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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베를린의 상징인 칼 마르크스 대로(Karl-Marx-Allee), 기존의 도시 조직을 변경하여 기념비적인 도로와 건축물을 세웠다.
▲ 칼 마르크스 대로(Karl-Marx-Allee) 동 베를린의 상징인 칼 마르크스 대로(Karl-Marx-Allee), 기존의 도시 조직을 변경하여 기념비적인 도로와 건축물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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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베를린에 있던 약 160만 채의 주택 중, 50만 채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70만 채의 주택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도시기반시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참담한 상황이지만, 전쟁은 비위생적이고 어둡고 답답한 유럽의 도시가 새롭게 바뀔 수 있는 기회였다. 그를 위해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베를린 시 의회(Abgeordnetenhaus)의 명예시민 갤러리에 전시되어있는 건축가 한스 샤로운의 초상화
▲ 한스 샤로운의 초상화 베를린 시 의회(Abgeordnetenhaus)의 명예시민 갤러리에 전시되어있는 건축가 한스 샤로운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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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라는 유명 건축가를 중심으로 동서독의 건축가와 도시 계획가들이 함께 모여 '집합 계획(Kollektiv plan)'이라 명명된 전후 베를린을 위한 새로운 도시 계획을 세운다.

집합 계획은 전쟁으로 무너진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과격한 도시 개조 계획인 집합 계획은 1946년 기존의 도시 구조를 존중하면서 교통 시스템을 새롭게 개조하는 첼렌도르프 계획(Zehlendorfplan)으로 대체되게 된다. 2년 후에는 또 다른 대안인 보나츠 계획(Bonatzplan)도 제시되었다. 도시 재건을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새로운 동독의 기념비적인 장소, 스탈린 대로

티어가르텐(Tiergarten) 서쪽에 위치한 한자 구역(Hansaviertel), 새로운 유형의 주택이 숲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 한자 구역 전경 티어가르텐(Tiergarten) 서쪽에 위치한 한자 구역(Hansaviertel), 새로운 유형의 주택이 숲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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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베를린을 함께 재건하려던 동서독의 도시건축가들의 이상은 1948년 소련이 서 베를린을 봉쇄하며 무산된다.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동-서 베를린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 베를린은 1950년 보나츠 계획을 토대로 한 토지이용계획(Flächennutzungplan)을 수립하며 주거 구역, 상업 구역, 공업 구역 등을 새롭게 정돈하기 시작했다. 계획의 2가지 중요한 목표는 과거보다는 건물의 밀도를 낮추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가능한 많은 녹지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는 과거를 신경 쓰지 않고, 기존의 도시를 벗어난 새로운 이상을 실현시키기에 좋은 무대였다.

동 베를린은 같은 해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 도시 설계를 모델로 삼은 재건 법(Aufbaugesetz)을 지정하였다. 서 베를린의 계획과는 다르게 기념비적이고 상징적인 도시 개발에 초점을 둔 법이었다. 두 도시는 서로 경쟁을 하듯 각자의 도시를 재건하고 건설해갔다. 도시를 넘어선 두 국가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프랑크푸르터 토어(Frankfurter Tor)의 상징적 건축물.
 프랑크푸르터 토어(Frankfurter Tor)의 상징적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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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베를린이 1951년 먼저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공개했다. 서 베를린 시민으로 1950년까지 동독에서 함께 건축 작업을 했던 한스 샤로운의 공동주택 2채였다. 동 베를린의 가장 중요한 도시 풍경이자, 중심 가로 구역인 스탈린 대로(Stalinallee)의 첫 번째 공사 구역으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스탈린 대로는 1961년 이후 칼 마르크스 대로(Karl-Marx-Allee)라고 명명되었다. 기사에서는 건축물을 짓던 당시의 이름인 '스탈린 대로'로 표기한다. 참고로 독일어 알리(Allee)의 정식 번역은 가로수 길이다. 하지만 서울 신사동 가로수 길과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 실제 알리라는 도로의 모습을 좀 더 잘 설명하는 폭이 넓은 길이라는 의미의 '대로(大路)'로 대체한다.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Strausberger Platz)의 건축물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Strausberger Platz)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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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치지 않았다. 1958년까지 스탈린 대로의 중심축인 프랑크푸르터 토어(Frankfurter Tor)의 상징적 건축물부터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Strausberger Platz)의 건축물까지 약 1.9km에 달하는 스탈린 대로변의 건축물을 완공했다.

넓고 길게 뻗은 스탈린 대로를 따라 우뚝 세워진 상징적인 고층 아파트들이 전쟁으로 훼손된 오래된 주택들은 뒤로 가려졌다. 과거는 가린 채 새로운 동독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탈바꿈 되었다.

세상에 서독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한 곳, 한자 구역

한자 구역 지하철역에 있는 1957년 전시회 당시의 모습. 재건된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리프트까지 설치되었다.
 한자 구역 지하철역에 있는 1957년 전시회 당시의 모습. 재건된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리프트까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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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베를린도 이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티어가르텐(Tiergarten) 서쪽에 인접한 한자 구역(Hansaviertel)이라는 구역을 1953년 서 베를린은 도시설계 공모전 대상지로 선정했다. 한자 구역 개발은 인터바우(Interbau, 국제 건축 전시회를 의미하는 독일어 'Internationale Bauausstellung'의 약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1957년의 건축 전시회의 일부였다.

