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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5일 오전 10시 건축관 소광장은 온통 붉었다. 제1회 건축작품전을 알리는 플래카드도 붉었고, 테이프 커팅식 도우미들의 치파오도 붉었고,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포도주도 붉었다. 작품전 개막을 선언하는 국제학원장의 목소리는 카랑카랑 했다. 내 맞은편에서 함성과 박수를 보내는 학생들의 얼굴도 반짝반짝 붉었다.

한 학기 동안 졸업설계를 준비하면서 웬수도 이런 웬수가 없다며 전투를 치렀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고 콧등이 시큰거렸다. 방금 전 학생들이 달아준 카네이션처럼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 해 봄 5학년 학생들은 특별한 존재였다. 칭다오 이공대학교 국제학부 건축학과의 제1회 졸업생들이었으니까. 국제학부는 첫 졸업생을 맞아 지난 5년간 한중 합작 프로그램의 성과를 기념하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작품전을 기획했다.

국제학부 건축학과의 첫 졸업전시, 그러나...

루오란의 졸업 작품 The Continuity of Memory: Reinterpretaion of Historic ‘Liyuan’ (위: 판넬, 아래: 모형 사진) 근대 독일과 일본이 칭다오를 점령한 후 약탈 창구로 활용했던 옛 항구 지역 재개발 계획안. 당시 인근 중국인 노동자들이 살았던 중서(中西) 절충형 집합주택 ‘리위안’을 재해석하여 공공 건축으로 설계한 작품.
 루오란의 졸업 작품 The Continuity of Memory: Reinterpretaion of Historic ‘Liyuan’ (위: 판넬, 아래: 모형 사진) 근대 독일과 일본이 칭다오를 점령한 후 약탈 창구로 활용했던 옛 항구 지역 재개발 계획안. 당시 인근 중국인 노동자들이 살았던 중서(中西) 절충형 집합주택 ‘리위안’을 재해석하여 공공 건축으로 설계한 작품.
ⓒ Luo 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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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전시회는 있었지만, 학기말 모든 학생들이 설계실과 복도에 걸어두고 발표하는 자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첫 졸업생이니만큼 대외적인 전시회가 필요했다. 원래는 학교 외부의 전시공간을 빌려 좀 더 거창하게 하려고 했지만 학교 여건상 결국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건축관 전시공간으로 규모를 축소하고 포스터와 리플릿을 만들었다. 건축작품전은 모든 학년들이 참여하지만 주인공은 역시 5학년이다. 나를 포함해 두 명의 교수가 5학년 졸업설계를 맡았다. 중국에서 맞는 첫 졸업생, 첫 번째 건축전이라서 모든 것이 실험이고 도전이었다.

그만큼 예상 밖의 일들이 터졌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건축전 준비도 아니었고, 중국 교수들과 수시로 불거지는 졸업 방식에 대한 이견 문제도 아니었다. 바로 5학년들의 확 바뀐 수업태도였다. 개학을 했는데도 5학년들은 좀처럼 설계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도 수업 중간에 슬며시 사라지기 일쑤였다. 출석을 꼭 챙기는 중국 학생들이 왜 이럴까.

학생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마치 졸업은 따 놓은 당상쯤으로 여기고, 다들 진학과 취업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한국도 그렇듯이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정도가 심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한순간에 불어대는 공무원 바람이었다.

다른 학과도 아니고 5년 동안 밤잠 설쳐 가며 전공 공부를 해놓고 막판에 공무원이라니. 철밥통 공무원 바람이 건축학과에도 불자 평소 공무원에 관심 없던 학생들마저 밑져봤자 본전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식으로 우르르 따라갔다. 어떤 학생은 아예 공고가 난 지역의 전문 학원에 가서 족집게 수업을 듣겠다며 통사정을 했다.

