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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복 70주년이고, 6월 1일은 제5회 '의병의 날'로 국가기념일이다. 고대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스스로 일어섰던 의병을 되새겨 보는 뜻깊은 날이다.

경남지역의 의병은 4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의 김해전투, 의령전투, 진주대첩 등에 참여하여 왜군을 쳐부순 것은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불과 1백여 년 전 국권회복기 의병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실정이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 군경 5백여 명과 자객 50여 명이 조선의 왕비였던 민비(2년 뒤 명성황후 추증)를 참살한 을미왜란(乙未倭亂)에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이듬해 2월 19일(음력 1월 7일), 안의에서 거의한 노응규(盧應奎) 의진(義陣)이 진주부(晉州府)를 점령하자 정한용(鄭漢鎔)이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상응했으니, 진주로 몰려든 의병이 1만여 명으로 국권회복기 의병사에서 전무후무한 의병규모였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덕유산·지리산을 배경으로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한 40여 의진이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의 활약상은 어떠했으며, 또한 그들의 재판기록은 어디에 있을까?

영남 포정사, 을미 진주의진의 깃발이 휘날린 곳
 영남 포정사, 을미 진주의진의 깃발이 휘날린 곳
ⓒ 이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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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5일까지 제14연대장 기쿠치(菊池) 대좌로 하여금 의병 살육전(殺戮戰)을 이끌게 하여 진주·함양·거창·광주 등지의 일본군 수비대와 조치원 주둔의 일본군 기병 약 70기, 경남 각지의 헌병·경찰·특설순사대 등도 참가시키는 대규모 '의병토벌대'를 편성해서 150여 회에 걸쳐 무자비한 살육전을 펼쳐 의병 756명이 순국하고, 부상 수백 명, 포로 700여 명에 이르렀다.

가장 왕성을 극한 것은 작년(1907) 9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지리산맥으로부터 전라·경상 남북의 경계 산맥을 근거로 하여 하동·산청·삼가·의령·단성·거창·안의·언양·기북·창녕의 각 군에 출몰, 그 세력이 창궐을 극하여 금곡(金穀)을 약탈하고, 혹은 인명을 살해하며, 민가를 불사르는 등 흉포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66쪽)

경남 서부지역 의병투쟁이 가장 왕성했던 1907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의병수와 순국자, 부상자 등에 관한 구체적인 통계는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대규모 의병 살육전이 끝난 후 1908년 4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남 서부지역 의병은 여전히 상당한 세력으로 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2월부터 12월까지 일본 경찰의 비밀기록 속에 나타난 순국한 의병은 1천343명, 사상자 95명, 부상자 수백 명, 포로 7백여 명에 이르렀으니, 순국자 수가 1909년 9월부터 12월까지 있었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때보다 3배가 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또 일제 앞잡이 경남관찰사의 기록에는, "3,4월까지는 그대로 잠잠하였으며, 5월에 이르러는 피해의 수가 격감하여 삼삼오오 벽지에만 출몰하는 데 불과하였던"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908년 4월부터 그 해 12월까지 일본군의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에 나오는 '경상남도 폭도 토벌 개황표'에는 일본군 또는 일본 군경 합동부대와 싸웠던 의병이 2천224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587명, 사상자(死傷者)로 분류된 자가 95명이나 된다.

이들 기록은 시기가 중복된 것도 있지만, 엄청난 의병들의 희생이 있었음은 분명한데, 경남·부산·울산 출신으로서 의병 공훈으로 서훈을 받은 자는 2015년 5월 현재 50여 명뿐이다.

더구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에 나오는 「의병항쟁재판기록」 경상남·북도 편에는 경북 사람은 수백 명인데 비해 경남 출신은 단 6명뿐이다. 그 6명도 노공일(盧公一)·서은구(徐殷九)는 각각 창녕·거창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김선일(金善日)은 울산 출신이지만 경북에서 활약했기에 대구에서, 김해운(金海雲)·박이열(朴利烈)은 각각 안의·고성 출신이지만 전남에서 활약했기에 광주에서, 전문식(全文植)은 거창 출신으로 진주법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했기에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안의 출신 전성범(全聖範) 의병장, 하동 출신 손기혁(孫琪赫) 의병장, 함양 출신 권석도(權錫燾) 의병장, 울산 출신 김기준(金基俊) 의병장과 김춘길(金春吉)·김치일(金致一)·박선익(朴善益), 언양 출신 이돈성(李敦誠), 삼가(합천) 출신 김팔용(金八龍) 의병은 「의병항쟁재판기록」에는 없지만 대구공소원의 판결문이 국가기록원 원문에 남아 있는 경우이다.

최근 1934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의병장과 의병 등 12명(경남 출신 10명)의 재판기록 일부가 실린 것이 발견되어 김화서(金化瑞) 의병장과 함께 의진에서 활약한 송영수(宋永秀)·심낙준(沈落俊)·오낙삼(吳落三)이 서훈을 받게 되었지만, 이는 국권회복기 경남 출신 의병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는 부산과 울산도 모두 경남이었고, 경남 도청소재지는 진주였다. 특히 진주는 전국 4대도시 중의 하나인데다가 배후 고을인 거창·곤양·단성·산청·안의·하동·함양 등은 지리산과 덕유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 산은 유역면적이 남한에서 1,2위로 무려 40여 개의 의병부대를 품고 있었는데, 그 의병들의 재판기록은 다 어디 갔을까?

1948년 정부수립 후 천신만고 끝에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일제 앞잡이들의 방해 공작으로 결국 무산되어 해당 사건이 대법원으로 이관된 직후인 1949년 10월 27일 남로당 무리로 위장한 세력에 의해 진주법원이 불태워졌다. 그래서 의병재판기록은 물론, 3·1만세의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인사들의 재판 기록물이 모두 불타버려 수많은 의병과 일제 강점기 애국지사의 수사기록·재판기록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국권회복기와 일제 강점기 진주법원의 재판기록 중, 대구공소원에 공소한 기록만 존재하고, 공소를 하지 않은 수많은 재판기록은 사라지고 말았으니, 일제 앞잡이들의 반민족 행위와 함께 그 기록마저 없애버리려고 불을 지른 행위는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요,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도(叛徒)는 10월 27일 상오 1시 30분경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해군병사·경찰서·형무소를 공격하며 해군병사·식당·형무소 사무실·진양군청·재판소에 방화하고 한편 시내에서 인민공화국 선전을 한 후 상오 3시 20분경 퇴각하였다.

반도수는 군경측 발표에 의하면 300명가량이라 하나 부근 주민들이 목도한 바를 종합하여 보면 70명 내외에 불과하였다고 보인다. 그리고 행동시간도 군경측에서는 4시간이라 하나 모든 것을 종합 조사한 바 2, 3시간에 불과하였다.
(<동아일보> 1949.11.13)

그런데도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인 <의병항쟁재판기록>의 서문을 쓴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이은상은 "진주지방법원의 판결문은 6·25 동란에 소실되고 말았으며,"라고 왜곡시켜 놓았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 아니랴!

덧붙이는 글 | 이태룡 기자는 사단법인 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입니다.



태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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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말 의병을 30여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 의병 찾아가는 길1.2,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중명출판사) 한국의병사(상.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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