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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9년 새해를 3일 앞두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3주 동안 조리원에서 산후조리를 하면서 간식까지 합해 하루 다섯 끼를 먹었는데, 오로지 먹고 자고 젖 먹이는 일만 해도 칭찬받는, 엄마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간혹 그런 호사가 그리워 딱 한 달만 조리원 신세를 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려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게 함정이지만, 또한 그러려고 둘째를 가진 건 아니지만 말이다. 조리원 생활을 아쉬워하며 마라도로 돌아온 뒤로도 다행히 나 대신 일해 줄 사람이 있어 백일을 넘길 때까지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순둥이였다. 조리원에 있을 때도 다른 산모들이 내 방에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물어볼 정도로 울지 않았다. 잠투정 한 번 없이 잠들었고, 새벽녘에 배가 고파 깨면서 '빼~~' 거리는 게 거의 유일한 울음소리였다.

천장에 매달린 모빌에 줄을 연결해 팔 다리 하나씩 묶어 놓으면 사지를 흔들며 노느라 한 시간, 딸랑이 한 바구니 앞에 놓고 하나하나 입에 넣었다 흔들었다 하느라 한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 뭐 하고 있나 들여다보면 눈을 마주치며 생글 웃어보이고는 다시 놀이삼매경에 빠져들었고, 너무 조용해서 들여다보면 놀던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애 낳고 돌아오니, 너도 나도 짜장면집

놀잇감만 있으면 한 시간도 넘게 혼자 잘 놀던 기련이
 놀잇감만 있으면 한 시간도 넘게 혼자 잘 놀던 기련이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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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앉아서 잠든 일도 다반사였다. 몇 달이 지나고 일을 도와주던 사람이 다시 뭍으로 돌아간 뒤, 내가 육아와 장사를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그리 순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울지 않는 만큼 반비례해서 잘 웃었다. 낯가림도 없어 누구에게나 잘 안겼고, 누구에게나 생글생글 웃어주었다. 손님들은 박수 소리 하나에도 팔다리를 한껏 흔들며 함박웃음을 짓는 갓난아이에게 환호작약했다.

어떤 손님은 그런 기억이 무척 인상 깊었던지 평택에서 가게를 열었을 때 아이를 보려고 찾아오기도 했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마라도를 방문한 지인들 중에서도 우리 첫 애를 아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가 많다.

내가 태교랍시고 한 거라곤 열심히 몸을 놀린 것밖에 없는데, 아이는 어느 평화로운 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순하고 사랑스러웠다. 사는 동안 별로 복이라곤 없는 팔자 같더니, 자식복은 있나 보다고 엄마를 위무해준 아이는 그렇게 우리 부부의 삶 속으로 물처럼 스며들었다.

그 겨울을 넘기면서 마라도 짜장면집 사회에도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갓난쟁이를 안고 마라도로 돌아오니, 우리 가게 왼쪽 억새밭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봄에 완공된 그 건물에는 짜장면집 간판이 걸렸다. 오른쪽 해녀식당은 몇 년 동안 비어 있다가 '해녀'라는 글자가 들어간 상호명의 짜장면집으로 탈바꿈했다. 원래 그 건물은 마라도 해녀들의 공동재산이다. 임대를 하건 매매를 하건 해녀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마라도는 갑들 마음대로다. '갑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두 집안을 말하며, 그 중 한 집안이 몇몇 해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녀식당을 임대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임대료도 임대기간도 세입자가 결정했다. 세입자가 '슈퍼 울트라 갑'인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형식적인 절차가 있었으나, 그마저 파행이었다. 법적 소송까지 갈 분위기였으나, 결국 갑의 결정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안쪽에 위치한 횟집에서도 짜장면 장사를 겸한다고 간판을 내다걸었다. 그로써 십년 넘게 이어져오던 양대 짜장면집 경쟁이 우리 가게가 생김으로써 3파전으로 접어들었다가, 그 이듬해 한꺼번에 세 집이 가세하면서 6파전으로 바뀌었다. 불과 1년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2015년 12월 현재는 스무 집이나 된다고 한다. 봄에만 해도 열 집이라고 들었는데, 이젠 길가에 나앉은 거의 모든 건물이 짜장면집이 된 모양이었다. 가히 '짜장도'답다).

