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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로드 간즈에서 만난 티베트 벽화. 티베트의 자유를 갈구하는 티베트인들의 다양한 표정이 그려져 있다.
 맥그로드 간즈에서 만난 티베트 벽화. 티베트의 자유를 갈구하는 티베트인들의 다양한 표정이 그려져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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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친절한 유주상씨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나도 모르겠네, 그냥 막 눈물이 나오네요."

다람살라에 자리한 티베트 임시정부의 중심 사원이라 할 수 있는 남갈 사원(Namgyal Gompa)에서 마니차를 돌리다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꿀꺽 꿀꺽 넘겨가며 눈물을 참아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창피해 죽겠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한 번 돌리면 불교 경전을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둥근 원통의 마니차는 맥그로드 간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신앙심 깊은 티베트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돌리는 마니차, 작은 것에서부터 보통 사람 키보다 더 큼직한 것까지 다양하다. 신앙심 깊은 티베트 불교의 순례자도 아닌 내게 마니차가 대체 무엇이길래 그토록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것일까.

한 번 돌리면 불교 경전을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둥근 원통의 마니차는 맥그로드 간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갈 사원에 사진기를 들고 갈수 없다. 맥간 거리에서 만난 마니차.
 한 번 돌리면 불교 경전을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둥근 원통의 마니차는 맥그로드 간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갈 사원에 사진기를 들고 갈수 없다. 맥간 거리에서 만난 마니차.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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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에서 두 팔과 두 다리와 이마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대고 수없이 절하고 또 절하는 티베트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오체투지 하는 그 모습들이 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나라를 잃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의 온갖 고난사가 어지럽게 떠올랐다.

티베트 고난사... 곳곳에 남아 있는 그 흔적

남갈 사원 입구에 걸려있는 티베트 열사들의 사진
 남갈 사원 입구에 걸려있는 티베트 열사들의 사진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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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에 들어서기 전에 티베트 박물관에서 보았던 영상물, 사원 입구에 걸린 사진들이 떠올랐다. 중국 인민군의 총부리에 쫓겨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티베트인, 티베트 독립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수많은 티베트 열사들...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침공했다. 힘이 약한 티베트는 중국의 무력에 제대로 저항조차 못했고 결국 중국의 한 자치구가 되었다. 그 후 50여 년 동안 최소 12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없이 많은 사원들이 쑥대밭이 되었다.

티베트인들에게 사원은 예술과 학문이 전수되던 배움터나 다름없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던 중국은 1950~1980년에 걸쳐 6000곳 이상의 사원을 파괴했다. 1970년대 말에는 남은 사원이 여덟 곳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티베트 사람들이 '생불'로 여기는 달라이 라마는 1959년 인민해방군의 추격을 피해 3개월에 걸쳐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탈출한다. 탈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59년 티베트 반란 직후 몇 년 동안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8만 명이었다. 그 후로도 티베트인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끊임없이 탈출을 감행해 현재는 14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망명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티베트인들의 고난,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수많은 젊은 청춘들의 희생이 가슴 저리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눈물이 쏟아져 나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티베트의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달라이 라마를 따라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에 들어선 티베트 난민들.
 티베트의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달라이 라마를 따라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에 들어선 티베트 난민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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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인들의 슬픔과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그 어떤 슬픔의 덩어리가 한데 뒤엉켜서 나온 눈물이었다. 그 슬픔을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억압 당하고 그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슬픔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맥그로드 간즈(아래 맥간)에서 티베트 도서관과 망명정부를 둘러보기 위해 다람살라로 향했다. 다람살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만큼 맥간은 다람살라에 비해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외국인 관광객들이 뜸했다. 한적한 길가에서 엄마나 아버지 손을 잡고 통학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만났다. 부모의 손을 잡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은 이제 갓 입학한 녀석들이라고 한다. 교육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티베트인들에게 아이들은 티베트의 또 다른 희망이다.

