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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쌓인 눈 위에도, 길은 있다.
 밤새 쌓인 눈 위에도, 길은 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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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낮춰야 한다. 이를테면, 주저 앉아야 한다. 밤새 찬 공기에 떨었을 가련한 바위에 엉덩이를 댄다. 바위는 엉덩이를 만나 데워지고, 엉덩이는 찬 바위를 마주해 춥다. 딱딱한 바위와 물렁물렁한 엉덩이가 서로 얼싸안고 온도를 조절하는 동안 두 손을 거친 바닥 위에 얹는다.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추잡한 운동을 시작할 때다. 두 손으로 몸을 받쳐 엉덩이를 번쩍 든다. 왼발 앞으로, 오른발 앞으로. 뒤로 멀어진 두 손을 허리 뒤로 당긴다. 반복. 엉덩이를 들고, 왼발 하나 오른발 하나. 두 손 밀착.

끝내 넘지 못한 쏘롱 라가 내 뒤통수에 대고 비웃음을 던진다. 앞으로는 더스틴이 제 배낭과 내 배낭을 이고 진 채 걸어간다. 한참을 멀어지던 더스틴이 나를 돌아본다. 못마땅한 표정이 언뜻 서린 듯하다. 왜 아량 넓게 이해해 주지 못해? 시비를 걸고 싶지만, 지금은 산을 기어 내려가느라 꼴이 추하기도 하고 바빠서 일단은 봐주겠다. 그렇게 두 시간. 다시 토롱 페디다. 목적지에 도달한 게 이렇게 찜찜하고 우울한 적 있었던가. 됐고. 좀 쉬자. (관련 기사 : 나에게도 고산병이... 5500m에서 돌아섰다

다시 토롱페디로 내려가는 길. 우울한 내 마음을 달래려는지 설산 위로 해가 명랑하게 비춘다.
 다시 토롱페디로 내려가는 길. 우울한 내 마음을 달래려는지 설산 위로 해가 명랑하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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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해가 환해 날도 따뜻한데. 쏘롱 라로 향하는 트레커들이 떠나버린 토롱 페디는 어둑하던 새벽녘보다 춥다. 식당 구석에는 우울한 패배자들이 모여 식은 찻잔을 훌쩍이고 있었다. 이따금 잦은 기침을 쏟아내긴 해도, 미라는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 헨드릭과 로레나는 거뭇한 다크 서클이 출렁 내려앉은 퀭한 눈을 하고 있다.

레타르에서 네팔 사람들이 준 술을 한 잔씩 받아 마셨다가 속이 뒤집혀 며칠째 몸져 누웠단다. 이 커플. 이번 산행에서 만난 트레커 중 가장 재수가 안 좋다. 카트만두에서 도난을 당한 데다 여행 일정도 틀어지고. 기껏 여기까지 왔건만 술 한 잔 받아마신 죄로 며칠째 앓고 있다. 나같으면 '에라이, 안나푸르나 따위', 중얼거리며 돌멩이나 한 번 걷어차고 내려가 버렸을 텐데. 돌멩이 대신 담요 하나를 붙잡고 둘이 꼭 붙어서 헤헤 웃고 있다. 너네, 그 정도면 마조히스트 아니니. 그래. 행복이란 어느 정도는 의지의 문제다.

미라의 방에서 쉬면서 내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반나절 정도 쉬고 난 후에도 상태가 안 좋다면 야크카르카까지 내려가야 할 것이다. 차가운 이불 위에 몸을 눕혔다. 천장이 뱅뱅 돌고 몸이 푹 꺼진다. 쏘롱 라. 나를 받아주지 않은 쏘롱 라를 생각하니 패배의 기분에 몸이 더 가라앉는다. 됐어. 쏘롱 라 따위 잊어 버려. 그딴 거 넘지 않아도 그만이야.

정상을 찍자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 쏘롱 라를 넘든 넘지 않든, 달라지는 건 없어. 난 실패한 게 아니야. 아니 실패라고 해도 상관없어. 이미 많은 걸 얻은 안나푸르나니까. 욕심은 그만 부리자. 그만 괴롭자. 쏘롱 라는 잊고, 히말라야와 내 몸이 전하는 경고를 묵묵히 받아들이자. 

토롱페디에서 하이캠프로 이어지는 길.
 토롱페디에서 하이캠프로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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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잠을 잤나 보다.

