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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자유무역협정과 한중자유무역협정이 타결될 때 기억이 난다. 다들 우리 쌀이 무너지게 되었다면서 쌀 시장이 개방되는 것은 우리의 농업이 무너지는 것이고 식량주권이 무너지는 것이며 농촌공동체와 전통문화도 같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뜻 모를 영자·외래어 사용 증가

맞는 말이다. 쌀시장의 개방은 외국과의 교역품목 중에 쌀이 하나 추가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쌀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삶과 가치들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이다. 우리의 얼과 전통과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쌀로 상징되는 우리 농산물들이 우리의 밥상에서 밀려나는 것 못지않게 우리말과 글이 외국말, 특히 영어에 밀려나는 현실 또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이 글을 읽으면서 혹시라도 우리 농산물 얘기보다 우리말과 글 얘기가 왠지 낡은 주제 같다고 여겨진다면 그만큼 우리말과 글에 대한 소중함을 잃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문제의식 자체가 없거나 희박하다면 더 심각하다고 하겠다.

길거리 광고판이나 기업들의 홍보문구를 논하는 게 아니다. 우리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농업관련 매체들이 온통 영어 범벅이다. [국어기본법]이라는 법률이 있을 뿐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고시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이 있지만, 이를 따르는 신문은 하나도 없다.

지난주 어느 농업신문의 기사 제목이 '종축개량협회, FMD 발생지 사업중단'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FMD'는 '구제역'이었다. 언제부터 구제역이 'FMD'가 되었는지 기가 막혔다. 조류독감을 영어로 'AI'라는 쓰는 것은 물론, 자유무역협정을 '에프티에이'도 아니고 영어 그대로인 'FTA'로 쓰는 것은 예삿일이 된지 오래다. 한국농수산식품공사를 영어로 'aT'라고 쓰는 신문은 부지기수다.

지난주에 온 어느 농업단체의 연구발표회 안내장에 주제가 <리질리언스(Resilience)와 농업·농촌>이라고 되어 있었다. 사전을 찾아봐야 겨우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요즘 웬만한 지역에 있는 지역공동체사업체를 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라 부르면서 'CB센터'라고 쓰고 있다. 지자체의 홍보물은 물론 신문에서도 공공연히 그렇게 쓴다. 농부가 전단을 읽거나 농업 신문 하나 보려면 영어부터 배워야 할 판이다.

적당한 우리말 없다는 건 핑계

영어를 함부로 쓰는 사람들의 변명들이 있다. 적당한 우리말이 없다는 것이다. '리질리언스'는 물론이고 '어메니티'나 '거버넌스'나 '팜스테이'가 왜 우리말이 없는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사실은 우리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머리는 물론이고 뼛속까지 영어 사대주의에 절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할 것이다. 영어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면 화들짝 놀랄 것이다. 다음 사례를 보자.

영어를 함부로 쓰는 사람들의 두 번째 변명이다. 의미 전달이 빠르다는 변명이다. 우리말로 '에프티에이' 하는 것 보다 영어로 'FTA'라고 하면 훨씬 의미 전달이 빠르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엘피지' 하는 것 보다 영어로 'LPG'하는 게 더 쉽게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저만 심각한 증세가 아니다. 우리글보다 영어가 더 익숙하다니!

우리가 안녕하시냐는 인도와 네팔 말인 '나마쓰떼'라는 말을 할 때가 있지만, 절대 그들 글자로 'न म स् ते'라고 쓰지는 않는다. 신문들이 의미 전달력을 높일 필요가 있을 때는 한자마저도 우리말을 쓰고 나서 괄호 안에다 쓴다. 유독 영어만 영어로 쓰고 그게 편하다는 것은 영어 사대주의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재벌이라는 우리 고유 말을 외국에서 '재벌'이라고 쓰던가? 우리의 고유음식인 김치를 외국 어느 나라가 '김치'라고 쓰던가? 고유명사 그대로 다 자기나라 말로 쓴다.

우리 농사 말에 영어는 물론 한자말과 왜색어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을 그냥 지나치고서 우리 농산물을 지켜나갈 수 없다고 본다. 우리말과 글을 바로 쓰고 지키는 것과 우리 농산물을 지키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부한 얘기가 되겠지만,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역사와 정신과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말과 글을 소홀히 하고 함부로 버린다면 우리 농산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봐야한다.

농업 언론과 농업관련 기관이 이런 넋 나간 짓에 앞장서고 있어서 걱정이다.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거나 외국에 가서 공부한 사람들이 유독 심하다. 농업관료들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의 농업부서 공무원도 유세 떨 듯이 영어를 버무려 쓴다.

농산물 지키듯 우리말 지켜주길

우선 정부의 농업관련 부서와 농업기관들이 우리말과 글을 바로 쓰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으면 한다. 요즘 시쳇말로 늘리고 늘린 게 무슨 무슨 센터 아닌가. 이 협의체는 센터라는 말도 좀 벗어나서 이름하여 '우리 농사말 바로 쓰기 본부'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다. 연구소나 기관들이 경쟁하듯이 새로운 영어를 먼저 쓰고 퍼뜨리는 짓들을 그만두고 서로 협의하는 관계를 맺어서 우리 농사말을 바로 쓰도록 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이 언론이다. 농업관련 매체의 문화부장들이라도 모여서 우리 농사말 바로쓰기 모임을 만들어서 무분별한 영어쓰기를 그만두고 우리 농산물 지키기 하는 자세로 우리말을 되찾는 노력하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외국어, #우리말,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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