이미 대학원 시험을 끝낸 학생들도 그 대열에 합세했다. 중국 대학원 입시는 매년 1월 10일 교육부 주관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영어와 정치 시험을 치른다. 그 다음에 학교별로 전공시험과 면접이 있다. 그런데 최종 결과는 한참 후에 나온다. 그때까지 그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대학원 입시에 떨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공무원 시험이든 취업이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게 된다.

두 번째 놀라운 것은 5학년들이 졸업설계 작품전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것. 알고 보니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같은 대학이지만 중국인 교수들이 가르치는 건축학원 건축학과는 졸업설계 발표를 전시회 형식이 아닌 논문 발표식으로 했다.

그곳 학생들은 그동안 배워온 여러 기능의 건축 중 하나를 선택하여 깊이 있게 다룬 후, 설계사무소 수준의 실무 도면집을 만들어 발표한단다. 반면 국제학원 건축학과는 국제 현상설계에서 중시하는 디자인 개념, 이슈가 될 만한 공간과 형태, 사회적 의미 등을 다룬 계획 도면과 모형을 전시하여 발표한다. 전자가 깊고 촘촘하다면, 후자는 넓고 융합적이다.

그 차이는 설계사무소 취업과 대학원 진학 준비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을 포함해 미국, 유럽의 건축학과 학생들은 졸업할 무렵 작품집을 만든다. 미국과 유럽은 진학이든 취직이든 작품집이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이다.

한국도 설계사무소에 취직하려면 작품집이 필수이다. 한 권의 작품집은 자신의 설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래서 예전에 했던 설계 작품들까지 끄집어내 다시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작품의 질을 높이려는 학생들이 많다. 특히 졸업설계는 자신의 능력을 낱낱이 보여주는 작품집의 꽃이기 때문에 할 일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중국에 분 공무원 취업 바람, 우리도 피해갈 순 없었다

하지만 중국 학생들은 사정이 달랐다. 대학원 시험이든 설계사무소 취직이든 설계시험을 본다. 한국의 건축사 실기 시험처럼 대지와 설계 조건을 주고 제한된 시간 안에 설계를 하는 시험이다. 학생들은 기출 문제를 풀면서 빠른 시간에 답안을 작성하고 도면을 그리는 연습을 한다. 그 연습 시간도 부족한 판에 국제학원 학생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전시회 준비에, 한중 합작 프로그램이라서 한국어 능력 시험까지 봐야 하니 부담스러울 만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국외 대학과 합작한 교육은 중국 국내 사정과 맞지 않고 외국 유학 갈 학생에게나 적합하다는 불평을 했다. 하지만 그 불평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평소 설계 실력이 좋으면 설계를 풀어가는 능력이 탄탄하게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학원 교육은 기본적으로 5년제 건축학 인증에 맞는 국제 기준을 따르고 있고, 합작 프로그램으로 두 개의 졸업장을 받으면 월급을 좀 더 많이 주는 중국 국내 설계사무소도 있었다.

세 번째는 졸업설계 전에 있었던 실습 학기 탓도 있었다. 한국과 달리, 중국 학생들은 5학년 1학기가 되면 학교에 오지 않고 설계사무소에서 실습을 한다. 산동성 교육부에서 정한 필수 사항인데, 실습이 끝나면 일한 증거물을 학교에 제출해야 학점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절반 이상의 학생들은 4학년 2학기부터 중국 국내 대학원이나 외국 유학 준비를 한다. 공부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설계사무소에서 보내는 학생은 없다. 그런데도 실습 기간이 끝나면 진짜 실습 나간 학생들처럼 회사 로고가 찍힌 한 뭉치의 도면과 파일을 들고 학교에 나타난다. 물론 그것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얻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런 식으로 실습을 때우는 것이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알면서 모른 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설계에 손을 놓은 학생들의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깊고 촘촘하게 진학 준비만 해온 학생은 넓고 융합적인 안목이 떨어졌다. 설계사무소에서 실습을 했던 학생들도 매한가지였다. 아직 졸업도 안 한 그들이 설계사무소에서 할 일이란 뻔하다. 하루 종일 복사하고 남들이 다 그려놓은 도면을 수정하거나 모형을 만든다.