"괜찮은 것 같아?"
"머리는 아직 조금 아픈데. 아까보단 나아."
"기억하지? 무리해서까지 쏘롱 라 넘지 말자고. 몸이 계속 안 좋으면 왔던 길로 돌아가는 거야. 생각해 봤는데.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뭔가…. 현명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

사실은 더스틴도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미안해. 오늘 넘었으면 좋았는데."
"뭐가 미안해. 느리게 내려온다고 짜증 내서 내가 미안해."


식당으로 갔다. 저녁을 힘없이 떠먹으며, 패배자들과 힘없는 대화를 나눴다. 배가 뜨끈하니 기운이 올라온다. 쓸데없는 욕심도 함께 올라온다. 아무래도 야크카르카로 내려가는 건 억울해. 왔던 길을 되돌아 베시사하르까지 다시 가겠다고? 쏘롱 라만 넘을 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다를 게 없을 텐데. 한 번 더 해보자. 갈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새벽에는 출발부터 느낌이 안 좋았어. 이제 그런 느낌은 없어. 머리도 안 아프고. 오늘 밤 자고 나면 더 나아질 것 같아. 가자. 더스틴, 가자.

쏘롱 라로 향하는 길
 쏘롱 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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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른 쏘롱 라에서 마주한 하얀 세상

기어이 다시 산에 올랐다. 이렇게 하루 만에 좋아질 거였다면 역시 꾀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멋쩍긴 하지만. 출발은 어제보다 두 시간 늦은 새벽 6시 반. 이 시간에 출발해 오늘 쏘롱 라를 넘는 건 무리다. 고산병이 도질 수도 있다. 오늘은 하이캠프까지만 오르자.

하이캠프에는 아멧을 비롯한 네댓 명의 트레커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진해질수록 눈송이는 굵어졌다. 산장 안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추위 때문인지 마음은 더 초조하다. 까짓 거 다시 내려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돌아선 지 오래다. 꼭 넘고 싶다, 쏘롱 라. 묵티나트에 가서, 나 왔다고 외치며, 모두의 환영을 받고 싶다.

하이캠프 산장. 자고 일어나니, 창 밖은 4,850m 고도에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하이캠프 산장. 자고 일어나니, 창 밖은 4,850m 고도에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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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캠프에서 밤을 지새는 사이 눈이 내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진해질수록 눈송이는 굵어졌다.
 하이캠프에서 밤을 지새는 사이 눈이 내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진해질수록 눈송이는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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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샜다. 창 밖은 4850m 고도에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오점 하나 없는 순결한 눈을 짓밟으며 식당으로 갔다. 부지런한 트레커들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산장 문을 나서고 있었다. 텅 빈 산장엔 우리 둘만 남았다.

우리는 날씨를 조금 더 지켜본 후 오늘 쏘롱 라를 넘어야 할지 판단을 해 볼 요량이었다.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우중충한 구름 사이로 해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만 가보자. 날이 개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오전 7시에 어울리는 하늘은 아니다. 선글라스를 꼈다. 검은색 안경 밖으로 세상이 한층 더 우울해졌다. 이런 날씨에 산장을 나선 것 자체가 아둔함의 증거가 아닌가, 곰곰이 스스로를 돌아보던 찰나. 트레커 두 명이 우리를 앞질렀다. 다행이다. 바보가 우리 말고 또 있어서.

이틀 전 걸었던 길인데, 밤새 내린 눈으로 길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틀 전 걸었던 길인데, 밤새 내린 눈으로 길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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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씨에 산장을 나선 것 자체가 아둔함의 증거가 아닌가, 곰곰이 스스로를 돌아보던 찰나. 트레커 두 명이 우리를 앞질렀다. 다행이다. 바보가 우리 말고 또 있어서.
 이런 날씨에 산장을 나선 것 자체가 아둔함의 증거가 아닌가, 곰곰이 스스로를 돌아보던 찰나. 트레커 두 명이 우리를 앞질렀다. 다행이다. 바보가 우리 말고 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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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발길을 돌렸던 티숍이 보였다. 밤새 내린 눈으로 길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잔뜩 쌓인 눈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후회했다. 다리 앞은 낭떠러지였다. 밤새 내린 눈이 잔인하고 완벽하게 깔린. 낭떠러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트레커들의 잦은 발자국에 반질반질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포카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신발을 신은 내 발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길이었다. 뒤를 돌아봤다. 덥수룩한 수염과 선글라스에 덮여 표정을 알 수 없는 더스틴이 서 있었다. 돌아가자고 말해야 하는데 몸을 돌리기가 두려웠다. 작은 소리라도 냈다가는 그 반동에 몸이 기우뚱해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돌아갈 순 없으니 앞으로 가야 했다. 좁은 빙판길 위에 오른발을 올렸다.

