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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허니문 베이비가 생겨 3월 중순부터 입덧으로 힘겨운 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봄꽃보다 더 화사한 신혼이어야 했는데 심한 입덧과 임신으로 인한 불면증으로 봄이 왔는지도 갔는지도 몰랐다.

그 후로 네 번의 봄이 더 찾아왔지만 늘 젖먹이를 달고 있거나, 임신 중이라 '봄처녀'는 고사하고 '봄아줌마'도 되기 힘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세 아이를 낳고 기른 지난 5년을 돌아보니 춥고 외로운 긴 겨울의 기억만 있는 듯하다. 사진첩을 들춰보면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또 가을대로,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아이들과 계절을 즐긴 것 같은데 기억은 너무나 긴 겨울뿐이다.

2013년의 복댕이와 2014년의 복댕이
▲ 시간의 힘 2013년의 복댕이와 2014년의 복댕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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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겨울날의 기억, 지난 오년 동안의 육아

작년 2월 초에 태어난 복댕이는 작년 봄 내내 내게 붙어 있었다. 수시로 젖을 찾고 안아줘야 잠을 잤다. 둘째 산들이는 두 돌이 되기도 전에 동생을 본 스트레스와 말문이 트이기 전 스트레스가 겹쳐 하루의 반을 떼쓰며 울어댔다.

첫째 까꿍이는 다섯 살이 되면서 하고 싶은 게 많아져 뭔가를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동생들 때문에 저를 봐주지 않는 엄마에게 상처를 받아 속상한 날이 많은 봄을 보내야 했다. 거기다 친정 아빠를 먼 곳으로 보내드려야 했던 작년 봄…. 가족 모두가 힘든 봄이었다.

그랬던 겨울 같은 봄날이었는데, 올해 다시 찾아온 봄은 곳곳에서 봄이 눈에 들어온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보다 더 반가운 산수유, 등불처럼 피어난 고고한 목련, 숨은그림찾기 하듯 먼 산에 박혀 있는 진달래, 도시의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제비꽃, 담장을 수놓는 개나리, 설렘 가득한 벚꽃 모두 눈으로 들어와 아줌마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곳곳에 피어난 봄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으니 남편이 한마디 한다.

"이제 좀 살 만 한가 보네? 꽃도 다 눈에 들어오고."

첫아이를 임신했던 우리들의 신혼
▲ 2009년 봄 첫아이를 임신했던 우리들의 신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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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아이라 모든 게 서툴고 힘들었던 봄
▲ 2010년 봄 첫아이라 모든 게 서툴고 힘들었던 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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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세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의 자리에 서 있지만 작년보다 한결 수월해졌다. 복댕이가 15개월에 접어들어 젖을 찾는 횟수도 줄었고 누나, 형과 같이 밥 먹고 간식 먹고 놀아주고 밤잠도 꽤 길게 자는 편이라 책상 앞에 앉아 글 쓸 시간도 많이 늘었다. 이젠 카시트에서도 크게 보채지 않아 장거리 여행도 부담이 덜어졌다.

또래보다 말이 조금 늦어 스트레스가 있었던 산들이도 네 살이 되면서 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게 되자 떼쓰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누나와 동생 사이에서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집을 피우는 날도 있지만 가운데 끼여 자라면서 예민한 부분이 많이 둥글어지는 게 눈에 보여 마음이 놓인다.

여섯 살이 된 까꿍이는 드디어 소원하던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유치원 가방 메고 아빠 자전거 뒤에 타고 유치원에 가는 까꿍이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유치원에 다닌다고 자랑 중이다. 손 꼭 잡고 다니는 '잘생긴' 남자친구도 생겼고, 예쁜 선생님께 노래도 배우고, 말 안 통하는 동생들이 아닌 또래친구들과 매일 신나게 놀면서 보내는 까꿍이의 봄은 그 어떤 꽃보다 예쁘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했다

둘째 산들이가 태어나기 직전 봄
▲ 2011년 봄 둘째 산들이가 태어나기 직전 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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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었는데 아이 셋을 키워내다 보니 어느 순간 봄은 내 곁에 와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야말로 "도둑처럼" 온 봄이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더니 긴 겨울 끝에 아이들은 반짝이는 시냇물이 되어 조잘거리며 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터널 같은 긴 겨울 속에서 나는 아이들만 키우며 지쳐간다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자란 만큼 나도 나이를 먹고 그만큼의 봄을 맞고 있었다.

