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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예정된 시기보다 6개월 이상 일찍 마라도를 떠나기로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골프카 때문이었다. 견디다 못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어차피 떠날 곳이었으므로 이런저런 미련을 완전히 접게 해준 골프카가 오히려 고마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미우나 고우나 15여 년 동안 마라도에 정 붙이고 살아온 남편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했다. 그날도 다른 짜장면집에서 호객용 골프카로 손님을 다 실어가 버려 우리 가게 앞을 걸어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마침내 폭발했다.

당장 나가자고, 제발 부탁이라고, 울며불며 남편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안 그러면 미쳐 죽을 것만 같으니, 나 좀 살려 달라고 죄 없는 남편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남편은 한참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더니, "그래, 가자"라고 내뱉었다. 그 한 마디가 누군가 내 목을 조여오던 손을 놓아버리게 한 것처럼 숨통을 탁 트이게 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날부터 우린 일사천리로 이사를 준비했다. 다시 평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결혼하기 전 살던 내 집으로 말이다.

상자에 들어갈 수 있는 짐들은 택배로 부치기 시작했다. 상자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은 두고 가기로 했다. 마라도에 살러 왔던 뭍사람들의 이사법은 대개 이랬다. 버리고 가는 것. 가구와 같은 큰 짐들을 실어 나르려면 바지선을 동원해야 하고, 항에 닿으면 다시 이삿짐 트럭으로 옮겨 실어야 하고, 그 트럭이 다시 바다를 건너야 하고…. 싣고 가느니 새로 사는 것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택배로 부치는 일 역시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박이 어려운 선착장은 풍랑이 조금만 일어도 짐을 들고 오르내리기가 힘들 만큼 배가 들썩였다. 자칫하다가는 배와 선착장 사이에 끼이거나 바다로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한 번에 두세 상자 정도밖에 실어 나르지 못했다.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생채기, 마라도

토·일요일이나 빨간 날만 영업을 하고, 대부분의 날들을 짐을 부치는 데 소진한 다음, 못다 한 제주 유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제야 제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제주의 진짜 모습은 관광 안내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막 올레 열풍이 불던 때였다. 몇몇 사람들은 올레 어딘가에 가게를 차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마라도가 싫으니 제주 본섬도 싫었다. 올레고 뭐고 다른 곳에 눈길도 주지 않고 육지로 내빼고 싶었다. 만약 그때 마음을 달리 먹었더라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장사 수완이 있었더라면 두 번 다시 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결국 이렇게 다시 제주로 내려와 살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로지 섬을 탈출하고 싶다는 절박함에 붙들려 있던 내 마음을 제주 본섬이라고 비집고 들어올 수는 없던 때였으니.

마라도는 내게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생채기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봉합되고 기억은 서서히 잊힌다지만, 내겐 화석으로 남아버린 상처들이 몇 있다. 마라도가 단연 으뜸이다. 상처에 대한 내성도 사람의 성정에 따라 달라진다. 남편은 오랜 세월 정을 나누고 살던 곳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을 당한 셈이라,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상처가 클 것 같은데, 훨씬 더 잘 극복해내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영 회복이 안 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을 접어버리고 눈길을 주지 않으면 나머지는 견딜만 한 듯했다. 그래서 남편은 평택에 간 이후로도 마라도를 그리워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결국 딸아이까지 데리고 마라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마라도가 지척인 이곳에 와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내가 언제 다시 마라도에 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섬에 들어서 섬처럼 살다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추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누구와도 왕래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내가 처음 마라도에 가서 한달살이를 했던 기원정사는 나와 남편의 작은 쉼터였다. 절을 지키던 처사와 보살 부부는 머나먼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섬에서의 부대낌이나 외로움의 총량이 우리보다 더 컸다.