다시 후회했다. 미치도록 후회했다. 이런 상황에 나를 몰아세운 스스로를 온몸으로 증오할 만큼. 그러니까 난, 얼음 위에 위태롭게 선 오른발 하나에 내 몸과 배낭의 무게를 모두 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오른발이 미끄러지지 않고 내 몸을 지탱해 주는 기적이 일어난 후, 또 한 번의 기적을 바라며 좁은 길 사이로 왼발을 밀어 넣어야 한다. 달리는 철도 위에서 적과 싸우다가 지나가는 트럭 위에 몸을 착지 시키는 말도 안 되는 액션 영화의 히어로가 할 만한 불가능한 일이다.

코끝으로 살포시 눈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다. 미끄럽다. 눈의 성질을 짜릿하게 느끼는 코끝의 감촉이 나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래. 눈은 차가워. 미끄럽지. 미끄러운 눈을 따라 낭떠러지를 끝없이 내려가다 차가운 눈더미 속으로 푹 꺼져 버릴 거야. 더스틴은 구조를 요청할 테지만, 이런저런 부딪혀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테지. 아니, 죽지 않으면 다행인가.

"못해! 못하겠어!"

나는 마음을 다해 울부짖었다. 이건 진심이었다.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100% 순도의 고백이었다. 마음을 다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더스틴이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내 몸은 까치발을 들고 선 왼발에 몸의 모든 균형을 맡긴 채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뒤로 돌기는커녕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난 이제 끝이다.

낭떠러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트레커들의 잦은 발자국에 반질반질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포카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신발을 신은 내 발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길이었다.
 낭떠러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트레커들의 잦은 발자국에 반질반질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포카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신발을 신은 내 발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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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란, 버티는 것

"겁을 먹으면 안 돼요! 산은 당신이 겁을 먹었는지 당당한지 알고 있어요! 겁을 먹으면 떨어질 거예요! 자신감을 가지고, 발을 땅에 힘껏 꽂으면서 걸어봐요!"


앞으로 가던 미국인 부부의 가이드가 보다 못해 외쳤다. 산이 알고 있다고? 내가 지금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는 건 내가 알고 네가 알고 하늘이 아는데. 산이라고 모를 리가 없잖아. 그렇게 외치지만 말고 좀 도와주지 그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팔 하나만큼의 거리가 부족하다. 결국,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더스틴도, 가이드도,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건 포기다. 하지만 인생의 어떤 순간엔, 포기라는 건 선택할 자유가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특권이다. 나에겐 포기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왼발을 앞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 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온몸을 지탱하던 왼발을 앞으로 뻗는 순간, 내 인생은 세 갈래 중 하나의 길로 접어들 것이었다. 첫째, 기적이 일어나 무사히 건넌다. 둘째, 눈 속으로 보기 좋게 나동그라져 생을 마감한다. 셋째, 눈 속에 갇히되 기적적으로 구출된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선택은 내 손에서 떠났다.

내 두려움은, 산도 알고있다.
 내 두려움은, 산도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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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의 세상. 색도, 무늬도, 아무런 존재도 없는. 무의 세상에서는 내 존재마저도 의심스럽다.
 무(無)의 세상. 색도, 무늬도, 아무런 존재도 없는. 무의 세상에서는 내 존재마저도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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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왼발을 들어냈다. 갑작스레 실린 무게에 오른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순간 산이 내 두려움을 알아챌까 싶어 왼발을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내다 꽂았다. 앞에서 지켜보던 가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강한 힘에 이끌려 위태로운 몇 발자국을 더 걸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벼랑길을 걸어냈다. 뒤로는 더스틴이 내가 걸은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빠르게, 당당하게.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정말 위험했어. 조금이라도 미끄러졌으면 바로 황천길이잖아."


