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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구채구에 갔을 때.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구채구에 갔을 때.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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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32살이다. 달걀 한 판을 가뿐히 깨며 30대에 진입한 미혼여성이다. 동시에 중국 랴오닝(辽宁省) 성 진전우(錦州)시에 있는 한 사범대학의 졸업반 학생이다. 현재는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중국은 9월이 1학기다) 방학을 맞아 잠시 집에 와 있는 중이다.

남들은 졸업하고도 남을 나이인 28살에 입학했고,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있다. 이제 막 중국 초등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마쳤고, 논문만을 남겨놓고 있는 상태다.

한 눈에 담기 아름다운 구채구의 풍경
 한 눈에 담기 아름다운 구채구의 풍경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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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인 2010년,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연말이 되어 안 좋아진 경기 때문이었는지 총 인원 6명인 회사에서 막내 두 명이 해고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와 내 위였던 대리 언니가 그 대상이었다. 황당한 통보식 해고였지만, 별 수 있겠는가. 마음 같아선 업무인계고 뭐고 뒤집어 엎고 싶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속은 쓰려도 2011년 새해는 돌아왔다. 오랜 만에 찾아온 휴식을 퇴직연금으로 때우며 백수와 구직활동을 겸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기를 한 달 여. 엄마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너... 중국으로 유학 가보지 않을래?"

물론 매우 솔깃한 얘기였다. 유학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로망이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많았다. 나이도 나이이거니와 내가 알기론 우리 집은 유학을 보낼 형편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 갈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요지는 이랬다. 어머니의 지인이 중국 대학의 분교를 한국에 세웠는데 그곳 시스템이 한국분교에서 일 년 동안 기초과정을 배우고 중국 본교로 가서 나머지 학과과정을 마쳐 졸업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0년에 시작했다는 것. 시작한 지 갓 일 년 남짓한 학교를 무엇을 믿고 간다는 것인가. 느낌이 왔다.

절대 넘어가지 않으려 했던 유학 제의, 하지만...

중국 곳곳에는 생각지 못한 비경이 많다.
 중국 곳곳에는 생각지 못한 비경이 많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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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모든 상황을 의심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정황상 99% 냄새가 났고 사기가 아니더라도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기초를 다지는 희생양이 될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체계가 안 잡힌 회사에 들어가면 얼마나 개고생 하는 지를. 가뜩이나 회사를 잘려 화도 치미는데 내가 왜 이 나이에 그런 곳에 가서 시험대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엄마에게 화를 냈다. "이건 사기"라고. 그리고 지금 내 나이가 몇 인데 유학 얘기하는지 짜증이 났다. 어머니는 일단 내 적금으로 학비를 내고 나머지는 차차 준비해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구채구에 위치한 신비로운 색의 오채지
 구채구에 위치한 신비로운 색의 오채지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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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돈으로 가란 얘기다. 왜 내 결혼 자금(물론 당장 할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으로 저런 사기 냄새가 짙게 풍기는 학교를 가라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강하게 세뇌된 게 틀림없었다.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끈질기게 권유하셨다. 화를 내면 일단 이야기를 멈추고 다음날 다시 시작하신다. 노련한 스킬이었다. 시시탐탐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어쩔 수 있는가. 일단 백기를 들고 방문해 이야기나 들어보기로 했다. 겉으로는 따라주는 척을 했지만, 사실 상담할 때 꼬투리를 잡아서 다 엎어 버릴 작정이었다. 다시는 얘기도 꺼내지 못하게.

학교를 방문할 당시 온갖 의심의 방어벽으로 뇌를 무장하고 입학하지 않겠다는 목적으로 들어갔지만 학장님과 어머니의 협공 작전은 간절하고 진지했다. 그만 나도 설득을 당해버렸다. 일단 일 년을 다니기로 했다.

중국인과 중국의 떡메치기를 경험하고 있다.
 중국인과 중국의 떡메치기를 경험하고 있다.
ⓒ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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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 년 중국어를 공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그 일 년 중 두 번을 본교에 방문해 본다는 조건도 마음을 끌었다. 나름 해외여행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팠던 구직활동과 작별을 했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중국어는 기본도 모르는 데다 스무 살의 막내 동생뻘 아이들과 함께 다닌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에 시작 전부터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아이들보다 머리도 안 돌아가는 건 물론이고 섞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래, 공부나 하자. 내 앞일만 생각하자.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이것이 시작하기 전의 다짐이었다. 아이들과 같이 어울릴 생각은 애초에 버렸던 것 같다. 마음을 다잡고 입학을 위한 준비하는 동안 3월 입학이 왔다. 도착한 한국 캠퍼스에서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7명. 본인 포함 2011학번 한국 유학생 총 인원이었다. 하지만 다들 친절하고 재미있었다.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 한심했다. 이 아이들과 일 년 동안 온갖 '먹방'을 찍고 놀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혼자 낄낄거린다.

내 삶 대부분이 된 중국, 그 이야기를 전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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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8살 2011학번 나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1년 후 나는 중국의 심양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진짜 중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1년간 죽어라 중국어만 팠지만 그래봐야 현지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다. 잘 할 수 있을까. 그냥 적당히 시집이나 갈 걸 왜 이 고생을 시작했을까 등등 많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2015년 현재, 뛰어난 학생이라고 자부하긴 뭣하지만 나름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현지학생들에 비해 성적도 떨어지지 않는 유학생이 됐다. 자막 없이 중국영화를 보며 피식거리고, 신문을 펴곤 간밤의 사건사고에 대해 혀를 차기도 한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양한 중국인 친구들이 생겼고, 그들의 집에 초대를 받으며 생활상을 속속 들여다봤다. 상하이 상해(上海), 우르무치(乌鲁木齐), 쓰촨(四川), 선양(沈阳), 다롄(大连), 베이징(北京) 등 알만한 도시는 물론 알려지지 않은 중국 곳곳을 여행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중국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보다 더 큰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중국 현지인들도 중국의 본 모습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린다. 너나할 것 없이 중국을 알기 위해 넓은 대륙으로 향한다. 하지만 막상 중국의 무엇을 알려하는지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오는 이들도 많다. 현지에 있으면서 연수나 유학, 여행 등 중국을 겪기 위해 온 한국인들도 많이 만났다. 같은 민족이지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저 코끼리 다리의 그림자만을 보고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 역시 중국의 실체를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그동안의 중국생활은 그 이전보다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르쳐줬다.

그간 보고 느꼈던 중국의 다양한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할 계획이다. 특별한 건 아니다. 먹고, 자고, 타고,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상의 모습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이나 초대받아 갔던 각 지역의 모습도 최대한 충실히 전할 계획이다.

그래서 중국을 알고자 하거나, 중국유학을 계획하거나, 중국의 여러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큰 보람이 될 것 같다. 물론 나의 젊은 날을 기록하는 의미도 될 것이다.

올해 9월 나는 중국 현지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그 이후의 모습도 계획은 있지만, 일단은 학업에 충실하려 한다. 그리고 보다 진지한 자세로 중국을 눈과 가슴에 담으려 한다. 그렇게 알게 된 정보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자 한다. 이 글은 그 첫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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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중국유학, #중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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