몇 해 만에 가슴으로 느끼는 봄날. 남편이 세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외출한 사이, 나 홀로 있는 길고도 잠시인 봄날의 찰나, 창밖 풍경을 가만가만 들여다본다. 앞 다투어 피어나는 꽃만 보이던 봄처녀 설레는 마음과는 조금 달라진 마음으로 마주하는 봄이다.

세상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이 봄이 오기 까지 얼마나 추운 겨울 속에 서 있었는지, 얼마나 긴 겨울을 인내하였는지 꽃을 피워낸 나무를 보며 뒤돌아본다.

그렇게 헤아려보는 봄 속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인다. 전에는 그저 꽃이 피고 지는 것만 보였는데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마흔에 가까운 삼십대 중반에 서고 보니 봄도, 꽃도, 나무도, 세상 모든 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조금씩 가슴으로 헤아려진다.

누나가 된 까꿍이와 돌을 기다리는 산들이
▲ 2012년 봄 누나가 된 까꿍이와 돌을 기다리는 산들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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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가는 봄

오래된 집 담장 너머로 보이는 매화나무의 붉은 꽃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 붉은 꽃잎 아래로 전에는 보지 못했던 30년은 더 되어 보이는 나무가 보인다. 한자리에 서서 얼마나 많은 겨울을 견뎌내며 봄을 맞이하고 보내며 꽃을 피워냈을까…. 꽃을 피우고 보내며, 열매를 맺고 보내며 세월을 먹고 나이가 든 담장 너머 매화나무의 굽어지고 거칠어진 두꺼운 나무의 등을 마음으로 쓰다듬어 본다.

오 년 내내 똥기저귀 갈며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 거칠고 굵어져 가는 내 손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쓰다듬어 본다. 먼저 보낸 남편을 쏙 빼닮은 외손자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친정 엄마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쓰다듬어 본다. 비록 곁에 계시진 않지만 곳곳에 봄을 뿌려 놓고 가신 아빠의 봄을 마음 깊이 차곡차곡 담아본다.

외할아버지의 찬란한 유산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 2013년 봄 외할아버지의 찬란한 유산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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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꽃잎 대신 오래된 나무의 기억을 담으니 마음도 나이를 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간다. 나이 든 마음으로 다시 보는 풍경은 그저 오래된 풍경만이 아니다. 지나간 시절의 긴 이야기와 앞으로 만들어갈 더 긴 이야기가 보이고 들려오는 듯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려보다 집으로 돌아온 세 아이들을 보니 나이를 먹는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구나,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열정은 없지만 익숙한 편안함이 참 좋구나 하는 마음이 피어난다.

꽃잎이 져도 괜찮아

나무가 나이가 들었다는 건 그만큼 많은 꽃을, 봄을 피워냈다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건 내가 낳아 키우는 아이들이 그만큼 자랐다는 것이다.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다섯이 되어 바라보는 봄은 젊은 날 나 혼자 보던 봄과는 당연히 다르다. 육아와 살림을 하느라 내려놓고 있었던 내 일과 꿈이 생각나면서 괜히 울적해지고 더 힘이 들었던 겨울 같은 날이 많았는데, 봄도 나이가 들고 있음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니 육아와 살림이라는 새로운 일을 쌓아 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아이들이 잠든 밤,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워 엉엉 울었던 힘든 날들을 버텨낸 덕분에 아이들이 자랐고, 나도 엄마로 자라나며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갈 꿈도 꾸게 되었다.

이웃 동네 30년 된 아파트의 아름드리 벚꽃나무에 감탄하다 우리 동네 4년 된 아파트의 키 작은 벚꽃나무를 보니 내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어린 벚꽃나무가 넓은 꽃그늘을 드리우게 되는 날, 그 아래 나보다 더 커진 젊은 아이들이 할머니가 된 내 손을 잡고 서 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날에 되돌아보는 오늘이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평온하고도 부지런히 봄의 한가운데로 걸어가 본다. 일찍 온 봄이 더 일찍 가버리기 전에, 내 손짓 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세 아이들이 훌쩍 자라 내 품을 떠나기 전에.
   
얘들아 봄이다 봄!!!
▲ 2014년 봄 얘들아 봄이다 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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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순식간에 창문 밖 풍경이 영화 속 한 장면이 된다. 아이들의 탄성이 들려온다. 꽃이 졌다고 아쉬워 말자.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를 먹고 건강하게 나이를 먹다 보면 봄은 또 온단다. 꽃처럼 피어나렴 얘들아. 엄마가 너희들의 엄마로서의 꿈과 나의 꿈으로 더 단단한 나무가 되어 줄게.

새로움과 익숙함의 미덕
▲ 나이 들어가는 봄 새로움과 익숙함의 미덕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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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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