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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찍어야 할까요?"

후배의 질문에 "그 중에 선택해야 한다니.... 그냥 이사 와라"라고 답했다. 농담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갑갑하다. 그 지역 후보를 보고 있자니 나라도 투표할 기분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지역이라 하여 더 신바람 나는 상황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표가 아깝지 않은 광역자치단체장 후보가 있다.

7표나 찍어야 하니 그 중 지지하는 후보가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기초자치단체장은 아직까지 망설여진다. 다른 후보가 되는 걸 막기 위해 '그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건 정말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선택의 폭이 좁으면 투표할 의욕이 꺾인다.

선거를 맞이하는 기분이 늘 이랬던 것은 아니다. 선거일이 기다려지고, 투표하러 가는 게 설레던 때도 있었다. 기다리는 줄이 길까봐 아침 일찍 투표소에 다녀와 밥을 먹었고, 종일 '왜 이리 시간이 안 갈까' 생각했다. 투표 마감 시간에 맞춰 방송사에서 일제히 내보내는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리며 '5, 4, 3, 2, 1'을 마음속으로 함께 세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비슷비슷한 개표 방송을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보았다. 어떤 스포츠 관전도 그보다 재미있지 않았던 것 같다. 공중파에 나오지 않는 기초 선거 결과는 개표참관인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정보가 도착하길 학수고대 기다렸다. 10년 전 이야기다.

잊을 수 없는 투표의 설렘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에 성공해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했던 2004년 이후 몇 번의 선거가 더 그러했다. 정치가 신나고 재미있었던, 정치를 통해 사회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아름다운 시절이다.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보좌진이 17대  국회 개원을 맞아 2004년 5월 31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감사와 다짐`을 발표했다. 권영길 대표와 천영세 의원단대표, 단병호 의원 등이 함께 국회로 걸어오고 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보좌진이 17대 국회 개원을 맞아 2004년 5월 31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감사와 다짐`을 발표했다. 권영길 대표와 천영세 의원단대표, 단병호 의원 등이 함께 국회로 걸어오고 있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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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권영길, 강기갑, 심상정, 노회찬 등은 모두 스타급 의원이었고, 사람들은 지금도 진보정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대중적으로 각인된 진보정당 의원은 그들이지만 내 마음 속 첫 번째 의원들은 따로 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당선한 심재옥, 김민아, 박주미, 윤난실 등 광역의회 의원들이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창당했는데 같은 해에 있었던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선자가 없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무려 44명의 당선자를 냈다. 기초의원 31명, 광역 의원 11명, 기초단체장 2명이었다. 진보정당의 첫 의원들이 탄생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정치는 그렇게 지역에서 출발했다.

기초단체장 2명과 지역구 광역의원 2명이 당선된 울산은 1995년부터 꾸준히 활동한 결과였지만 다른 지역은 말 그대로 '최초' 진출이었다. 그 뒤 민주노동당 의원은 점차 증가한다.

광역의원은 2002년 11명, 전체 광역의원의 1.61%였던 것이 2006년 15(2.05%)로 늘었고, 다시 2010년 24명(3.15%)까지 늘었다. 기초의회 의원의 경우 2006년 66명(2.29%)에서 2010년 115명(3.98%)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

2002년 당내 지원체계도 갖춰지지 않았던 때에 혈혈단신 광역의회에 진출했던 9인의 비례대표 여성의원들은 '아름다운 왕따들'이라고 불렸다. 수십 명 중 단 한 명의 의원이었으나 이들 때문에 외유성 해외연수, 관급 비리, 의장 선출을 둘러싼 돈 봉투 살포 등 관행이란 이름의 부패 정치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들의 "이의 있습니다"는 만장일치를 선호하던 이들을 적잖이 당황시켰다.

진보정당 의원이 있는 지방의회와 그렇지 않은 지방의회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들은 고정불변으로 보였던 지역의 양당 정치에 균열을 냈다. 특히 특정정당이 지방정부와 의회를 독차지한 지역에서는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안전장치'가 없는 셈이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견제와 감시 역할을 제대로 할 진보정당 의원이 필요하다.

진보정당 1기 지방의원들은 오로지 의정활동으로 승부하였기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의원으로 평가되었다. 지역의 공신력 있는 시민단체가 선정하는 최우수 의원, 동료 의원이 뽑은 최고 의원, 의회 최다 시정 질문 의원, 최다 조례발의 의원, 지방자치학회선정 우수조례상 수상 의원, 의회 회의록을 기록하는 속기사가 뽑은 최고의원까지 의정활동 관련 수상은 휩쓸다시피 하였다.

