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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알게됐다. 대학생 오빠를 둔 친구가 가져온 책. 나는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읽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랭보의 생애를 영화로 만든 <토탈 이클립스>를 봤다.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로오가 열연했어도 랭보와는 그걸로 안녕. 내 수준에서 이해 안 되는 책이나 영화하고는 멀어졌다. 먹고 살기 바빠졌으니까.   

제굴이가 돌 지나고부터는 어린이집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나는 일하는 엄마, 방학 때마다 '아기 제굴을 어디에 맡길까' 고민했다. 제굴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맞은, 30일 간의 여름방학은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다행히도 방과 후부터 밤까지 제굴을 돌봐주던 분이 일찍 출근해서 낮밥까지 차려줬다.

제굴이가 열한 살 때, 나는 자발적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연장했다. 꽃차남을 낳았으니까. 제굴은 형으로서 동생의 전투력을 고민했나. 커다란 무선자동차를 누워있는 아기 쪽으로만 조종했다. 아장아장 걷는 꽃차남을 뒤에서 뻥 찼다. 꽃차남은 세상에 온 지 3년쯤 됐을 때, 반격을 시작했다. 마침내 형제는 치고받고 싸울 수 있게 발전(?)했다.

내가 꿈꾸는 지상낙원은 제굴이와 꽃차남이 안 싸울 때

고등학생 제굴과 유치원생 꽃차남은 겨울방학을 맞았다. 이 '의좋은 형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싸운다. 서로 몸을 '터치'한다. 밀리는 쪽은 꽃차남, 한쪽 눈에 있는 쌍꺼풀이 풀려서 '무쌍'이 될 정도로 많이 울었다. 평화의 순간도 있다. 제굴이가 음식을 하고, 맛있는 냄새에 마음이 보들보들해진 꽃차남이 제비처럼 입을 벌릴 때. 우리 집은 지상낙원이다.

유치원 방학 숙제라서 떡꼬치 만드는 제굴과 꽃차남. 
제굴은 원해서 삭발했지만 엄청난 후회 중. 후드 티 모자를 벗을 수 없다.
 유치원 방학 숙제라서 떡꼬치 만드는 제굴과 꽃차남. 제굴은 원해서 삭발했지만 엄청난 후회 중. 후드 티 모자를 벗을 수 없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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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들이 싸우지 않는 지상낙원은 내 희망사항일 뿐. 다투는 아이들 때문에 나만 늙고 못 생겨진다. 제굴과 꽃차남은 부엌에서도 싸웠다. 떡꼬치를 만들고, 그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유치원 인터넷 카페에 올리라는 방학 숙제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제굴은 닥쳐서 하면 부담되니까 미리 하자며 떡을 사왔다. 꽃차남은 거들떠도 안 봤다. 개학 하루 전에야 떡꼬치를 만든 이유다. 

"떡꼬치 때문에 짜증났어요. 그게 내 숙제예요? 꽃차남 숙제인데 나만 애타고. 진짜 걔는 짜증난다고요!" 

제굴은 떡볶이 떡을 반으로 잘랐다. 꽃차남 보고 "이거 꼬치에 꽂아"라고 했다. 꽃차남은 몇 개 하더니 꼬치로 쓰는 나무가 부러진다고 징징거렸다. 제굴은 원래 설탕, 다진 마늘, 케첩, 고추장으로 양념을 만든다. 그러나 더 맛있게 하려고 유명 블로그 레시피를 참고했다. 참기름, 간장, 고추장, 물엿으로 양념을 만들었다. 골고루 섞는 일은 꽃차남이 하도록 지도했다.

제굴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떡꼬치를 구웠다. 동생 손이 델 수도 있으니까 옆에 서서 보라고만 했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떡꼬치에 양념을 바를 차례. 제굴은 양념 바르는 붓(이모가 사준 것이라 몹시 아낌)을 썼다. 도자기에 무늬를 새겨 넣는 장인처럼 아무 말 없이 양념 바르는 일에 몰두했다. 꽃차남은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떼를 썼다.

