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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 씨가 김장하러 온대."

정훈이 엄마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언제?'라는 표정을 짓는다. 안치환씨와 함께 김장을 한다는 그 집은 졸지에 '아줌마 부대'를 맞게 생겼다. 그러자 다른 이가 "안치환씨도 쉬어야지. 우리가 몰려 가면 그 사람이 쉴 수가 없을 거야"하며 정리했다. 그이 말이 맞다. 모처럼 아는 이들이랑 쉬는 안치환씨에게 사람들이 몰려가 사진 찍고 구경하면, 그게엔 대중을 의식하는 또 하나의 일이 될 것이다.

아줌마 대부대가 뜰 뻔 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박광숙 선생님이 "김장속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해서 비로소 생각이 났다. 아, 안치환씨가 김장하러 온다더니 오늘(12월 1일)이 김장을 하는 날이구나. 그래서 김장 잔치를 하는 강화군 불은면 고능리에 있는 규리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 댁의 안주인은 박 선생님과 형님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라서 해마다 김장을 함께 하는데 올해는 안치환씨네 김장도 같이 한다고 했다.

여럿이 하는 김장은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여럿이 하는 김장은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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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에는 벌써 여러 대의 차가 줄 지어 서 있었다. 김장하러 온 사람이 많다는 소리다. 그러면 나는 손에 양념을 묻히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 말고도 선수들이 많은데 나까지 나서서 김장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사진만 찍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을 대면하자 카메라를 꺼내 들이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들 김장하느라 바쁜데 나만 노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안면이 없는 안치환씨에게는 더 그러했다. 오늘의 김장은 오붓하게 친구들끼리 즐기는 자리인데 괜히 사진을 찍고 그러면 그 분위기가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들었다. 또 나도 그들과 같은 이웃 친구로 섞이고 싶은데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와서 사진만 찍는 얼치기 구경꾼으로는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언제 사진기를 꺼낼까 그 궁리를 하느라 김장속 맛이 좋은지 어떤지 느끼지도 못했다.

사실 안치환씨와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예전에 박광숙 선생님과 같이 안치환씨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기에 완전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 많은 대중들을 상대하는 가수 안치환씨의 입장에서는 내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인사를 나눈 팬의 한 사람일 뿐이고, 더구나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김장 만들기에 섞여 들어갔다.

김장이 만들어준 흥겨운 자리입니다.
 김장이 만들어준 흥겨운 자리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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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씨와 박광숙 선생님은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어제 오늘 만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인연으로 만난 것일까. 안치환씨가 김남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많이 만들었는데, 그래서 서로 아는 사이일까?

김남주 시인과 가수 안치환

김남주 시인은 민주화운동으로 십 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1988년 12월부터 199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각종 재야 집회에서 시 낭송으로 힘을 보탰다. 그때 가수 안치환씨를 만나 여러 시위와 집회에서 함께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안치환 씨와 김남주 시인 그리고 박광숙 선생님은 오랜 동지이자 벗이었다.

1980년대, 그때는 암울하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였다. 엄혹한 군사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그 시대가 젊은이들에게 부여한 사명이었다. 박광숙 선생님의 부군이신 김남주 시인은 감옥 안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이 피를 토하듯 쓴 시는 시대의 어둠을 불사르는 불씨가 되어 타올랐다. 

김남주 시인은 시로 투쟁을 한 '전사(戰士)'였다. 그래서 시인을 떠올릴 때면 강렬한 전투적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는 은유나 상징으로 문제를 드러내기보다 예리한 육성으로 직설적으로 주제를 드러냈다. 끝까지 저항하며 온 몸으로 시를 쓴 사람이 바로 김남주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전사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붙었다.

"만인을 위해 노력하고 싸울 때 나는 자유"라고 시인은 말한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 또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도 말한다. 강물 위에 파문을 그리고 가라앉는 돌맹이 하나가 되고자 했고 새날을 밝힐 불씨 하나 되고자 했던 시인은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와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이 얼마일지 알 수 없어도 그리 되고자 했다.

박광숙 선생님과 함만복 시인이 마주보고 서서 속을 넣고 있습니다.
 박광숙 선생님과 함만복 시인이 마주보고 서서 속을 넣고 있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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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의 시는 화살이 되어 팽팽하게 날아가서 사람들의 심장에 꽂혔다. 그것은 안치환씨의 노래 덕분이기도 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절규하듯 노래하는 안치환의 목소리와 김남주 시인의 시는 잘 어울렸다. 그래서 시인을 모르는 사람들도 안치환의 입을 통해 시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시인은 갔어도 그의 정신은 대중들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안치환씨는 공연을 할 때마다 김남주 시인의 미망인이신 박광숙 선생님을 초청해서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셨다. 그리고 공연 중에 관중들에게 박 선생님을 소개시켜 드리며 노래들이 김남주 시인의 시에서 태어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의 가수 대기실로 박 선생님을 모셔서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때 나도 박 선생님 덕분에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보며 노래를 즐겼고 더구나 공연이 끝나면 대기실까지 같이 가서 안치환씨와 인사도 나누고 또 직접 사인을 한 음반도 얻어오곤 했다. 그러니 안치환씨를 영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만나니 어색해서 알은 체도 하지 못했다. 

