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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미래덩굴 얼음꽃
 청미래덩굴 얼음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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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절의 친구

나는 1961년부터 2004년까지, 중간에 2년 4개월 군복무를 하였으니 꼭 40년 서울에서 살았다. 어쩌면 나는 인생의 황금시기를 서울에서 모두 보낸 셈이다. 2004년 학교를 중도에서 퇴직하고 서울을 떠나올 때 지난 인연을 과감히 끊어버렸다.

하지만 끝내 끊지 못하고 여태 지속하고 있는 것은 제자들과, 고교시절 동고동락하며 신문배달을 같이 하던 친구들이다. 그동안 이 친구들과는 계속 관계를 지속해온 바, 몇 해 전에는 아주 모임의 이름까지 지었다. 친구들이 나에게 작명을 의뢰하기에 '청우회(淸友會)'로 지었더니 모두 좋다고 하여, 그 이름으로 일 년에 서너 차례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청우회란 우리 네 사람이 종로구 청진동에서 만났기에(1960년대 초 동아일보 세종로 보급소가 그곳에 있었음), 또 가난한 시절에 이해관계 없이 만난 '맑은 친구'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아무튼 가난한 시절의 관포지교(管鮑之交) 탓인지, 50년이 지나도록 서로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여태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어이, 박도! 얼굴 한번 보자!"

한 달 전에 청우회 연락책을 맡고 있는 노진덕 제독(예비역 해군 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 무렵 장편소설 <약속> 출판 산고 탓인지 심한 독감을 앓는데다가 꽃샘추위로 미루다가 어제(4월 1일) 저녁으로 날을 잡았다. 마침 10여 년째 내 책을 10여 권 줄곧 펴내준 눈빛출판사와 출판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자 일찍 서울로 가서 차담을 나누었다.

오미자(횡성군 안흥면) 열매
 오미자(횡성군 안흥면) 열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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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작가의 변

"그래도 선생님의 책은 매일 조금씩 주문이 오고 있어요."

출판사 대표와 편집장은 나의 아픈 마음을 위무해주었다. 그래도 나는 퇴직연금을 받기에 다행이지 이즈음 전업작가들은 말씀이 아닌 모양이다. 한 후배 작가는 목메는 소리로 말했다.

"단지 글을 쓰는 기쁨만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관중이 없는 야구장에서 선수들만 열을 내며 경기하는 모양과 비슷하다.

출판사 대표는 광복절 전후로 출간될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사> 증보 작업과 이후에 출판될 <미군정기> 마무리 작업을 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차담을 마치고 청우회 친구들과 약속 장소인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는데, 한 후배 작가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배님, 이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 지금 서울에 있소."
"서로 뭔가 텔레파시가 통한 모양입니다."

마침 약속시간까지 30여 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다고 하니까 그가 광화문 한 찻집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그는 등단 40년이 넘는 중견작가다.

"SNS 때문에 종이책이 죽고 있습니다. 책뿐 아니라 종이신문, 잡지도 죽고 있어요. 지난날 코닥, 후지, 아그파 필름이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그만 사양산업이 되었잖아요. 꼭 그 짝입니다."

그는 이즈음 소설 쓰기를 접었다고 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 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유산인 책이 없어질 리야?"
"책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앱 같은 전자도서나 영상에 밀리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새로운 시대의 변화 요구를 주문했다.

청우회 회원(2011. 5.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에서 오른쪽부터 노진덕, 구본우, 현동훈, 필자)
 청우회 회원(2011. 5.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에서 오른쪽부터 노진덕, 구본우, 현동훈, 필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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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거리를 걷다

그때 노 제독으로부터 청우회 친구들이 다 모였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와 헤어진 뒤 교보 앞에서 청우회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현동훈)가 말했다. 그는 제주 출신으로 아직도 현역 CEO다.

"아직 저녁시간이 이르니까 우리 박 작가와 구본우 목사의 배달구역이었던 사직동 쪽으로 산책이나 갈까?"

모두 좋다고 하여, 우리 네 사람은 거기서 광화문 네 거리를 지나 내수동 쪽으로 갔다. 나는 가는 길목에 도렴동에 있었던 옛 조선일보 세종로 보급소 자리가 떠올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은 일식집으로 변해 있었지만 골목은 그대로였다. 나는 1961년 가을, 고교 휴학생으로 조선일보 계동배달원이었다. 그 보급소에서는 영자신문 코리안리퍼블릭(이후 코리아헤럴드로 개제)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영자신문은 접지가 되지 않고 본사에서 전지로 보급소로 보냈다. 그래서 배달원들은 이른 새벽 길바닥에서 그 전지를 일일이 접지를 하는데 바람이 불면 신문이 날려가 매우 애를 먹었다.

그 뒤 나는 동아일보 누하동을 배달했는데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바로 그 길을 따라 체부동을 거쳐 누하동으로 갔다.

네 사람이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사직동으로 가는데, 특히 그 일대는 '경희궁의 아침' '파크 팰리스' 등 고급 아파트촌으로 옛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종교교회와 천주교 세종로성당, 사직공원만은 옛 이름과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관절통 없이 등산을 거뜬히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시절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했던 덕분일 거야."

노 제독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친구들은 모두 자기들도 그렇다고 긍정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게다가 나는 보병장교 출신이니까 보병학교 시절 '3보 이상 구보'로, 그런 훈련 덕분인지 이후 걷거나 달리는 데는 이력이 났다. 그래서 젊은 날은 하루 종일 걸어도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살았다. 늘그막 항일유적답사 때도 안내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 나이에도 어쩌면 그렇게도 산을 잘 타십니까?"

억새꽃
 억새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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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우리 네 사람은 50년 전으로 돌아가 그 시절을 얘기하며 세월무상, 인생무상에 젖다가 사직공원 옆의 한 밥집으로 가서 이전 모임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메뉴로 두부전골과 청국장을 먹고 가까운 전통찻집으로 옮겨 정담을 나누었다.

네 사람 모두 이제는 고희를 넘긴 나이로 어쩔 수 없이 모두 노년을 맞았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한 걸음 더 깊은 얘기를 나누자 건강의 빨간 신호등을 본인 아니면 배우자가 모두 감지하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네 사람은 아침저녁 신문을 배달할 때, 동네 개들에게조차도 대접을 받지 못했던 탓으로 이후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여태 현역으로, 은퇴자로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살아온 듯했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내일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음 만남 때는 노 제독 배달구역이었던 가회동을 가보세."
"좋지. 계동, 원서동, 재동, 삼청동 등, 그 북촌 거리가 아직도 삼삼하네."

나는 그 거리를 머릿속에 그리며 대꾸했다.

"늘그막에 추억거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거야."

구 목사가 목사님처럼 말했다.

청량리역에서 21시 13분에 출발하는 부전행 열차를 타고 원주 내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내 입에서는 신경림 선생의 시 <갈대>가 되놰졌다.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홀연 늙음에 따르는 인간 실존의 고독과 비애가 소나기처럼 엄습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도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태그:#서울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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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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