"안 된다고! 이 붓은 손잡이가 나무야. 너 같은 애가 바르면 손잡이에 양념이 묻어. 그러면 씻어야 되고, 썩을 수도 있다니깐."
"주라고! 내 숙제인데 왜 형이 하고 난리야?"

제굴은 떡꼬치에 양념 바르는 일을 혼자만 하려고 했다. 꽃차남이 하다가 솔 손잡이에 양념이 묻을까 봐 걱정했다. 형아 마음을 아나? 꽃차남은 떼를 써서 기어이 솔로 양념을 발랐다. 물론, 솔 손잡이에도 양념을 묻혀가면서.
 제굴은 떡꼬치에 양념 바르는 일을 혼자만 하려고 했다. 꽃차남이 하다가 솔 손잡이에 양념이 묻을까 봐 걱정했다. 형아 마음을 아나? 꽃차남은 떼를 써서 기어이 솔로 양념을 발랐다. 물론, 솔 손잡이에도 양념을 묻혀가면서.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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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때라면, 바로 제굴의 주먹은 꽃차남에게 날아갔을 거다. 그러나 그곳은 제굴의 수련장인 부엌, 제굴은 양념 바르는 붓을 동생에게 넘겨줬다. 꽃차남은 떡꼬치에 양념을 발랐다. 물론, 붓 손잡이에도 잔뜩 묻히면서. 제굴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면서 얼른 솔과 손잡이를 분리시켰다. 그리고는 깨끗이 닦았다.

안 그래도 제굴 마음은 일주일째 편하지 않다. 제굴은 요리하면서부터 '음식에 머리카락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요리사 정창욱씨를 보면서 삭발머리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나는 "아기 때 네 머리 밀어준 적 있어, 안 예뻤어"라고 말했다. 제굴은 사춘기 소년, 머리발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삭발은 포기했다.

"아악! 나 아닌 것 같아... 삭발 안 말린 엄마 때문이에요"

자고 또 자도, 시간이 아주 많은 겨울 방학. 제굴은 다시 "삭발하고 싶어, 삭발할래!"라고 했다. 미용실에 가서 "삭발해주세요"라고는 못 하겠다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열흘 동안 들볶았다. 나는 결국 따라나서서 제굴이가 원하는 말을 해줬다. 5분도 안 돼서 제굴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삭발! 제굴은 "맘에 들어"라고 했다. 딱 1시간 동안만.

"아악! 나 아닌 것 같아. 엄마 때문이에요. 진짜 왜 그랬어요? 왜 끝까지 안 말렸어요? 때려서라도 말려야지요."
"진짜냐? 다음부터는 엄마가 막 장풍 쏘면서 말린다이."
"장난 아니라고요. 개학할 때까지 머리 안 자라면 어떡해요?"

미래의 주방장 강제굴, 먹어보고 싶다는 음식이 생기면 음식점에 데리고 간다. 엄마 아빠는 거의 먹지 않는 초밥도 엄청 먹었다.
 미래의 주방장 강제굴, 먹어보고 싶다는 음식이 생기면 음식점에 데리고 간다. 엄마 아빠는 거의 먹지 않는 초밥도 엄청 먹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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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의 마음을 좀 알겠다. 나는 불혹을 넘긴 아줌마인데도, 미용실 원장님이 맘에 안 들게 머리를 해준 날에는 밥도 못 먹는다. 그래서 꽃차남을 재우고는 제굴 침대로 갔다. 음식만화책 <오므라이스 잼잼>을 읽고 있던 제굴은 나를 보자마자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문지르며 절규했다. 머리카락과는 상관없는 문제로 화를 냈다.  

"엄마, 왜 요새 밥상 사진 안 찍어요? 아침에 내가 차린 돈지루 사진도 안 찍었지요?"
"그게 돈지루야? 된장국에 고기만 엄청 많으니까 놀랬지. '모닝 육식' 못 하는 니네 엄마 밥 먹지 말라고 시위하는 줄 알았어. 밥상을 차리면 설명을 해줘야지. 식구들 다 자는데, 새벽에 밥해놓고 들어가서 자 버리면 어떻게 아냐고?"

