군들이 (조선의 처녀들을) 선호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나이 어린 병사들이 연애하는 느낌이 난다는. 물리적으로 사람이 견딜 수가 없죠. 대부분이 며칠 만에, 몇 달 만에 돌아가실 수밖에 없어요."

-그 국가폭력을 여태까지 책임지지 않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들을 때마다 분노가 치미는 데요. 영화 속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일본군 장교가 하는 말인데요.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 황군을 위한 암캐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 대사는 고증에 있었던 건가요? 영화적으로 만들어진 건가요?
"할머님들 증언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너희는 인간이 아니다. 당연히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증언은 아주 많아요. 쉰들러 리스트 이야기, 홀로코스트와 비슷해요. 줄을 세워 놓고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 할 수 없는 사람 구분하고. 할 수 없는 사람은 가스실로 바로 갑니다. 죽은 시신은 또 유대인이 치워요. 줄 서서 돌잖아요. 똑같은 장면이에요. 사실은. 이렇게 해놓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 사람, 관리가 되면 하는 거고. 죽이는 거죠. 강일출 할머님의 그림처럼 집에 데려간다고 한다든지 해놓고 죽이는 거죠. 우리 영화 말미가 1991년에 용기 있게 세상에 처음 나오셨던 김학선 할머니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증언이 바로 그런 내용이잖아요. 자기네들 갖다 쓰고 싶으면 쓰고, 고장이 나거나 병이 나면. 말하자면 '다 버리거나 죽여 버리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끔찍하죠. 그것을 시행했던 일본군들도 잔학무도하지만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고안했던 자들이, 지금도 소위 말해서 일본의 어떤 A급 전범으로 있었던 사람들의 손자가 총리고,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거나 기업을 하고 있고. 그들이 지금도 너무나 뻔뻔하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함으로써 도대체 독일의 반의반에 반의반도 안 되는. 쥐꼬리만큼의 사죄도 없어요. 우리 영화 후원하신 일본인들도, 혹은 지인들이 와서 보고 나서. '일본인들이 봐야 한다'고. 그중 한 분은 아예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할머니인데. 무슨 시민사회 운동하시는 분도 아니고. 66세인가 하시는 일본인인데. 말씀하시기를 '영화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심한 짓을 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영화는 정말 일본인 보고, 아베가 봐야 하고. 소녀상은 왜 옮기라는 거냐. 소녀상, 거기 있어야 한다'. 오히려 (일본인 할머니가) 너무 흥분하셔서.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하고 고마워해야 하는데 저도 막 흥분이 되더라고요."

-지금 뭐, 있을 수 없는 과거의 끔찍한 전쟁 범죄와 관련해서 터무니없는 불가역적 합의를 해서 국민적 반발이 있는데요. 이 영화 상영관이 부족하다는 걱정이 많이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영화 보시고. '상영관 부족하면 강당에서라도 틀겠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상영관하고는 어떻게 얘기가 되고 있나요? 롯데시네마가 이 영화를 틀기로 했죠?
"지금 일단 이 영화를, 투자도 안 되고. 국민이 성금을 모아 주셔서 만들게 됐고. 모든 분께 감사드리고. 개봉 날짜 받기 전에 배급사가 굉장히 공을 들여 주셨어요. 작지 않은 회사였고. 그 회사가 이 일을 맡을 때. 담당자께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어요. 괜찮겠냐고. '감독님, 영화 봤는데. 너무 좋던데 뭐가 문제에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죠, 문제가 없어야 하는 영화죠. 오히려 보수가 봐야 하는 영화고. 보수, 진보가 없는 영화죠. 오히려 그분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던데.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배급하시는 분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건 사실이고요. 어쨌든 첫날, 15일에 (영화) 오픈이 됐는데. 그날 다 매진이 됐어요. 그렇다면 상영관이 점점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조금 배급사 분들이 봤을 때는 더 노력해야 하는 수치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 건 사실이고. 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영화랑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겠죠. 개봉관이 하나 열리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감사하고. 상상도 못 했어요. 솔직히 저는 배급사가 잡혀서 개봉되는 걸 상상도 못 했어요. 만들어지는 것도 그렇고. 그냥 나오면. 저는 배급사가 정해지기 전부터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까지 번역을 끝내 놨어요. 자막을 다 만들어 놨어요. 전 세계를 다닐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배급사께서 이걸 선택해주셨잖아요. 상업 장편 영화를 하고. 굉장히 그쪽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죠? 참 든든하고요. 지금 상황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분들의 노력과 국민 여러분들이 예매 운동을 통해서. 지금 SNS상에서 많이 말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예매를 많이 해주시면 자동으로 프로그램화돼 있어서. 극장이 열릴 수가 있는 거죠."

