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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학 씨가 표구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 표구 시작 손용학 씨가 표구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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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은 전통적으로 서화의 거리였다. 김홍도, 신윤복 등 당대의 주름 잡던 화가들을 배출했던 도화서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1960-70년대 전성기보다는 쇠락했지만, 인사동은 지금도 고미술과 현대적 화랑이 어우러져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서화가 발달하면 함께 발달하는 것이 있다. 바로 '표구'다. 동양은 예로부터 서화를 감상할 때, 작품만이 아니라 그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표구도 함께 보았다. 표구는 서화를 잘 보존, 전시하기 위한 용도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서화의 발달과 함께 인사동은 표구의 거리가 되었다.

2000년대 고미술시장이 침체되고, 낮은 사회적 인식 속에서 표구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동 주변에는 인생을 표구에 바쳐온 장인들이 있다. (재)종로문화재단은 표구 장인과의 4번에 걸친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표구 장인의 삶을 엿보며, 표구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시작으로 (사)한국표구협회 회장이면서 묵호당 표구사를 운영하는 손용학 씨를 만났다.

표구사에 몸담은 지 햇수로 46년째. 인생의 2/3가 넘는 시간을 이곳에 바쳤다. 15살에 강원도 묵호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서, '동산방'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에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표구가 내 인생'이 될지 말이다. 인사동에서 청춘, 아니 인생을 바친 손용학 회장으로부터 1970년, 표구사의 전성기라고 표현되는 그 시기, 표구를 배우는 과정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표구사에 들어가서 가장 처음 배우는 일부터 물어보았다.

"밥하고 심부름하고 풀 쓰는 걸해요. 한가할 거 같죠? 진짜 바빠요. 풀을 만드는데 보통일이 아니야. 밀가루를 큰 통에 담아서, 매일 물을 갈아줘야 해요. 그리고 풀을 매일 쑤어야 해. 풀 솥이 커다란 시골 밥솥만 하거든. 한 솥 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풀을 다 쑤어서 식으면 덩어리가 되니까 체에 걸러야 해요. 그러면 하루가 후딱 가요. 여기에 밥도 해야죠. 심부름도 해야죠. 일 배울 새가 없어요. 그렇게 3년 정도 지나야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요. 저는 그보다는 좀 일찍 일을 배우라고 허락을 받았어요."

손용학씨가 배접을 하고 있다
▲ 배접하는 모습 손용학씨가 배접을 하고 있다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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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비보다 인건비가 대단히 낮았던 시절인데다가,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임금도 낮게 책정했던 시절이었으니 사업주는 사람을 쓰는 것을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전체 일하는 직원은 열댓 명이었다. 그리고 손용학 회장 밑에는 어느새 대여섯 명이 들어왔다.

"표구사가 아니라 무슨 청소년 보호시설이라는 이야기까지 했다니까요. 하하하"

기술자 1명 정도가 겨우 표구사를 운영하는 현재와 규모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전성기'가 그냥 '전성기'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이라 어느 정도 자리 잡고 난 다음, 시키는 작업은 '초배'다.

"예를 들어 손님이 '액자표구를 해 주세요' 하잖아요. 그러면 먼저 그 크기에 맞게 목공소에 액자틀을 주문해요. 한 이틀 되면 오는데요, 여기에 종이 붙이는 작업을 해요. 잘못하면 고치면 되니까 이런 것부터 시키는 거죠. 이렇게 종이를 바른 과정을 서너 번 해요."

배접은 3년 정도 한 다음 시킨다고 한다. 일하던 사람도 그렇게 많았는데, 대학생들의 졸업전시회와 같은 일이 들어오면 새벽 2시까지 일하던 게 다반사였다. 그건 당시 일하던 방식이 효율적이지 못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인건비가 재료보다 더 싼 시절이었어요. 재료는 비싸서 함부로 버리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옛날에는 헌책을 무게를 달아서 팔았어요. 그걸 사다가 뜯어서 틀에 발랐어요. 예전의 책은 한지니까 표구가 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책을 뜯어서 바르는 게 엄청 시간이 걸리는 일이에요. 낡아서 판책이니 말짱한 것이 없어요. 적당한 것을 골라서 다 떼어서 하나씩 붙이니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죠."