제굴은 돈지루도 모르는 엄마를 답답하게 여겼다. 돼지고기 비계와 살코기, 감자, 양파 등으로 끓인 일본식 된장국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된장은 끓일수록 깊은 맛이 나는데 미소된장은 끓이고 한 김 식혔을 때가 맛있는 거라고. 드라마 <심야식당>을 보면, 마스터는 손님들이 원하는 메뉴를 만들어주는데 돈지루는 기본 메뉴로 나간다고.

음식 얘기에 기분 좋아진 제굴, 일본 삿포로에 있는 돈가스 식당에 가고 싶다고 했다. "돈가스랑 돈지루랑 채 썬 양배추랑 나오는 집이에요"라며 입맛을 다셨다. 근데 엄마는 싫어할 거라면서 "돈가스 고기 두께가 팔뚝만 해서 속은 덜 익혀서 먹는 거예요"라고 했다. 그런 돈가스를 집에서 만들려면 튀김 솥이 필요하다는 요구사항까지 말했다. 

"튀김 솥 사줄게. 네가 밥상 차리면 사진도 꼬박꼬박 잘 찍고. 그러니까 돈지루 만들어."
"싫어요. 내가 하는 건 진짜 돈지루가 아니야. 흉내만 내는 거라고요."
"강제굴, 돈지루 다시 안 끓이면, '빡빡이'라고 불러버린다."  

제굴이가 만든 수제 돈가스와 돈지루. 돈지루 흉내만 내는 거라서 부끄럽다고 했다.
 제굴이가 만든 수제 돈가스와 돈지루. 돈지루 흉내만 내는 거라서 부끄럽다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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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이' 아들이 끓인 아빠 해장국

그날 밤, 나는 제굴에게 "잘 시간 넘었어"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제굴은 마음 놓고 텔레비전을 켜고 <심슨>을 봤다. 오전 2시 넘어서 제 방으로 자러 갔다. 그때까지도 남편은 안 들어왔다. 오전 6시, 제굴의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굴은 잤다. 나는 제굴 방으로 갔다. 알람을 끄고 와서 다시 안방 침대에 누웠다.

남편은 능력자.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을 뿐인데도 안방에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굉장히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 가기 위해서 일어난 남편은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괴로워하며 제굴 방으로 갔다. 자고 있는 아들을 흔들면서 "해장국 좀 끓여줘라"고 하소연을 했다. 늦게 잔 제굴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아빠가 많이 약해졌더라고요. 예전에는 아무리 술 많이 먹어도 혼자 일어나서 해장국 끓여 드셨잖아요. 근데 힘든가 봐요. '이제부터는 내가 아빠 해장국도 끓여 드려야 되나보다' 생각하고 일어났어요."

순간, 제굴은 좀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느끼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해장음식으로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손쉽게 해장라면을 끓여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제 방 침대에 누운 아빠를 보고는 마음이 약해졌다. 찬물에 다시마랑 멸치를 넣고 끓여서 육수를 만들었다. 콩나물을 넣고 나서는 뚜껑을 열고 끓였다.

남편은 해장국을 먹고는 "아, 살 것 같다"라고 했다. 오래 전, 나도 남편 해장국을 끓인 적 있다. 요리 좀 하는 동생 지현까지 불러서. 이유는 모르지만 콩나물은 죽이 됐다. 북어는 풀어지지가 않고. 그래도 남편은 살겠다고 국물을 마셨다. "아, 살 것 같다"는 말은 안 했다. 그 뒤로는 항상 자력으로 해장국을 끓여먹었다. 제 아빠에게 이런 슬픈 사연이 있는 줄 알고 있나. 제굴은 말했다.

"아빠, 다음에는 북엇국 끓여 드릴게요."

제굴이가 끓인 아빠 해장국. 술을 많이 마신 남편은 국물을 먹고는 "아, 살 것 같다"고 했다.
 제굴이가 끓인 아빠 해장국. 술을 많이 마신 남편은 국물을 먹고는 "아, 살 것 같다"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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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주방장 삭발, #해장국, #돈지루,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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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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