함민복 시인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김치속을 넣고 있었다. 노래하는 가수에 시인까지 합세를 했으니 김장 잔치는 무르익을 대로 익어 올랐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던 백구도 김장 판을 기웃대곤 했다. 이웃에 살면서 오래 정을 나눈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 처음 보는 사이도 있을 텐데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게 마치 오래 내왕을 하며 산 사람들 같았다. 그것은 김남주 시인과 박광숙 선생님을 축으로 해서 맺어진 인연들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대금을 부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신명이 났습니다.
 대금을 부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신명이 났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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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김치를 버무리던 두 남자가 슬며시 자리를 뜬다. 술은 끊었는데 담배만은 못 끊었다면서 함민복 시인이 맛있게 담배를 피운다. 그 옆에서 안치환씨도 같이 연기를 뿜으면서 끽연을 즐긴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안도현 시인은 이 정부가 끝날 때까지 시를 아니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함민복 시인은 술을 끊었다. 앞으로 5년간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며 딱 끊었다. 함 시인에게 술은 보통의 술이 아니라 시가 나오게 하는 매개체였을 지도 모르는데, 그는 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시 쓰기를 그만둔 시인들

과거 독재시대에 김남주 시인은 시로 저항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한 것인가. 지금 시대에도 시로 저항하는 시인들이 있다. 언제가 되어야 시인들이 즐거이 시를 쓸 수 있는 사회가 될까.

마당 한쪽에 있는 소나무 곁에는 엉덩이를 내려놓고 쉴 수 있을 크기의 바위들이 서너 개 있다. 바위 위에는 기다랗게 생긴 검은색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안치환씨가 그 가방을 열더니 대금과 악보집을 꺼낸다. 그리고 곧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라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라는 노랫말의 <섬집 아기>가 대금 소리에 실려 애절한 듯 구슬프게 들려온다.

이어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비롯해 <봄날>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누나..." 연주가 이어졌다. 김장을 하던 사람들은 대금 연주에 홀려서 속을 넣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이제 김장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어간다.

어미 개랑 놀던 여섯 살짜리 그 집 손녀가 다가오더니 노래를 한 곡 신청한다. 아이에게도 대금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던 모양이다. 아이는 자기가 아는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어떤 노래도 다 자신이 있을 것 같던 안치환 씨가 그만 쩔쩔맨다. 꼬마 숙녀가 청한 노래가 예사 노래가 아닌 모양이다. 그 아이가 청한 노래는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로 시작하는 유치원생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가수 안치환씨도 안 되는 노래가 있었다.

오늘의 자리를 만들어준 안주인에게 술을 한 잔 권합니다.
 오늘의 자리를 만들어준 안주인에게 술을 한 잔 권합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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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나누고 인연을 만드는 김장 잔치

불은면 고능리의 그 댁 김장은 안 먹어봐도 맛있을 것 같다. 함민복 시인의 손맛에다 안치환씨의 대금 연주까지 가미 됐으니 어찌 맛이 좋지 않을 리 있겠는가. 150포기 절인 배추가 그새 다 동이 났다. 김장을 지휘하던 안주인은 그새 상을 다 봐놓았는지 밥을 먹으러 오라고 부른다. 거실에는 벌써 점심상이 차려져 있다. 팥 시루떡, 막걸리, 배추속대국까지 끓여 놓았다. 말린 새우를 넣고 끓인 배추속대국은 시원하면서 달았다. 한 그릇만 먹고 숟가락을 놓기에는 아쉬웠는지 안치환씨는 국을 한 그릇 더 떠와 코를 박고 먹는다.

고능리의 김장 잔치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 김치를 몇 통씩이나 나눠주고도 아쉬웠는지 안주인은 텃밭으로 가더니 대파를 한 아름 뽑아서 안고 온다. 화분에 심어두면 겨우 내내 아쉽지 않게 대파를 먹을 수 있을 거라면 비닐에 둘둘 말아 차에 실어준다. 떠나는 사람들도 아쉬웠는지 몇 번을 돌아보며 인사를 나눈다.

김장을 핑계로 하루 잘 놀았다. 김장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마음껏 펼쳐 놓고 놀 수 있었겠는가.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마치 오래 사귄 사이처럼 친해졌다. 김장속 양념들이 서로 섞여 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어울려 익어갔는가 보다. 내년을 또 기약하는 것은 정(情)일 것이다. 올겨울 김장김치를 꺼내먹을 때마다 마음 저 밑에서부터 따듯한 기운이 올라올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기사 공모 '김장'에 응모합니다.



태그:#김장, #김남주, #안치환,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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