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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서 들려오는 경제 관련 소식의 상당부분은 시장의 확산에 관한 것이다. 북한의 시장화는 소비재, 서비스, 부동산 등 최종 소비 부문이 주도하고 있으며, 노동, 금융, 자본재 등 생산요소 부문은 다소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소비가 생산을 주도하는 북한의 시장화

일부 식량이나 선물이 배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소비재가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다. 소비재는 장마당이라 불리는 종합시장뿐만 아니라 직매점, 매대 등 개별 상점과 백화점 및 슈퍼마켓 등 대형 유통시설을 통해서도 거래되고 있다. 일반 주민뿐만 아니라 당이나 군의 고위층이나 돈주(신흥 부자) 등 권력층도 시장에서 소비재를 구매하고 있다. 일반 주민은 종합시장이나 직매점 등에서 주로 구매한다. 권력계층은 종합시장과 함께 백화점이나 슈퍼마켓 등 대형 유통시설에서도 상당한 소비재를 구매한다는 점이 차이이다.

소비재와 함께 서비스 시장의 발달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방, 교육, 의료 등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한 일부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서비스가 시장을 통하여 공급되고 있다. 즉 시외버스를 중심으로 한 운수 서비스, 종합시장, 직영매점, 소규모 매대, 백화점 및 대형 유통시설 등으로 구성되는 상업 및 유통 서비스가 시장을 통해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거의 모든 서비스가 시장을 통하여 공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금융의 발달과 사적 고용의 증대

북한의 서비스 시장 발달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점은 무선통신 서비스 시장이다. 북한은 오라스콤(ORASCOM)이라는 해외 자본과의 합작을 통하여 무선통신 서비스를 공급해왔다. 약간의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든 단말기를 사고, 통신료를 지불할 능력과 의사가 있으면 이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시장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창출된 시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존 주택의 거래뿐만 아니라 신규 주택의 건축 및 매매도 시장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시장경제의 확산에 따라 자금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공식적인 금융기관은 자금을 융통하고, 중개하는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장경제활동을 통하여 자금을 축적한 '돈주' 등에 의하여 사금융이 발달하고 있는 것이다. 또 국영기업이 충분한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화가 진전되고 있으므로 타인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사적인 고용 역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금융 및 노동시장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여전히 강력하므로 이들 시장의 발달은 소비재와 서비스 시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지체되어 있다.

계획경제의 약화와 대외무역의 확대

북한 시장화의 일차적인 원인은 계획경제에의 약화, 혹은 국영기업의 생산 및 공급 역량의 현저한 약화이다. 즉, 이미 1980년대에 실질적으로 줄어들고 있던 국가에 의한 식량공급, 그리고 국영기업에 의한 소비재의 공급이 1990년대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국가재정의 약화로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북한의 각 경제주체들은 생존을 위해 수평적인 거래를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북한경제에 내재되어 있던 시장화 경향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렇게 국가에 의한 계획적인 공급 능력의 약화가 시장의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외무역의 확대를 기반으로 하는 유효 수요의 증가 및 민간 공급 역량의 확대는 시장이 북한에서 현실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부문이 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대외무역의 확대가 수반되지 않았다면, 국가의 공급역량의 약화에 따른 계획경제의 해체가 시장화를 촉진하기는 하였겠지만, 시장화의 속도나 범위는 훨씬 느리고 축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장화를 촉진하는 몇 가지 요인

2000년대 북한 시장에는 소비재와 서비스 시장의 안정적인 발달을 가능하게 한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는 '제도적 타협'이다. 시외버스나 개별 상점 및 식당은 개인이 투자하고 경영한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국영기업이나 국가기관 소속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개인이 사적인 영리활동을 할 수 없는 북한경제체제 아래서도 안정적인 투자와 지속적인 영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외버스 서비스이다. 북한의 시외버스는 개인이 중국 등에서 버스를 구입하여 도나 시 인민위원회 운수회사 등의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북한에서는 도청 소재지를 비롯한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중소도시와 군을 연결하는 시외 버스망이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사적인 영리활동을 금지하는 제도를 공식적으로 수정하지 않은 채 개인의 투자와 영업활동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유효한 '제도적 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일종의 '제도적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타협'을 통하여 국가는 재정을 통한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도 철도가 담당하지 못하는 여객이나 소규모 화물 수송을 위한 시외 버스망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영업활동에 따른 수익의 일부도 배분받을 수 있다. 개인은 수익의 일부를 소속 기관과 나누지만 안정적인 투자와 영업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둘째는 정부와 공공부문의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이다. 정부는 무선통신 서비스와 같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독점적 공급자의 역할을 한다. 자체 자금이나 외부 투자를 유치하여 대형 유통시설을 신설하거나 현대화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수입 소비재 등을 시장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부 시장진출은 재정자금 확보나 외화의 흡수 그리고 화폐순환의 복구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서비스 노동자의 성격변화도 서비스의 시장공급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임금을 받고 편의봉사사업소에서 국정가격으로 서비스를 공급하던 노동자들은 과거와 동일한 서비스를 공급한다. 하지만 이제 국정가격이 아니라 시장가격으로 서비스를 공급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수입 중 일정한 금액을 국가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가져간다. 개인 사업자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북한 시장화의 한계

북한의 시장화는 많은 북한 주민에게 일자리와 생계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1990년대 경제위기 이후 2000년대 북한경제의 부분적인 회복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대 북한경제가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시장화의 한계나 혹은 체제전환이나 대외개방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핵문제에 따른 대외관계의 악화 등 보다 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북한의 시장화는 최종 소비부문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고, 소비 부문의 시장화가 북한 내부에서의 생산의 확대와 그에 따른 경제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장화의 잠재력이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비재와 서비스 시장에 비해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의 발달은 더디다. 이 점은 시장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북한 기업의 공급반응이 미약한 원인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 재정에 의한 투자가 아직 크게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의 발달은 지체되고 있다. 따라서 대외무역의 확대와 최종 소비 부문 시장화의 진전에 따라 북한 내부에 화폐는 축적되었지만 생산역량으로는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시장화가 북한 경제를 회복시키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소비재나 서비스 부문에 비해 노동이나 사금융의 발달이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시장에서는 제도적 타협을 통하여 최소한의 제도적 우산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이나 사금융 영역에서 시장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현재의 북한 시장화는 국영기업의 사유화가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소유제의 발달도 거의 없다. 따라사 북한의 시장화가 반드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화가 북한 (정치)체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북한 당국이 시장을 통하여 재정을 보충하고, 스스로 투자하기 어려운 부문에 민간자금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시장화를 활용하고 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시장화의 진전이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북한 시장화의 위험한 측면

북한의 시장화가 가까운 장래에 북한에 체제전환이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장화는 북한 주민의 생활을 지탱하고, 개선시키며, 북한 경제 전반의 성장 잠재력을 확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장화가 북한에서도 부정적인 측면을 내포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장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 그리고 경제적 약자를 발생시킨다. 시장의 이러한 부정적 영향을 완화시키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그런데 북한의 시장화는 북한 정부의 경제적 역량 약화와 함께 진전되고 있어 아직까지 국가의 이러한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시장화가 다른 의미에서 북한 체제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이다. 북한의 시장화의 주요 수요계층의 하나가 권력집단이나 이들과 결탁한 계층이라는 점은 이러한 위험을 가중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석기 박사는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입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 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북한 시장화 , #북한 금융, #북한 노동시장, #북한 서비스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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