-1인 1예매 운동을 해야겠네요. (웃음)
"그런 말씀도 하시고. 어떤 네티즌 분은 '3.1절에 태극기를 들고 귀향을 보러 가자'는 말씀도 있고. 대단히 많은 분께서 동참하고 있으니까 극장이 많이 열릴 거라 믿습니다."

-저도 그 영화 미리 봤는데요.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아요. 선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과는 같이 봐도 좋을 영화고요.
"일단 15세 관람가니까요."

-우리 역사가 얼마나 아픈지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면 좋겠단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었습니다. 손숙 선생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위안부란 말이 적합한 겁니까. 이런 말씀을 기자들한테 하셨습니다. 제가 위안부가 어떤 한자를 쓰는지 국어사전으로 찾아봤는데. 위로할 위에, 편안한 안에, 며느리 부자를 쓰더라고요. 우리를 며느리 삼은 건가? 이런 생각마저도 드는데. 앞서 상영관도 말씀해주셨고.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사실은 우리 역사고, 우리의 아픔이고. 적극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치유하고 개선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상영관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어떠세요, 감독님? 제가 너무 아픈 질문을 드렸나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다음 주 24일 개봉이니까요. 아직 시간이 있고요. 저는 극장 관계자 여러분께서 극장을 많이 열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확실히 믿고요. 영화를 보시면 동의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손숙 선생님 말씀대로, 위안부란 표현은……. 이용수 할머니 말씀을 대신 할게요. '내가 왜 위안부냐. 내 이름은 이용수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 있다. 나는 내 자랑스러운 이름, 이용수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많이 울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들께서도 '성노예'라는 표현도 힘들어하시는 표현입니다. 위안부 피해자 여성, 할머니, 우리가 그렇게 그분들을 지칭하지만, 역사 속에서 모든 삶 속에서 당신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작은 소녀였고. 한 여성으로서 당신들의 삶을 당당하게 꾸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서 한 소녀의 위안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지. 위안부의 삶을 담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셔서 한 소녀의 이야기에 동참해주시고,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미처 다 밝혀내지 못한 우리의 역사, 과거사. 이 문제가 사실 이 한 편의 영화로 어떻게 다 치유가 되겠습니까. 이 영화를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첫걸음을 내딛는 게 아닐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요. 오늘은 저희가 여기까지 모시고요. 조만간 영화가 잘 될 테니까. 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댓글로 응원해주셨는데요. 다 소개 못 드리고 몇 가지만 소개해드릴게요. '감독님이 보셨을 때 이 장면을 꼭 봐야 한다는 장면이 있습니까, 어떤 건지 설명해주세요','한 번의 사죄의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국이 존재하는 한 이 이야기는 꼭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꼭 봐야 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감독님'. '영화 잘 돼서 10억엔 필요 없게 다 벌어 갑시다', '가족이 함께하려고 합니다', '새누리당 의원들 꼭 보세요', (웃음) '감독님 눈물 나오려고 하시나 봐요', 페이스북으로 보니까 이게 다 보이나 보죠? '감독님 눈망울에 (눈물이) 아른아른하십니다', '조정래 감독님 파이팅'. 이런 의견을 주셨습니다. 이런 거로 힘내시고요. 끝으로 꼭 봐야 할 장면은 직접 영화로 확인하세요. (웃음)
"아파서 보러 가기가 힘들 거란 말씀 많이 해주시는데. 우리 영화에는 아프지만, 슬프지만 어떻게 보면 영혼으로서나마 고향에 오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스포일러 같지만, 꼭 이 말씀 드리고 싶어요. 영화관에 오셔서 함께 2시간을 계시면 끝에 타향에서 돌아가셨던 소녀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꼭 함께 해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영화에 반전도 있고, 코믹한 장면도 있어요. 웃음이 피식 나는 장면도 있으니까요. 여러분들 꼭 챙겨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감독님,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끝>


태그:#조정래, #귀향, #팟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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