이렇게 긴 세월 일을 하다보면, 아찔했던 실수의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인상 깊었던 작품들도 있었을 것이다. '표구는 내 인생'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담으로 이야기를 옮겨갔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배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빨리 먹는 게 체한다고. 8폭 자리 병풍인데. 잊어버리지도 않아. 화선지에 초서로 쓴 작품을 저녁 늦게까지 배접하는데, 아니 글쎄, 한 장을 거꾸로 한 거야. 풀 농도를 잘 맞췄으면 그냥 베끼면 되는 거였는데, 그것도 안 되는 거야. 결국 그 작품을 맡기신 분에게 찾아갔어요. '일하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하니까 한 폭을 다시 써주셨어요. 그때가 17-18살 때야."

아찔한 경험. 하지만 이런 경험이 더욱 신중하게 만들고, 이후 표구 작업에서 큰 실수를 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고생한 만큼 기억에 남는 걸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생하면서 했던 작업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75년도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개원 때 한 작업이었어요. 가로가 7m. 세로가 2m 정도 되는 백두산 그림이었는데, 당시는 이동 수단이 별로 없어서, 거기에 바로 작업을 했어요. 친구랑 둘이서 교대로 그곳을 지키면서 이틀 밤을 잤어요. 그때는 여의도가 풀밭이었든. 밤에 모기가, 모기가 얼마나 많던지."

표구는 서화에 종이나 비단을 발라 꾸미고 나무와 기타 장식을 써서 족자, 액자, 병풍 등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서화가 없으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표구. 그러다보니 전통문화의 한 분야이건만, 서화의 작품은 누구인지 기억해도, 표구는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 보니까 많은 국보급 작품들이 내가 만진 것들이야. 유명한 작품들은 내가 있던 곳에 많이 맡겼으니까. 하지만 내가 만졌다는 기록은 없으니까 뭐라고 할 말은 없어"

표구를 만지는 표구사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통문화의 한 부분을 지키고 가꾸어 오고 있지만 '유령'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게 표구사의 현실이다.

"기능인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기능인 전시회라는 것이 있어요. 각자가 자신의 작품을 뽐내요. '상'을 만들어온다든지, '함'을 만들어 온다든지 하면서요. 하지만 표구사의 전시는 그렇지가 않아요. 작품이 있어야하니까요. 하얀 종이에다 표구를 해서 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늘 우리는 빠져있는 거야."

표구는 작품의 보존과 보호, 작품의 감상을 위한 두 가지의 목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이다. 표구한 작품과 표구하지 않은 작품을 비교해본다면, 표구의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다. 표구하나만으로 작품의 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다른 작품과 공존하는 표구의 특성상 사람들 역시 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작품을 사진기록으로 남길 때보면 액자든 족자든 그런 건 같이 안 찍어. 그게 불만이야. 표구되어 있는 작품 전체를 찍어야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거지. 그리고 그래야 표구에 대한 안목도 높아져. 족자가 참 멋있더라. 액자표구의 비단과 비율이 멋있더라하면서 말이지. 그림만 책에 실어야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관리하고 기록하는 거면 표구를 같이 찍었으면 좋겠어."

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인사동의 풍경은 더욱 바뀌었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표구사도 더욱 늘었다. 88년 서울 올림픽유치가 확정되고, 고층 빌딩이 올라가면서 집집마다 소파 뒤에 동양화를 거는 게 유행이 되었다. 인사동 변두리에까지 표구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표구사에서 화랑도 겸하게 되었고, 대량 제작방식도 도입되었다. 동시에 전통표구 방식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나마 90년대를 거치면서 표구사의 일은 대폭 줄게 된다. 인사동 표구사들이 줄어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동산방도 84년도에 공식적으로 표구를 안 한다고 선포 했어요. 또래와 한 2년 정도 같이 일하다가 뜻이 안 맞아서 86년도에 낙원 표구사로 옮겼어요. 그때부터 2002년까지 낙원 표구사에 있었는데, 그러면서 전통 표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 옛날 병풍은 어떤 식으로 했고, 두루마리는 어떤 식으로 했고, 비단은 어떻게 배치를 하고, 어떤 재질을 사용했고, 염색은 어떤 식으로 했고. 그렇게 전통을 배웠어요.

