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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청바지에 알록달록한 남방, 최신 유행 모자 스냅백(Snapback)을 쓴 젊은 청년들. 29일 오후 서울 이화여대에서 만난 사복 경찰의 모습이었다.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 탓에 처음엔 행사 참가자인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시선을 피하고, 팔짱을 끼고는 함께 "하나·둘·셋, 어이!"를 외치며 여대생들을 밀어내는 모습에 이내 정체를 알게 됐다.

청바지에 알록달록한 남방, 최신 유행 모자 스냅백(Snapback)을 쓴 젊은 청년들. 행사 참가자로 착각했지만 실은 사복 경찰이었다.
▲ 이대생들 막으려 박 대통령 행사장 에워싼 사복경찰 청바지에 알록달록한 남방, 최신 유행 모자 스냅백(Snapback)을 쓴 젊은 청년들. 행사 참가자로 착각했지만 실은 사복 경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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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100여 명 이대생은 행사장과 약 200m 떨어진 공터에서 "국민의 뜻 거스르는 박근혜 대통령을 환영할 수 없다"며 기자회견을 했다. 1시간 후 전국여성대회에서 박 대통령이 축사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박 대통령의 방문을 거부한다"는 이대생들을 '스냅백 경찰'들은 필사적으로 막았다. 나중에야 사진으로 이를 본 동료 기자는 말했다. "요즘 경찰들, 빠숑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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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었지만, 행사장 안과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박 대통령이 "여성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라며 "여성이 희망인 시대를 완성하고 싶다"고 말하는 동안 밖에서는 이대생들이 "이대 교정에 어째서 경찰들이 학생들 길을 막는가", "대통령은 청년들 목소리를 들으시라"고 소리쳤다. 박 대통령은 2800여 명 참가자와 함께 환하게 웃었지만, 행사장 밖 이대생들은 경찰에 밀리고 쓸려 넘어져 울며 소리쳤다.

박 대통령이 29일 오후 전국여성대회 축사를 위해 방문한 가운데, 같은 시각 밖에서는 이대생과 경찰이 대치 중이었다. 충돌이 벌어져 일부 학생들이 뒤엉켜 넘어지고 있다.
▲ 밀려 넘어지는 이대생들 '위험한 순간' 박 대통령이 29일 오후 전국여성대회 축사를 위해 방문한 가운데, 같은 시각 밖에서는 이대생과 경찰이 대치 중이었다. 충돌이 벌어져 일부 학생들이 뒤엉켜 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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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서울 이대 교정에서 한 이대생이 경찰에게 제지당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
▲ 눈물 흘리는 이대생 29일 오후 서울 이대 교정에서 한 이대생이 경찰에게 제지당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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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몇몇 사복 경찰은 실제 반성하는 듯 고개를 떨궜다.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2002년 신효순·심미선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했던 때, 의정부 미군 기지에 시민단체들이 항의시위를 왔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도 당사자인 미군은 문 안쪽 안전한 곳에서 커피를 들고 가며 시위대를 구경했고, 애꿎은 전경들과 한국 시민들만 서로 몸싸움을 하며 대치했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었지만, 행사장 안과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참석해 웃음며 손을 흔들고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었지만, 행사장 안과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참석해 웃음며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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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상황은 같았다. 안에서 박 대통령과 행사 참가자들이 사이좋게 웃는 동안, 밖에서는 비슷한 또래의 경찰과 학생들이 서로 밀치고 울부짖으며 몸싸움을 했다. 한 여학생은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다. 이날 참가한 김승주(이대 언론정보 10)씨는 "행사장 안팎이 극적일 정도로 달랐다"며 "나중에 박 대통령 축사를 보니 여성·평화·통일을 말하던데, 밖에서는 여대생들이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진압됐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후문으로 들어와 후문으로 나갔다. 학생들이 시위 중이던 정문을 피한 동선이었다. "무엇이 부끄러워서 후문으로 가십니까"라 외치는 학생들, 그런 학생들에게 '행사' 비표를 단 한 70대 여성은 "너희가 뭘 아느냐, 6·25를 몰라서 그런다"며 "공부나 제대로 해라"라고 삿대질을 했다. 이렇듯 온 나라가 국정 교과서 찬반으로 나뉘어 몸살을 앓는데,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정부·여당만 태평하다.

박 대통령님, 10년 전 하신 말씀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대학에 수백 명 사복 경찰이 깔렸다는 사실도 어느 어두운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유신 시절. 학내 시위를 위해 교정 안에서 학생들이 "학우여"라 외치는 순간, '학'자만 나와도 사복을 입고 감시 중이던 경찰에게 끌려갔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떠올랐다. "국정화 반대는 북의 지령을 받은 것"이라는 얘기를 무려 201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사실인 양 말하는 여당 의원들은 또 어떤가.(관련 기사: 새누리당 "국정화 반대는 북의 지령")

이는 "한 가지 생각을 강요 말라,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며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고등학생들과 '반대 대자보'를 쓴 대학생들,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다"며 실명으로 국정화에 반대한 유·초·중·고 교사 2만 1379명을 모두 '종북'으로 모는 것이다. "학자적 양심을 걸고 국정화를 반대한다"며 줄줄이 이어지는 역사학 교수·연구자들의 집필 거부, 국정화 반대 성명이 모두 '북의 지령'에 따른 것이란 얘기가 된다.

'국민 대통합'을 내걸었던, 바로 그 박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은 두 쪽이 났다. 27일 시정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통해 분열된 국론을 통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국론이 분열되는 건 오히려 그 '올바른 역사교과서' 탓이다. 대통령은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는 것",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를 두고 더 이상 왜곡과 혼란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본인이 10년 전 하신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 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신년 기자회견에서 차분한 어조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의 판단,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정권이 역사를 '막 다루겠다' 하게 되면,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그 정권의 입맛에 맞게, 편의에 맞게 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 그 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래서 역사 문제는 전문가와 역사학자에게 맡겨서 평가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레알영상] '박근혜 비교체험 극과극!', 10년 동안 무슨 일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5년 1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강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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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화여대 박근혜, #이대생, #이화여대 국정화, #이화여대 대통령, #이회여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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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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