건너온 다리가 무너진 격이었다. 아니, 건너온 다리를 제 손으로 무너뜨린 격이었다. 우리는 하이캠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낭떠러지를 건너기 전에 용기를 내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제 우리 손에 남은 패란 쏘롱 라를 넘어 묵티나트로 가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늘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하얀 벌판 위로 눈을 계속 떨어냈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놀라 머리가 하얗게 세는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쏘롱 라를 넘느냐 안 넘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하늘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하얀 벌판 위로 눈을 계속 떨어냈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놀라 머리가 하얗게 세는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쏘롱 라를 넘느냐 안 넘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하늘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하얀 벌판 위로 눈을 계속 떨어냈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놀라 머리가 하얗게 세는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쏘롱 라를 넘느냐 안 넘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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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씨 속에서 산길을 계속 걷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티숍에서 하루를 묵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눈이 내린다면, 며칠이고 티숍에 고립될 수도 있다.
 이 날씨 속에서 산길을 계속 걷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티숍에서 하루를 묵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눈이 내린다면, 며칠이고 티숍에 고립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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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씨 속에서 산길을 계속 걷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티숍에서 하루를 묵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눈이 내린다면 며칠이고 티숍에 고립될 수도 있다. 게다가 하이캠프보다 고도가 높은 곳 아닌가. 고산병 증세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미친 짓 중에서는 오늘 쏘롱 라는 넘는 것이 가장 덜 미친 짓이었다.

뒤따라 오던 남자 두 명이 나를 추월했다. 아마 저들이 오늘 쏘롱 라를 넘는 멍청한 트레커 무리의 마지막일 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차갑게 식었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지막. 여기서까지 꼴찌가 될 수는 없다. 꼴찌가 되는 순간 고립은 한순간이다. 조난이라도 당한다면 누구에게 구조를 요청할 텐가. 꼴찌만은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뒤처지면 안 된다.

몸은 의지와 다르게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무릎 높이로 쌓인 눈을 헤치는 데에만 너무 많은 체력이 소모되었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앞서 나간 트레커들의 발자국에 내 발을 끼워 맞추며 걸었다. 하늘은 온통 하얗다. 아니, 하늘인가 했던 것은 땅이다. 아니, 땅인가 했던 것은 안개다. 하늘과 땅과 대기의 경계는 사라졌다. 주변은 온통 하얗다. 이젠 내 머릿속마저 하얗다. 화이트 아웃이다. (화이트 아웃 : 눈이 많이 내린 뒤 눈 표면에 가스나 안개가 생기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현상)

하늘은 온통 하얗다. 아니, 하늘인가 했던 것은 땅이다. 아니, 땅인가 했던 것은 안개다. 하늘과 땅과 대기의 경계는 사라졌다. 주변은 온통 하얗다. 이젠 내 머릿속마저 하얗다. 화이트 아웃이다.
 하늘은 온통 하얗다. 아니, 하늘인가 했던 것은 땅이다. 아니, 땅인가 했던 것은 안개다. 하늘과 땅과 대기의 경계는 사라졌다. 주변은 온통 하얗다. 이젠 내 머릿속마저 하얗다. 화이트 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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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 의 세상. 색도, 무늬도, 아무런 존재도 없는. 무의 세상에서는 내 존재마저도 의심스럽다. 앞으로 가는 더스틴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뿌옇게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오래 걸은 걸까. 얼마만큼 온 걸까. 온통 하얀 세상 속에서는 거리도, 시간도 가늠하기 어렵다.
 무(無) 의 세상. 색도, 무늬도, 아무런 존재도 없는. 무의 세상에서는 내 존재마저도 의심스럽다. 앞으로 가는 더스틴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뿌옇게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오래 걸은 걸까. 얼마만큼 온 걸까. 온통 하얀 세상 속에서는 거리도, 시간도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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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하고 하얀 세상. 뿌연 세상 안에 갇힌 나는, 혼자다. 들리는 건 내 숨소리. 보이는 건 하얀 공기 위를 더 하얗게 채워나가는 내 숨결뿐이다. 나는 어디를 걷고 있는가. 두 발은 눈 위를 가르며 계속 움직이지만,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풍경 같은 건 없었다. 무(無)의 세상. 색도, 무늬도, 아무런 존재도 없는. 무의 세상에서는 내 존재마저도 의심스럽다. 앞으로 가는 더스틴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뿌옇게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오래 걸은 걸까. 얼마만큼 온 걸까. 온통 하얀 세상 속에서는 거리도, 시간도 가늠하기 어렵다.