통학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지나치자마자 도베르만을 닮은 검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왔다. 녀석이 컹컹 짖어대며 달려든다. 나는 본래 개를 무서워하지 않기에 험악하게 달려드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녀석이 꼬리를 내리고 이내 혓바닥을 내민다. 그 덩치 큰 놈이 강아지처럼 두 발을 세워 내 가슴에 안긴다.

개의 성품은 주인이나 그 주변 사람을 닮기 마련이다. 이제 막 문을 열어 놓은 상점에서 짜이를 마시고 있던 티베트 사람 몇몇이 개와 뒤엉켜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환하게 웃어가며 손짓을 한다.

"짜이 한 잔 하고 가세요."
"괜찮습니다. 티베트 도서관 가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 길 따라 쭉 가세요. 마을이 나오면 다시 물어 보세요."

사전 정보는 물론이고 지도 한 장 없었다. 나는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티베트 도서관을 찾아갔다. 티베트 도서관에서 관리한다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라마 승려인 동생과 함께 생활한다는 한국인 스님을 만나기로 했다. 그가 어느 숙소에 묵고 있는지 티베트 도서관을 통해 알아내야 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티베트 남갈사원 전경
 티베트 남갈사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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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특별히 만두를 만들어주는 사람들

한국에서 생활할 때나 인도에 와서나 본래 아침밥을 먹지 않았지만 도서관 개관 시간을 맞추기 위해 근처 식당을 찾아가 모모(만두)를 주문했다. 그런데 아침에는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강의 시간을 기다리며 식당에서 짜이를 마시던 라마승을 만나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티베트 도서관에서 불교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데 보통 한 강좌에 30여 명의 외국인들이 수강한다고 한다. 라마승 말로는 점심때가 되어야 모모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짜이를 한 잔 마시고 모모 대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인상 좋은 티베트 식당 주인이 다가왔다.

"특별히 모모를 준비해 줄 수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도서관 문을 아직 열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도서관 주변에는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는 건물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 건물 주변으로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다. 이제 티베트 불교는 신앙심 깊은 티베트인들만의 불교가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인들도 용서와 자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자비로운 걸음걸이만큼 티베트 불교는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티베트 도서관 앞에 자리한 강의실. 티베트 불교를 배우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외국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티베트 도서관 앞에 자리한 강의실. 티베트 불교를 배우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외국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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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과 미국 사람들은 티베트 승려들로부터 티베트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다. 1970~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독일, 미국, 영국을 비롯해 호주, 스페인, 그리스, 캐나다, 이탈리아 등지에 티베트 불교 센터가 생겨났다. 한국에는 2000년대에 들어서 티베트 센터가 들어섰다. 이와 함께 세계 곳곳의 대학에 티베트학과가 개설되고 티베트어 불교 경전이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그 중심에 티베트 망명자들이 있다.

식당 안에는 나이 어린 티베트 스님, 라마승 몇몇이 갓 구워낸 밀가루 빵 짜파티를 먹으며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몸짓과 음성이 따로 놀고 있는 오래된 인도 액션 영화다. 다들 넋을 놓고 영화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보다 두세 살 더 먹어 보이는 라마승 몇몇이 들어오자 먼저 와 있던 어린 라마승들이 식당을 빠져 나갔다.

리모컨을 독차지한 16~17살쯤 돼 보이는 라마승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린다. 오전 8시 30 분쯤에 주문한 모모는 9시 2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다. 식당 안과 밖으로 손님들이 대기하고 있어 주방 안에서 일하는 두 사람의 일손으로는 역부족인 듯싶다. 아침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모모를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내오는 것이기에 늦을 수밖에 없다.

느릿느릿 식사를 마친 라마승들은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텔레비전 채널을 부지런히 돌려댄다. 식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위성 텔레비전의 다양한 채널을 탐색하러 온 것 같다. 이들 어린 라마승들에게서 나라 잃은 티베트의 고난사는 까마득한 과거처럼 다가올 것이다.