윤난실 전 민주노동당 광주광역시의원.
 윤난실 전 민주노동당 광주광역시의원.
ⓒ 시민의 소리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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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의회를 모니터해온 시민단체가 그 해의 좋은 질의 13개를 골랐는데 그 중에 3개가 19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던 윤난실 의원의 것이었다. 윤 의원은 언론사가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여성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른 의원들도 여러 언론사의 '좋은 리더'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특히 교육, 노동, 여성, 장애인, 복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 명의 진보 지역의원이 바꾼 세상

지금은 보편적 복지의 대표정책이 된 무상급식의 출발은 민주노동당 지방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수만 명의 주민 서명을 받아 주민발의를 하는 등 적극적 역할을 통해 무관심하던 의원들을 설득해 결국 학교급식지원조례를 제정했다. 소아과에서 영유아 예방접종을 무상으로 하게 된 것도 전염병무상예방접종 조례가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회복지 기초욕구조사, 보건지표를 만들어 복지사업을 실시할 때 기준이 되는 기준표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만들었고, 의회 내에 '대중교통에 정책에 대한 진단과 방향제시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공공교통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교통정책을 최초로 논의하였다.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장을 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여 철옹성 같은 교육계 비리를 밝히고 징계조치를 받게 했다. 단 한 명의 좋은 의원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야말로 '거대한 소수'였다.

지방의원들에게 주어진 권한은 상당하다. 헌법 제117조 제1항은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자치입법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지방자치법은 조례 제정권과 함께 사업 허가의 승인 등 주요 결정사항에 대한 의결권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지방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심의·확정하는 예산안 심의권도 중요한 권한이다. 선심성 예산, 불필요한 예산을 철저히 감시하여 시민을 위해 쓰이도록 할 수 있다.

지방의원은 이름난 지역 유지를 위한 명예직도 아니고, 지역구 국회의원의 손발이 되는 자리도 아니다.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정치에 곧장 반영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민주주의의 핵심 전력이다.

다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누구를 찍어야 한다거나, 누구를 찍지 말아달라는 말을 하기엔 상황이 멋쩍다. 진보정당이 단 하나의 정당이었던 과거에는 지지해 달라 말하기가 쉬웠지만 지금은 복잡하다. 지역에 따라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통합진보당 후보가 각각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무소속으로 나온 괜찮은 후보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내가 사는 마포지역에서는 '마포파티(party)'라는 이름으로 4명의 기초의회 '주민후보'를 선정하였다. 정의당 1명, 노동당 1명, 무소속 2명이다. 소속은 달라도 모두 주민을 위하여 일할 후보라고 공인한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후보 찍어주세요

다시 한 번 진보정당을 밀어 달라 하기엔 다소 민망한 형국이지만 다만, 지방의회가 가진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 의원들이 있었음은 기억해 줬으면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외면할수록 '현명한 대리인'은 사라진다.

5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 마련된 소공동사전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시민이 기표소에서 나오고 있다.
▲ 투표 마친 시민 '소중한 한표' 5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 마련된 소공동사전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시민이 기표소에서 나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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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례대표제는 정치적 선택지를 다양화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현재를 위한 선택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기회가 된다. 앞서 말한 진보정당의 첫 번째 의원들은 비례대표로 광역의회에 진출하였다.

(민주노동당 소속) 광역의원 전원이 여성이었던 것은 2002년 3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정당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비례대표 50%를 할당하고 '1, 3, 5...' 홀수 순위를 여성으로 배정하는 방침을 결정한 데서 기인한다. 지금은 보편화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진보정당만이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비례대표제가 없었다면 수십 명 속 단 한 명의 보석 같은 의원들은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례대표제의 의미는 그런 것 아닐까.

이번 지방선거는 1인당 7표를 투표하게 된다. (단, 제주특별자치도는 5표, 세종특별자치시는 4표를 투표한다.) 선관위는 어렵지 않다지만 나는 어렵게 생각되었다. 번번이 시험 보는 학생 심정이다. 사전선거를 했다. 역시 어려웠다. 7장을 받아들고, 광역자치단체장, 교육감, 비례대표 시도의원, 구의원까지 쉬운 순서대로 기표했다. 구청장, 시의원, 비례대표 구의원은 기표소 안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내가 정말로 찍고 싶은 후보만 찍는 선거를 하게 될까? 다음 선거에서는 그럴 수 있을까? 그 다음 선거에서는? 미뤄둔다고,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선거 때가 되면 투표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겐 사랑한다 말하고 살자. 4년 뒤에 고백하기엔, 우리 삶이 생각보다 짧다.


태그:#민주노동당, #진보정당,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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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2014 지방선거, 뉴스게릴라가 간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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