가끔씩 절에 들러 그 부부와 차나 술을 마시며 아웃사이더들의 비애를 나눴고, 절을 찾아온 여러 예술인들이 덤으로 우리 가게까지 와줄 땐 예의 그 긴꼬리벵에돔으로 마라도살이의 특권을 과시하곤 했었다. 커봐야 40cm를 넘기는 정도인 그 물고기가 육지촌놈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마라도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마라도 해녀할망들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남편을 만나게 해준 마라도 기원정사
 나와 남편을 만나게 해준 마라도 기원정사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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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가장 가까웠던 이웃은 횟집과 민박집을 겸하던 '서바당'이었다. '서쪽 바다'라는 뜻의 서바당은 지금도 남들 다 하는 짜장면집을 마다하고 고집스럽게 횟집을 하고 있다. 장모인 해녀할망이 물질을 해서 소라나 전복·문어 등을 잡아오고, 손위 처남이 낚시로 고기를 잡아와 수족관을 채워 놓으면 사위가 회를 떠서 손님들에게 내어준다. 우리가 마라도에서 짜장면집을 할 때도 누누이 강조했던 것인데, 마라도에 오면 짜장면을 먹을 것이 아니라 그곳 청정바다에서 나는 바닷것을 먹어야 한다.

마라도 바다는 배로 15분 거리에 있는 가파도 바다와도 다르다. 수심 200미터의 해저가 있고, 그곳을 지나는 조류는 우리나라에서 진도 다음으로 세다. 그런 조류를 견디고 살아가는 바닷것의 몸에는 생명 이상의 것이 깃들어 있을지니, 맛으로 따지자면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온 섬이 짜장면집으로 뒤덮인 오늘날, 마라도에서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서바당이다. 진귀한 자연산 회를 아주 착한 가격에 판다. 꿋꿋이 지존을 지키고 있는 서바당에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마라도를 가거든 꼭 한번 들러 보시기 바란다. 참, 민박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가족이 특별했던 이유는 마라도 토박이이기 때문이었다. 제주뿐만 아니라 여느 시골에 가도 토박이와 이주민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골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제주에서는 섬사람의 특성이 더해져 서로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렵고, 마라도는 정말 손바닥만 한 섬이라서 그 차이가 매번 극명하게 드러나곤 했다.

그런 곳에서 토박이인 서바당네와 육지것인 우리 부부는 꽤나 가깝게 지냈는데, 그런 관계는 앞으로도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왕래야 그 집 사위인 젊은 사장과 많이 했지만, 나에겐 그의 장모인 해녀할망이 더 특별하다.

안타깝게도 마라도의 많은 해녀할망들도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마라도로 시집을 간 죄밖에 없는데, 할망들마저 나를 뭍에서 잘못 묻히고 들어온 검불처럼 여기는 듯했다. 남편과 친하게 지내던 할망마저 내겐 따뜻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애써 인사를 해도 데면데면했다.

그에 반해 서바당네 할망은 스스럼이 없었다.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줬고, 우리 가게에도 오며가며 들러줬다. 기련이도 예뻐해줬다. 웬만한 장정 저리 가라 할 만큼 키도 크고 뼈대로 굵었다. 그 시원시원한 말투며, 서글서글한 눈매가 문득 그립다. 웃을 때마다 하회탈처럼 생기던 구릿빛 주름살도.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던가. 남편의 생일 사진이나 기련이 백일 사진을 보면 홀을 꽉 메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건배를 하거나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진즉 마라도를 떠나고 없다. 마라도에 들어온 지 30년이 넘은 어느 하르방은 어렵사리 이주민 최초로 이장까지 하고서도 결국 마라도를 떠나고 말았다.

그곳에 뼈를 묻으려고 온 사람마저도 끝내 버티기 힘든 곳이니, 낚시가 좋아서 눌러앉았건, 몸뚱아리 하나로 돈을 벌러 왔건,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해 가게를 열었건 간에 결국 이방인일 뿐이었다.