인도에서 방영하는 위성채널과 어린 라마승들을 지켜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드디어 모모가 나왔다. 다소 짠맛이 배어 있는 모모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티베트 도서관 옆 식당에서 만난 어린 라마승들이 텔레비전에 푹 빠져 있다.
 티베트 도서관 옆 식당에서 만난 어린 라마승들이 텔레비전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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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티베트 불화가 걸려 있는 티베트 도서관 내부
 곳곳에 티베트 불화가 걸려 있는 티베트 도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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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불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티베트 불화가 걸려 있는 도서관을 둘러봤다. 사서로 보이는 티베트 여인에게 원명 스님을 아느냐고 묻자 잘 모르겠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는 많은 외국인이 생활하고 있단다.

"여기에서 아주 오랫동안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 남자 스님인데요…."

20년 전부터 다람살라를 오고가며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 한국 스님이라고 하자 그제서 누군가 알겠다고 말한다. 일손 바쁜 시간임에도 그녀는 친절한 미소로 원명 스님이 묵고 있다는 숙소 근처까지 안내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원명 스님이 보였다. 스님은 어제 남갈 사원에서 나를 보았다고 인사했다.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원룸으로 되어 있는 숙소에는 짐 꾸러미들이 널려 있었다.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가 여기저기 안내해 드릴 수 있는데, 며칠 후면 한국으로 떠나야 돼서 아쉽네요."

원명 스님은 한국으로 짐을 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쪼개 지도를 펼쳐놓고 인도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를 상세하게 알려줬다.

스님이 소포 붙일 시간이 임박해 서둘러 길을 나섰다. 소박한 건물로 들어서 있는 티베트 임시 정부청사와 병원 등을 먼발치에서 둘러보고 맥간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포는 우체국 마감 시간에 맞추지 못해 결국 부치지 못했다.

달라이 라마가 가르치는 용서, 실천하기 어렵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스님이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우체국 옆에 자리한 '피스 카페(peace cafe)'로 들어섰다. '피스 카페'는 한국인 아줌마와 티베트 아저씨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알려졌다. 15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소박한 '피스 카페'는 음식 맛이 일품인데다가 그 값이 저렴하여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단다.

델리에서부터 동행한 우리 일행은 맥간에 도착한 첫날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6명이 네 가지 음식을 시켜 나눠 먹었는데 한 사람 당 40루피, 우리나라 돈으로 800원도 채 안 된다. 나는 맥간에 머물면서 종종 이 식당을 찾고는 했다.

7년 전, 인도 여행길에서 다람살라를 찾아 왔다가 티베트 남자를 만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카페 안주인 송민경씨,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큰 딸이 식탁에 엎드려 글쓰기를 하고 있었는데 티베트어는 물론이고 한국어와 영어, 힌두어 등 4개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맥간 대부분의 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달라이 라마 사진이 이 식당에도 걸려 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존자님'으로 호칭하며 생불로 여기고 있다. 이 식당에 갈 때마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맥간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달라이 라마 사진이 아니었다. 벽면에 걸려있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서 눈물 젖은 밥을 먹고 있는 티베트 소녀의 슬픔 어린 눈망울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 티베트인들이 겪었던 고난의 시절이 이 한 폭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오기 때문이다.

맥간 '피스 카페'에 걸려 있는 그림. 슬픔으로 가득한 눈망울로 밥을 먹고 있는 티베트 소녀.
 맥간 '피스 카페'에 걸려 있는 그림. 슬픔으로 가득한 눈망울로 밥을 먹고 있는 티베트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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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운 1959년, 인도 정부는 난민촌을 세우고 티베트인 난민 3만 명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두터운 양털 옷을 입고 인도에 도착한 난민들은 열대의 더위와 장맛비에 시달렸다. 변변치 못한 먹을거리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난민들에게 열대 지방의 치명적인 병균들이 급습했다. 그 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굶어서 죽어 나가는 티베트인들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들은 맥간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자며 치킨과 맥주 한두 병씩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이미 서양인 6~7명이 모여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머물던 우리 일행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까다롭게 굴었던 나이 많은 독일인 여자도 보였다.

