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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6일 인도 마더 테레사 출생기념 특별전시회에서 한 아이가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2010년 11월 16일 인도 마더 테레사 출생기념 특별전시회에서 한 아이가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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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이야기' 기사 공모에 무슨 이야기를 써볼까 며칠 고민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의 뒤안길에 조용히 숨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20대, 나는 우연히 성당 레지오마리아단에 가입해 1983년 즈음 경기도 안양에 있던 마더데레사재단 '사랑의 선교원'에 봉사하러 다녔다.

외국 수녀들이 그곳에서 우리나라 무의탁 할머니 50여 명을 돌보고 있었다. 그분들을 가까이 하니, 나도 그들이 실천하는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23살의 나이에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살고자 그곳에 예비수녀로 입회했다.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봉사하는 곳이었다.

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너희가 여기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10여 명의 수녀님들은 새벽 종소리에 깨어나 침상 옆에 꿇어앉아 기도한 후에 2층에 계시는 무의탁 할머니 환자들의 기저귀를 갈고 목욕 시키는 등 노동과 기도의 삶을 살았다.

마더 테레사 뜻 따르기로 결심

우리는 새벽 종소리에 깨어나 무릎 꿇고 기도를 한 후에 잽싸게 2층으로 올라가 할머니들이 밤새 내놓은 요강을 비웠다. 이어 환자들의 기저기를 갈아 드리고 목욕시킨 후에 옷을 갈아 입혀 드렸다.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사랑의 선교원까지 오신 분들 중에는 치매환자, 중풍으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분도 계셨다. 몇 분은 체구가 커서 목욕 시키기 위해 옮기는 일이 여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여러 할머니들이 각자 작은 침대 위에 주무시는 방에 아침에 들어가면 밤새 본 대소변으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곳에 입회한 지 얼마 안 된 어느날, 체중이 많이 나가는 중풍 걸린 할머니가 대변기에 대변을 가득 봐 놓았다.

그날 저녁에 우리 식탁에는 인도식 카레라이스가 나왔다. 큰 쟁반 위 밥에 누르스름한 인도 카레를 부어 주었다. 아뿔사, 오늘 할머니 변기를 비우다가 본 그 색깔과 똑같았다. 나는 수저를 들다가 오전에 본 그것이 연상돼 메스꺼워 수저를 내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 예비수녀들을 관리하던 여학교 사감같은 수련 수녀님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아녜스! 지금 당장 수저를 들고 그 음식을 남기지 말고 다 들어요!"

수련 수녀님의 날카로운 눈빛과 매몰찬 목소리에 흠칫 놀란 나는 놓았던 수저를 얼른 집어들었다. 마지못해 그 음식을 비운긴 했다. 그런데 속이 원하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서인지, 위에서 거부 반응이 시작돼 음식물이 목구멍으로 다시 나왔다. 나는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먹은 모든 것을 다 토했다.

이곳에 입회한 예비 수녀들에게는 외국 현지 적응 훈련을 위해 김치나 고춧가루 등 매운맛이 나는 음식을 전혀 먹이지 않았다. 심지어 라면도 순한 라면에 감자나 닭내장을 넣어서 끓여 먹었는데, 김치 없이 먹기가 힘들었다. 마치 군대처럼 절제, 절도 있는 생활로 적응을 해야 했다. 결국 음식 적응 훈련에 실패해 집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많았다.

마더 테레사처럼 살겠다던 젊은 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곳을 나오던 날, 나는 펑펑 울었다.

그 당시 사랑의 선교원 대문 앞에는 환자나 노인들을 데려다 놓고 말없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날 젊은 아주머니가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와서는 "가족이 없는 불쌍한 할머니인데,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아무 말 없던 할머니는 그녀가 떠나자 "저 아이는 우리 딸인데..."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들것에 실려 사랑의 선교원에 온 말기암 환자 아주머니도 생각난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이름과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입을 함구했다. 처음에는 먹는 것도 거부하고 원한에 서린 눈빛이었다. 오랫동안 누워서 투병 생활을 한 탓에 아주머니 등에는 욕창이 여러군데 생겼고, 살이 썩고 있었다. 그 탓에 다른 할머니들과 한 방에 거주하지 못하고 독방에서 보살펴 드렸다.

기도 후, 아주머니는 눈을 감았다

아침에 아주머니를 돌보러 들어가면 살 썩는 냄새로 그야말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아주머니 몸은 바싹 야위였고, 묽은 죽 한두 숟가락으로 연명했다. 그녀의 침대 시트를 갈고 몸을 닦아주면서 자연스레 등에 난 욕창을 봤다. 더운 여름이라 물수건으로 온몸을 구석구석 닦은 다음에 가볍게 분을 발라주었다. 그날은 아주머니의 고통스런 눈빛이 너무 불쌍해서 침상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생명을 주관하는 주 예수님, 불쌍한 이 아주머니 생명을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세요."

기도가 통했는지, 그날 오후에 아주머니는 고통스런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나라로 갔다.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던 23살 그때. 2000년 전의 인물 예수그리스도의 품성에 반한 나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고자 마더 테레사의 봉사의 삶을 선택했다. 해질녁 성당에 모셔진 예수님 성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주 예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느끼며 "주님께서 맛보신 오상의 고통을 저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당돌한(?) 기도를 열정적으로 하곤했다.

그래서일까? 내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씨앗 두 개를 품어서 낳았고 지금은 그 아이들을 키우는 데 내 삶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세속에 부대끼고 변한 내 모습을 본다.

젊은날에 꿈꾼 이상향이 그리울 때면 잠시 그 시절을 떠올리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 험한 세상의 바다를 건너 오면서 느낀 건, 가장 더러운 것은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추악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 더러운 이야기 기사공모



태그:#인도마더데레사, #사랑의 선교원, #인도카레, #할머니 대변, #암환자의 욕창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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