2년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던 산책길에서 만난 풍경, 그것이 내게 남은 그 섬의 전부이다. 지금은 모두 이 세상에 없지만, 사랑했던 내 개들과의 산책길, 첫 아이를 가지고 더 열심히 다녔던 산책길, 아이가 태어난 뒤 아이를 품안에 안거나 유모차에 태워 다녔던 산책길, 그 길의 끝에서 만난 일몰과 바다…. 한낮의 소란과 악다구니와 한밤중의 불안들이 일시에 증발하고 없는, 가장 평화롭던 시간들이었다. 오롯이 우리만 존재했던 시간들…, 마라도에서 가장 사랑했던 시간들….

산책길은 여러 갈래였다. 그 중에서도 마음이 힘든 날에 주로 걷던 산책길의 끝에는 아기업개당이 있었다.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든 그곳은 '처녀당' 또는 '할망당'이라고도 불린다. 해녀할망들이 무사히 물질을 하게 해달라고 제를 올리기도 하는 그곳은 기가 얼마나 센지 육지의 큰 무속인들이 와서 며칠씩 머물면서 굿을 하고 가곤 했다. 무속인 한 사람에 따르는 인원이 많게는 십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내 두 번째 시집에도 실었던 아기업개 이야기는 실화라고 한다.

마라도 '아기업개' 이야기

육지의 내로라하는 무속인들도 불러들이는 영험한 애기업개당
 육지의 내로라하는 무속인들도 불러들이는 영험한 애기업개당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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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 마라도가 아무도 살지 않는 금섬이었을 때, 모슬포에 살고 있던 이씨 부인은 버려진 여자아이를 업둥이로 데려다 키웠다. 훗날 이씨 부인이 아기를 낳을 무렵, 여덟 살이 된 여자아이는 그 아기를 돌보는 아기업개가 됐다.

어느 해 봄, 모슬포 해녀들은 마라도 해안에 배를 대고 물질을 했는데, 바다는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고, 소라며 전복 등이 엄청나게 많이 잡혔다. 그러나 해녀들이 떠날 채비를 하자, 잔잔했던 바다가 거칠어졌다. 바다는 배를 묶어 놓으면 잔잔해지고, 배를 타려고 하면 다시 거칠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물이고 양식이고 다 떨어진 날, 가장 나이 많은 해녀와 선주의 아내가 똑같은 꿈을 꾸고 계시를 받았다. 노한 바다를 달래려면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선주의 아내가 이씨 부인이었다. 사람들이 배에 모두 오르자, 이씨 부인은 아기업개에게 바위에 널어놓은 기저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아기업개가 눈치를 채고 해안으로 달려갔을 때 배는 이미 저 멀리 떠난 뒤였다. "나도 데려가 줍서! 제발 데려가줍서!" 아기업개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으나,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3년이 지난 뒤, 다시 마라도에 들어가니, 기저귀를 널었던 자리에 아기업개의 뼈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아기업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당을 짓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아기업개는 마라도의 유일신이다. 국토 최남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 작은 섬에 절·교회·성당이 다 있지만, 주민들 중 신도는 아무도 없다. 주민들은 아기업개를 모시고, 아기업개가 해녀와 아이들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영험이 닿아서인지 마라도 바다에 빠져서 죽은 사람 중에 그곳 토박이들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마라도를 자주 오는 낚시꾼들도 그 아래쪽에서 낚시를 할 때는 노여움을 살까 봐 당 앞으로는 지나가지 않고 빙 돌아간다고 한다. 아기업개가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어서 그랬던가, 내 외로움을 조금만 덜어가라고 그랬던가, 나는 그 산책길의 끝에서 가끔 초를 밝혀놓고 오래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우리의 마라도 시대는 여기서 끝이 난다. 우리는 2009년 9월 30일까지 마라도에 살았고, 10월 1일 마라도를 떠났다. 멀어져가는 마라도를 바라보며 나는 아기업개와 억새와 갯꽃들에게, 철새와 등대와 일몰과 파도에게 미안해했다. 살다가 문득문득 너희들의 안부가 궁금해질 거라고, 변치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잘 있으라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제 '평택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 온라인판 1월 6일자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09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착한짜장면, #자연주의짜장면, #마라도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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