머리 쓸 일도 상상할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설계 현장에서 매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현실의 건축가는 그동안 머릿속에 그려왔던 건축가의 모습이 아니다. 실망한 학생들은 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설계사무소에 취직할 것인가, 공무원이 될 것인가. 뒤숭숭한 마음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도통 졸업설계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다가 5월이 다가왔다. 졸업설계 마감은 6월 10일이었다. 한 학기 동안 할 설계를 한 달 만에 끝내야 하는 시점에 이르자 학생들은 비로소 다급해졌다. 그동안 대학원 시험 결과가 나왔고 취업도 거의 정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졸업, 간만에 설계실에 모든 학생들이 모였다. 불평과 핑계도 사라졌다.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여 다 같이 졸업하자'했더니...

건축학원 전시회와 졸업설계 발표 모습
 건축학원 전시회와 졸업설계 발표 모습
ⓒ 칭다오 이공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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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주일에 한 번, 하루 종일 하던 설계 수업을 매일 했다. 진도가 늦은 학생들은 주말에도 나오게 했다. 발표와 토론 위주의 수업은 1:1 수업으로 바꾸었다. 설계실 벽에는 매일 시간 단위로 도면 체크할 학생들의 명단과 출석표가 붙여졌다. 내 입에는 모터가 달렸고 하루하루가 번갯불에 콩 볶듯이 흘러갔다.

몸도 마음도 바쁘다보니 학생들 사이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났다. 내가 보던 책 누가 가져갔어? 오늘 아침에 사온 모형 재료는 누가 어디로 치운 거야?… 평소 서로 좋아 죽고 못 살던 커플도 쨍쨍거리며 싸웠다. 다들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빠듯한 스케줄 때문에 학생들을 마구 몰아붙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어쨌든 5년 동안 같은 설계실에서 함께 보낸 급우가 아닌가. 사회에 나가서 건축 일을 하다보면 어디선가 또 만날 텐데, 졸업장도 중요하지만 그들 곁에 오래할 사람도 남겨야지. 나는 성격 좋고 재치 있는 Z를 불렀다. 그녀에게 내 생각을 말하고 거기에 어울릴 만한 문장을 부탁했다. Z는 칠판 한가운데에 여덟 자의 한자를 커다랗게 썼다.

齐心协力 共同毕业!(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여 다 같이 졸업하자!)

나는 옳거니 하며 손뼉을 쳤다. 날이 서 있던 학생들도 왁자지껄 웃어댔다. 대학교 5학년 학생에겐 유치할 테지만, 그땐 그 말이 꼭 필요했다. 우리는 졸업설계 마감일까지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

Z덕에 학생들은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 무렵 학교 당 관계자와 국제학원 부원장이 설계실에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칠판에 있는 여덟 글자를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당 관계자가 기념이라며 칠판 사진을 찍고 말했다.

"진라오스, 다음에 식사나 함께 합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졸업설계를 무사히 마쳤다. 맨 처음 계획했던 그럴싸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탈락자도 없었고 건축전도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사람도 사물도 온통 붉게 빛나던 건축전 개막식이 끝나자 학생들이 내게 와서 엉겨 붙었다.

내가 중국에 온 첫 해에 가르쳤고 졸업 학기에 다시 가르친 학생들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시내 식당에서 작별 파티를 열었다. 칭다오 맥주가 몇 차례 테이블을 도는 사이, 나와 학생들의 얼굴과 마음은 또 붉어졌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한 학기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식당을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속말을 했다. 잘 가거라, 내 첫 번째 중국 제자들아!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두려워하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 살다보니 건축이 네 인생이 아니라면, 그래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면, 까짓것, 버려도 좋다. 一路顺风(하는 일이 잘 풀리길)!


태그:#중국 칭다오 이공대, #중국건축작품전, #중국건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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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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