우리 부부가 휴먼다큐멘터리 프로에 방송된 이후로 마라도 짜장면집은 툭하면 전파를 탔다. 어느 집은 국내 최장수 휴먼다큐멘터리 프로에 출연했고, 어느 집은 국내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MC로 있는 프로에 방송되었다.

이런 프로가 방영되고 나면 그 후 한 달 이상 다른 짜장면집은 손가락 빨며 구경이나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 외에도 연예인이 오긴 했어도 아주 잠깐 끼워넣기 식으로 편집된 방송에 나갔을지라도 어김없이 간판에는 연예인의 사진이 커다랗게 내다걸렸다.

휴먼다큐에 출연했다고 큰 맘 먹고 큰돈 들여 달아놓은 우리 간판은 급속도로 퇴색해갔고, 나중에는 그만 떼버리고 싶을 정도로 쪽팔리기까지 했다. 간판의 외형적 상태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내용이 그랬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누구 연예인이 나온 집을 기억할 뿐이었고, 그 연예인이 먹은 음식을 따라 먹음으로써 느끼는 순간적인 동질화면 모든 게 용서되었다. 맛은 없어도 기념은 되었다. 우리는 그런 경쟁에 뛰어드는 것도 싫었고, 초연하고 싶은데 초연해지지 않는 것도 싫었다. 한 고비를 넘겼다 싶으면 더 큰 고비가 찾아오는 게 마라도였다. 

초초성수기인 한여름을 빼고는 우리의 매상은 늘 시원찮았다. 단 한 그릇도 팔지 못한 날도 있었다. 0그릇.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바로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기차 때문이었다.

이것은 요즘 상용화된 전기자동차가 아니라 주로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전동차를 말한다. 그래서 마라도에선 '골프카'로 불렀다. 2005년도에 다섯 대 들어와 있던 것이 2009년도 봄에는 무려 100대 가까이로 불어났다. 마라도에 실제 사는 주민 수의 곱절보다 많은 숫자였고, 주민등록상의 주민 수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였다.

마라도에 처음 골프카를 들여오는 일 역시 갑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한쪽 갑이 짜장면 장사를 독점하다시피 해서 큰돈을 벌고 있었다면, 다른 한쪽 갑은 중고 골프카를 들여와 돈을 벌려고 했다. 골프카로 마라도 한 바퀴 도는 데 3만 원씩 받았다. 중간에 식당에 들르지 않는다면 10분이면 충분하고, 들른다 해도 1시간이면 충분했다. 비수기 렌트카 요금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24시간 대여료와 1시간 대여료가 같으니, 이런 폭리가 또 없었다.

마라도에 첫 발을 디딘 관광객들의 공통적인 심리 중 하나는 배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다.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던 골프카 주인들은 걸어서 갈 경우 1시간이 더 걸린다고 호객행위를 한다. 배는 1시간 단위로 오가지만, 반드시 1시간 뒤에 배를 타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여객선에서는 반드시 1시간 뒤에 배를 타라고 안내한다.

성수기 때는 정원 초과 문제로 그렇다고 하지만, 정원 미달 상황에서도 안내는 똑같다. 망망대해 쪼그만 섬 위에 부려진 사람들은 들어오면서부터 나갈 궁리를 하게 마련이고, 골프카 주인들은 그것을 십분 이용했다. 골프카는 늘 부족했고, 마라도에 네 바퀴 차가 떼 지어 굴러다니는 풍경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석유 차량이 모두 섬 밖으로 퇴출된 지 8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돈 벌어주니... 너도 나도 전기차

주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돈 버는 일'에 매료되었다. 너도나도 중고 골프카를 사들여 왔다. 나중에는 중고가 동이 나 새 골프카까지 사들였고, 모슬포에 골프카 수리점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주민들의 생업이 바뀌기 시작했다. 민박집도, 횟집도, 짜장면집도 골프카 장사에 매달렸고, 해녀들마저 물질을 하지 않았다.

선착장은 골프카 주차장으로 변했으며, 경쟁적인 호객행위로 늘 소란스러웠다. 호객행위는 싸움이 되기 일쑤였고, 몸싸움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작이 간단해 안전운행에 소홀하기 쉬웠고, 어린애한테도 운전대를 맡기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사고가 났으나, 보험을 들 수 없는 차량이다 보니, 과실에 대한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도 어려웠고, 배상 문제는 더 어려웠다.