당시 전시회를 주최한 베를린 시의회의 건설부 의원이었던 말러(Mahler)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전시회는 건물 덩어리를 위한 전시회가 아니라, 서구 사회의 명백한 건축적 선언이다. 전시회를 통해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스탈린 대로에 서있는 그릇된 사치품과는 반대되는 근대 도시 설계와 올바른 주택 건설에 대한 이해이다."(독일 건축 잡지 바우벨트의 1953년 35호 681쪽 기사 참조)

명백한 동독과의 자존심 싸움이자 전후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세상에 서독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넓은 녹지 위에 지어진 한자 구역의 고층 주택들
 넓은 녹지 위에 지어진 한자 구역의 고층 주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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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에는 빼곡히 공동주택이 붙어 있던 한자 구역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실상 복원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도시설계 공모전을 통해 스탈린 대로와는 다른, 경직되지 않은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뽐낼 장소였던 것이다.

공모전에 당선된 도시 설계안을 바탕으로 개별 건축물을 설계할 전 세계의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했다. 오스카 니마이어, 알바 알토, 발터 그로피우스, 막스 타우트 등 독일 국내외의 유명 건축가들이 도시 설계안에 따라 새로운 주택을 디자인하였다. 아테네 헌장의 개념처럼 대부분 주거기능만 지닌 주택들이 넓은 녹지 위에 띄엄띄엄 세워졌다.

한자 구역 내의 주택 입구에는 그 주택을 설계한 건축가의 명패가 붙어 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말할 때 주소를 말하기에 앞서 '오스카 니마이어 주택(Oscar-Niemeyer-Haus)'와 같이 자신의 집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을 붙여서 말하기도 한다.

알렉산더 광장 쪽에서 바라본 스탈린 거리의 새 건축물들
 알렉산더 광장 쪽에서 바라본 스탈린 거리의 새 건축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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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964년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에서부터 동 베를린의 중심인 알렉산더 광장(Alexander Platz)까지 연결되는 스탈린 대로의 마지막 공사 구간이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전통적인 건축 디자인과 장식으로 지어진 스탈린 대로의 건축물과도 확연히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새로운 디자인의 건축물들은 한자 구역의 최신 주택과 견주려던 동 베를린 건축가들의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 베를린에서는 지금도 베를린의 랜드 마크로 남겨진 TV타워를 건설하며 치열한 경쟁을 이어나갔다.

두 도시의 자존심 대결은 이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한자 구역의 녹지 공간의 모습.
 한자 구역의 녹지 공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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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후 스탈린 대로변에 있던 동독의 건축물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전면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1995년에는 한자 구역의 건축물과 녹지 공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녹지 공간까지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쉽사리 나무도 옮겨 심지 못한다.

냉전 당시 동독과 서독 그리고 세계를 분할하고 있던 두 도시의 자존심 대결은 이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무엇이 우월한 건축이고, 위대한 건축인지 비교할 수는 없다. 두 구역 모두 각자의 상황과 정치 체제 아래서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내세운 건축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라도 두 구역을 자유로이 구경하며, 당시의 우스꽝스럽지만 진지했던 자존심 싸움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화려하고 재미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도시와 건축물이 때로는 황당하리만치 유치한 이유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로 남겨졌다.

타일로 외부를 꾸민 스탈린 대로의 건축물들은 흔히 ‘스탈린의 화장실’이라고 조롱당하기도 한다.
 타일로 외부를 꾸민 스탈린 대로의 건축물들은 흔히 ‘스탈린의 화장실’이라고 조롱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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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사회 주택 구역으로 시작된 한자 구역은 통일 이후 민간 부동산 회사에게 팔려 지금은 중산층 이상이 되어야 살 만한 비싼 동네가 되었다. 티어가르텐이라는 거대한 공원 옆에 있는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주택가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외장재를 타일로 활용한 스탈린 대로의 건축물들은 '스탈린의 화장실'이라고 조롱하던 별명이 다시 회자되며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곳 역시 개인, 기업 투자가에게 팔려 나가, 옛 동독 구역뿐만 아니라 베를린 전 구역을 통 틀어도 월세가 높은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건설된 지 약 60년이 되어가는 한자 구역과 스탈린 대로에 있는 주택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건축물도 그리 아름다운 건축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곳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계속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그렇듯, 전쟁이 아닌 이상 60년 정도의 주택 수명은 너무나 평범하다. 하지만 30년만 넘으면 아파트 재건축을 시작하는 나라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풍경이다.(<주택 수명 느는데… 재건축 정책 '역주행' 참조> 고찬유, 한국일보, 2014. 9. 2.)

초창기 서울의 도시 개발을 이끌었던 수많은 아파트와 주택 단지는 그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도 받기 전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언제나 그랬듯, 30년 뒤에 다시 사라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아파트 단지가 세워진다. 사람들의 삶과 기억 그리고 의미를 담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베를린 소개서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Intro2Berlin )를 개설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미처 다 싣지 못한 베를린의 사진들을 공유하고, 최근 베를린 소식을 공유하는 페이지다.



태그:#독일, #베를린, #도시, #건축, #도시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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