변하지 않는 풍경 속에서 제자리걸음 하듯 양발을 바삐 움직였다.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하얀 안개 사이로 쏘롱 라의 표지가 드러났다. 다시 몸을 추슬러 하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THORONG-LA PASS
5416M
CONGRATULATION FOR THE SUCCESS!!!
'5416m 쏘롱 라. 성공을 축하한다.'


쏘롱 라에 박힌 말뚝의 축하 메시지가 눈 속에서 태연하게 나를 반겼다. 수도 없이 떠올렸던 이 순간. 기쁨, 환희, 성취감, 보람, 감동 따위의 감정들. 기쁨 대신 두려움, 환희와 성취감 대신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5,416m 쏘롱 라. 성공을 축하한다.' 쏘롱 라에 박힌 말뚝의 축하 메시지가 눈 속에서 태연하게 나를 반겼다.
 '5,416m 쏘롱 라. 성공을 축하한다.' 쏘롱 라에 박힌 말뚝의 축하 메시지가 눈 속에서 태연하게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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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숍으로 들어갔다. 긴장 때문에 잊고 있었던 추위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온몸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가 드드득 부딪혔다. 핫초콜릿 한 잔을 주문해 손을 녹였다. 뜨끈하고 걸쭉한 액체를 얼어붙은 혈관으로 흘려보냈다. 두렵고 초조한 마음은 녹아들지 않았다.

"큰 바람이 오고 있어요. 저도 얼른 문을 닫고 내려가야 해요."


티숍 주인장이 우리를 재촉했다. 덜덜 떨리던 이가 긴장으로 멈춰 섰다. 쏘롱 라의 티숍을 매일같이 지키는 이가 두려워하는 바람. 그런 바람이 오고 있었다. 남은 핫초콜릿을 대충 들이부었다. 미국 부부의 아내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남편이 커피 대신 차를 마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지루한 근거를 늘어놓고 있었다.

아니, 저들에겐 상황 파악 같은 건 필요 없다. 저들에겐 쏘롱 라를 수십 번이고 넘었을 경험이 많고 든든한 가이드가 있잖아. 처음 보는 하얀 세상에 뚝 떨어진 우리 둘은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고아처럼 순진하고 연약했다. 쏘롱 라는 우리에게 성공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성공이 아니다.

성공은, 어떻게 해서든 미국 부부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이다. 절대로 마지막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무사히 내 몸을 건사하는 것이고, 묵티나트에 닿는 것이다. 무엇보다, 살아남는 것. 버티는 것. 그게 성공이다.

미국인 부부.
 미국인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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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숍으로 들어갔다. 긴장 때문에 잊고 있었던 추위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더는 미련한 내 명령만 기다릴 수 없었던 온몸이 스스로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가 드드득 부딪혔다. 핫초콜렛을 하나 주문해 손을 녹였다.
 티숍으로 들어갔다. 긴장 때문에 잊고 있었던 추위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더는 미련한 내 명령만 기다릴 수 없었던 온몸이 스스로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가 드드득 부딪혔다. 핫초콜렛을 하나 주문해 손을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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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바쁘다. 수북한 눈을 가르며 뛸 듯이 걸었다. 뛸 듯이 걸었지만 기는 듯 느렸다. 절대로 따라잡히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고 기원했다. 가이드와 여자가 나를 앞질렀다. 아직 남자가 남아 있었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남자가 나를 앞질렀다. 무서워. 제발 먼저 가지 마요. 꽁꽁 언 산중에 우리만 남겨두지 마요. 미국 부부와 가이드는 시야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멀어졌다. 나는 우는 듯 숨을 흐느끼며, 발목까지 푹푹 차오르는 눈을 밟고 또 밟았다.

적막하고 하얀 세상. 뿌연 세상 안에 갇힌 나는, 혼자다. 들리는 건 내 숨소리. 보이는 건 하얀 공기 위를 더 하얗게 채워나가는 내 숨결뿐이다.
 적막하고 하얀 세상. 뿌연 세상 안에 갇힌 나는, 혼자다. 들리는 건 내 숨소리. 보이는 건 하얀 공기 위를 더 하얗게 채워나가는 내 숨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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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나푸르나 , #쏘롱 라, #쏘롱 패스, #안나푸르나 라운딩,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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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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