옛날에는 삼베로 병풍을 만들었어요. 근데 삼베가 폭이 30cm에 밖에 돼. 커봐야 35cm 였어요. 그런데 병풍은 폭이 40cm 가 넘으니까 이어야하죠. 옛날 재료들을 잘 살펴보니까 바느질로 했더라고요. 그리고 염색과 배접을 했어요. 물론 지금 광폭 삼베가 나오니 다르지만요. 그런 걸 하나씩 살펴보면서 전통방식을 배웠어요."

이렇게 몸으로 배우던 전통방식을 고수하는 건 쉽지 않아졌다.

"표구사가 번창할 때 날림 표구도 지켜봤어요. 전통표구도 봤고. 비단 공장에서 배접까지 다 해서 나온 게 표구가 번창하던 그 무렵이에요. 비단 배접하는 일이 굉장히 큰일이거든요. 그걸 공장해서 다 해서 나오는 거야. 그렇게 하니 가격이 저렴해졌지.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겠어요. 과거의 것은 비싸서 사라지는 거야"

손용학씨가 묵호당 표구사에서 표구 작업 중이다.
▲ 표구 작업 손용학씨가 묵호당 표구사에서 표구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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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니 예전의 재료도 사라졌다. 기술도 퇴보하고 전통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화재를 수리하기 위한 재료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옛날 초상화를 표구하는데 당시의 비단의 색깔과 재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60년대 후반에 전통방식대로 비단을 생산하던 '서울비단'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표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80년대, '서울비단'은 흑자를 본 것이 아니라, 문을 닫아야했다. 싼 비단의 범람 속에서 가격 경쟁에 밀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격 문제로 옛날 비단을 만들던 곳도 사라지니 문화재를 표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통을 지키려면 그런 비단 공장도 다시 부활시켜야 하고, 종이공장도 부활시켜야 해요."

결국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이 문화재를 보존하기는 쉽지 않다. 표구사들이 인사동을 떠났던 것도 높은 임대료 때문이었다. 표구 작업의 특성상 다른 일보다 공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손용학 씨는 정부지원으로 표구사의 공동작업장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처럼 재료를 부활시키고, 표구사들이 전통을 지키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

더불어 후대가 이어지기 위한 지원도 필요하다. 현재 용인대 문화재 수리학과 이외에는 보존 과학 쪽에서 표구라는 것을 배운다. 보존 과학의 지식을 얻기 위해 배접도 해보고, 액자도, 족자도 만들어 보고 있다. 현존하는 표구사들과 함께 하는 실습과 교육 등이 보장하면서 전통기술이 끊기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시민들의 표구에 대한 인식의 제고도 필요하다.

"표구를 보는 시민들의 안목이 필요해요. 표구의 질이 자꾸 저하되는 것에는 손님의 역할도 있어요. 예전에는 인건비가 싸고 재료비가 비쌌다면 지금은 인건비가 높고 재료가 싸요. 꼭 고급 한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돼요. 초배용 한지로 나오는 걸 쓰면 돼요. 결국 가격을 낮추는 것은 서너 번 바를 것을 한두 번 바르느냐가 돼요. 겉보기에는 큰 차이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보존에서 차이가 나게 돼요."

표구의 흥망성쇠를 곁에서 지켜본 손용학 회장. 인터뷰 내내 표구의 전통이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재료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6년간이나 표구와 함께 했으면서도 남은 시간을 더 표구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풀 공장도 가고, 비단 공장도 가고, 종이공장도 가면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족한 문화재 수리법을 고치는 일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표구사들의 노력들이 전통표구 계승에 큰 보탬이 되길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재)종로문화재단과 함께 무지개다리지원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의 일환으로 기획한 "장황의 기록, 손의 기억' 展을 준비하면서 취재한 인터뷰입니다



태그:#표구, #표구사, #묵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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