관할 당국인 서귀포시에서 규제를 하려고 여러 번 나섰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회의장에서는 고성과 욕설이 오갔고, 늘 파행으로 끝이 났다. 마라도는 골프카 때문에 더 험악해졌다. 우리는 골프카를 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장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골프카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여서 고민에 빠지기도 했으나, 마음을 다잡는 데 공을 들였다.

결국 우리 가게는 유일하게 골프카 없는 가게가 되었다. 골프카로 심각하게 망쳐져 가는 마라도가 안쓰러워 시청을 찾아가 담당자를 만나 하소연도 하고,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당시에 마라도 골프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중앙 일간지는 물론 공중파 9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골프카가 짜장면과 무슨 상관이냐면,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쫓기도록 만들어 짜장면이고 회고 팔아먹기가 힘들었다. 씽씽 달리는 재미도 한몫해서 가게 앞을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으니, 불쇼를 보여주며 짬뽕 냄새를 풍기는, 우리의 유일한 호객행위도 쓸모가 없었다.

마라도 선착장은 두 군데인데, 한 곳은 우리 가게와 아주 가깝고, 한 곳은 저 멀리 뚝 떨어져 있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배를 대는 곳이 바뀌는데, 멀리 떨어진 선착장에 배를 대는 날이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어야 했다. 구경을 끝내고 선착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아쉬워도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다른 짜장면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골프카가 있었다. 처음엔 4인승을 들여왔다가, 나중엔 20인승을 들여왔다. 우리를 뺀 모든 짜장면집이 다 그랬다. 중고가가 2천만 원에 달했다. 그들은 골프카로 짜장면 호객행위를 했다. 짜장면을 사 먹으면 골프카로 섬 한 바퀴를 관광시켜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20인승 골프카에 올라탔다. 우리는 우리 양옆 짜장면집과 우리 앞 짜장면집 앞에 멈춰 선 골프카에서 손님들이 우르르 내리는 광경을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날이 춥고 관광객이 적은 날에는 그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온 관광객 전부였다. 그런 날은 장사 끝난 것이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는 날이 늘어났고, 우리 부부는 자주 가게 문을 닫고 본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새로운 골프카가 낡은 골프카를 대체하기 위해 자주 바지선을 타고 들어왔고, 섬은 날개 돋친 듯 거침없이 질주하는 골프카에 점령당했다. 그것을 멈출 방법은 없어 보였다. 서귀포시에서도 손을 놓았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섬 사람들은 거칠고 맹목적이었다.

거기에 쉽게 돈을 버는 일에 빠져본 적이 있다면 누구든 멈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이 빠졌다. 비록 단골장사가 어려운 곳일지라도 오로지 맛으로 승부하고 싶었다. 자연주의로 손님을 끌고 싶었다. 그러나 가당찮은 희망 사항이었다. 나는 그만 나가고 싶었다. 임대기간이 6개월가량 남아 있을 때였다. 신랑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육지로 가면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주저없이 '짜장면'이라고 외쳤다. 억울했다. 본의 아니게 시작한 짜장면집이었으나, 신랑의 요리 실력이 너무나 아까웠다. 또한 조미료를 빼고, 설탕을 바꾸고, 유전자 조작 작물을 피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를 자연주의로 한 발짝씩 내딛게 해주었고, 그것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입문하는 길이었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제대로 경쟁해보고 싶었다. 육지 어디를 가도 잘 될 거라 생각했다. 횟집에도 미련이 많았던 신랑은 결국 내 고집을 따라주었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6개월이나 남았는데, 이 섬을 언제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현재 마라도에는 골프카가 없다. 짐을 실어나르는 용도로 한 가구당 한 대씩 허용되고, 나머진 모두 퇴출되었다. 한 2년 전에 서귀포시에서 벼르고 벼르던 칼을 빼들고 강제적으로 마라도 모든 길에다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개인 재산이므로 시에서 퇴출 대상 골프카를 사들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마라도는 다시금 평온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며 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되었고, 짜장면집에 들어가 식사를 할 여유도 가지게 되었다. 골프카가 사라지자 모든 짜장면집이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열 집을 넘어 스무 집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 온라인판 12월 16일자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09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마라도짜장면, #자연주의짜장면, #착한식당,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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