우리 숙소 앞에서 술판을 벌이는 것이 미안했는지 서양인들이 자리를 함께 하자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어 우리는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날 저녁 대구에서 왔다는 대학생이 합류했기에 우리 일행은 모두 7명으로 늘어났다.

맥간에서 보냈던 나흘간을 기분 좋게 풀어놓고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는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서양인이 술잔을 들고 다가 왔다. 자신은 캐나다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니 우아하고 가냘픈 몸짓으로 내게 대뜸 수염이 너무 멋지다며 거듭해서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 캐나다 사내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지만 기분 나쁜 사내는 아니었다. 그가 다시 서양인들이 모여 있는 제자리로 떠나자 한국 친구들이 내게 한 마디씩 농담을 건넸다.

"저 사람 게이 같은데요."
"선생님 좋아하나 봐요."
"독일 할머니도 선생님하고 얘기할 때는 뭐라 그러지 않더니, 독일 할머니처럼 저 사람도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게이라고 해서 나쁘게 보면 안 되지, 게이일지도 모르지만 저 친구 사람 좋아 보이잖어. 근디 왜 하필이면 나이 많은 할머니나 남자가 나를 좋아하지? 여기 이쁘고 멋진 청춘들이 수두룩헌디잉. 그려, 그래도 좋아한다니 좋구먼."

우리는 화제를 바꿔 서양 남자들이 왜 동양 여자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동남아인가 유럽 쪽인가를 통해 인도로 들어왔다는 대구 청년이 그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미국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 애들은 질이 안 좋아요."
"같은 서양인이라 해도 미국 사람들보다 유럽 사람들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 미군 애들과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놈들은 한국 여자를 성 노리개쯤으로 여겼어."

맥주 두 병에 술기운이 오르던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미군 헌병들과 근무했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미군 얘기가 입 밖으로 튀어 나오자 나는 점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애들은 우리를 속국으로 여기고 있다니께. 그런 놈들이 뭐가 좋다고. 전쟁과 학살이 일어나는 지역을 보라고 대부분 미군 놈들이 개입되어 있다구. 석유 뽑아 먹으려고 이라크를 침공할 때 어땠는 줄 알어? 이라크의 어린애들이 폭격으로 처참하게 죽어나가고 있을 때 팔십 프로에 가까운 미국 놈들이 전쟁을 찬성했다고,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지."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사실 대구 청년은 자신이 만난 미국사람들을 얘기한 것이었는데 나는 미국인 모두를 '미군'으로 싸잡아 얘기하고 있었다. 열흘 가까이 함께 했던 동료들조차 멀뚱멀뚱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져 가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이 값도 못하고 공연히 동료들에서 공격적으로 말해서 미안했다. 이래서 나는 제 감정 조절조차 못하는 얼치기 진보주의자였던 것이다.

"아이구, 맥주 두 캔에 술이 취했내벼, 미안혀 공연히 큰 소리쳐서, 나 먼저 들어가 잘게, 재밌게들 놀어."

내 방으로 돌아오면서도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 화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화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떠올렸다.

"용서는 값싼 것이 아니다. 화해도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용서할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문을 열 수 있다.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가장 큰 수행은 용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용서란 진정으로 제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중국이나 미국 등의 강대국들, 그리고 일말의 양심도 없이 거짓과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둘려 대는 한국의 정치가들과 법조인, 자본가들, 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큰 소리치고 있는 저 인간 말종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안에 큰 스승으로 자리 잡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법문조차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가장 큰 수행은 용서라고 하지만 내게 용서라는 단어는 여전히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자비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달라이 라마의 기운이 서려 있는 맥간의 마지막 밤 내내 화 기운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마음자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티베트 사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어제의 눈물은 평화를 갈망했던 자비심이 아니라 단지 분노였단 말인가. 자비심 없는 분노는 너와 나 모두를 파멸로 이르게 하질 않던가."


태그:#티베트 남갈 사원, #눈물, #티베트 도서관, #티베트 아이의 눈망울, #용서와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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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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